노래가 된 詩 - 정지용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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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고향에 비가 내린다. 짓다만 초가집 추녀끝으로 빗방울이 눈물방울처럼 떨어지고 비에 젖은 굴뚝에선 구들장을 말리는 연기가 향불처럼 피어오른다. 빗줄기는 바람을 타고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천둥소리도 들린다. 오래된 아스팔트 곳곳이 울퉁불퉁 패어난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 마당의 감나무가 시인의 생가를 향해 가지를 축 늘어뜨린 채 담을 넘었다. 비를 피해 인부들이 황급히 사라진 시인의 집 마당은 손수레 짚단 삽 비닐조각 등속으로 어지럽다. 청석교 아래 「실개천」은 폭우로 불어난 붉은 황토물로 울어댄다. 납북된 지 33년만에야 해금된 시인의 장남 구관씨(68)가 오랜 망각에서 깨어난 아버지의 새 시집 서문에 썼던 글이 빗물과 함께 흘러간다.
『혹여나 아버님이 돌아오실까 하여 그 숱한 세월을 가슴 조이시다 가신 어머님의 눈시울에는 이슬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망연히 먼산을 지키시다가 떠나가는 구름을 따라 어머님은 손을 저으며 가셨습니다. 이렇게 애절히 기다리시는 어머님의 마음을 저야 어찌 그 반분인들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정지용(1902∼?) 시인의 생가. 7월말 완공을 목표로 복원중인 생가는 온통 빗물로 흥건하다. 한국 근대시사에서 그이 만큼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열어보인 시인도 그리 흔치 않다는 상찬을 들었던 시인은 이곳에서 한약상을 했던 부친 태국씨의 장남으로 1902년 5월15일(음력) 태어났다. 부친은 젊어서 중국 등지를 전전하면서 익힌 한의학으로 약상을 경영하며 여유있는 생활을 영위했으나 어느해 여름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고 곤궁하게 살아갔다. 비록 가난했지만 시인에게 이곳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사랑하는 누이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아내가 정답게 살던 애틋한 고향이었다. 열일곱살에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다가 납북돼 영영 생사조차 알길이 없어진 시인은 혼령으로나마 다시 돌아와 복원되는 자신의 생가를 지켜보고 있을까.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고향」전문)
정지용시인은 이곳에서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마치고 4년간 한문을 독학한 뒤 17세에 서울로 올라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천재로 소문난 그는 재학시절 성적이 매우 우수했고 교지를 만들며 일찍이 뛰어난 문재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다시 귀국,휘문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다가 해방공간에서 이화여대 교수와 경향신문 주간으로 활동하던 중에 전쟁을 만나 납북되고 만 것이다. 일반에 노래로 널리 알려진 「향수」는 시인이 경도땅에서 이국의 쓸쓸함을 달랠 때 나온 시편이다.
휘문고 교사시절인 1930년대 후반은 시인의 연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4세이던 1935년 그가 박용철 김영랑 시인 등과 더불어 만들었던 시문학사에서 첫시집 「정지용 시집」이 나왔다. 당시 한 평론가는 『온 세계문단을 항하야 「우리도 마츰내 시인을 가졌노라」고 부르지즐 수 잇슬만한 시인을 갖게 되고 또 여기 처음 우리 조선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당대를 주름잡던 김기림시인 또한 『사람들은 이 수려한 장식 속에 쌓인 아름다운 시집에 의해서 시 아닌 것과 참말 시의 경계를 다시 한번 뚜렷하게 분별할 것』이라고 찬사를 퍼부었다. 이러한 상찬에 힙입어 정지용은 일약 대시인으로 부각되었고 30년대 시단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후대의 평론가 김학동 교수(서강대)도 『겨우 한국 근대시의 틀을 잡기 시작할 때,우리 말의 속성을 파헤쳐 그 하나하나의 기능을 되살려 감각적인 국면을 이만치 개척한 시인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그러나 해방공간에 접어들어 격렬한 이데올로기 싸움의 와중에서 시를 쓰지 못한다. 좌익단체인 문학가동맹에 본의와는 다르게 이름이 걸려있었지만 한 번도 그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6·25를 만났고 녹번리 초당에 찾아온 젊은 청년들과 함께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자수」하러 나갔다가 종적을 감추게 된다. 이후 평양의 감옥에서 그를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과 함께 그는 그곳에서 폭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이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는 참혹한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나자마자 흔적도 없는 전쟁의 제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또 한 번 죽였다.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누명 때문에 88년 해금되기까지 그는 잊혀진 인물로 남아야 했던 것이다. 이제는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옛 영광을 회복지만 시인을 결과적으로 국민적인 시인으로 후대에 다시 탄생시킨 것은 평론가들의 조명도 아니고,새로 발간된 시집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래였다. 1989년 세상에 나온 김희갑 작곡의 「향수」야말로 시인 정지용을 초등학생들에까지 널리 알려준 일등공신이었다. 가수 이동원씨(45)는 시인이 해금되던 해에 우연히 여의도의 한 책방에 들렀다가 「향수」를 접했다. 시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그는 서울대 음대 박인수교수를 찾아가 같이 노래할 것을 협의했고,다시 작곡가 김희갑씨를 찾아가 작곡을 의뢰했다. 김희갑씨는 1년여 동안 두 사람의 음색까지 고려하며 이 곡과 씨름한 끝에 작품을 내놓았고,전국민의 애창가요가 된 「향수」는 1989년 10월3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정지용 흉상제막식 기념공연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때마침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옥천에 와 있던 이동원씨는 시인의 시를 두고 『우리 말이 어떻게 그처럼 예쁠 수가 있는가』라며 속삭이듯 노래하는 특유의 음성으로 시인을 기린다.
시인의 생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죽향초등학교 운동장까지 빗줄기는 지치지 않고 따라온다. 옥천공립보통학교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목조 강당건물만은 아직도 옛 자취를 그나마 간직하고 있다. 유치원으로 활용되는 강당 너머로 어린아이들이 활달하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나온다. 현관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일행을 보며 사진을 찍어달라며 환하게 웃는다. 사진 대신 아이들에게 「향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기다릴 것도 없이 합창하듯 줄줄이 시를 외우다가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 뜨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향수」 전문)
세계일보 1996.8.3
정지용 시/변훈 곡/테너 임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