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의 예술가곡"에 관한 소고
* 이 글은 한세대학교 김용환교수의 논문으로서 '음악과 민족' 2000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에 관한 소고
1. 문제제기
2. 논의의 대상
3. excursion: 서양에서의 예술가곡(Kunstlied)개념
3.1. 리트에 대한 일반적 사항
3.2. 리트에 대한 18세기의 이론과 미학
3.3. 음악관의 변화: 낭만주의 음악관의 태동
3.4. 가곡(Lied)에서 예술가곡(Kunstlied)으로
4. 한국적 예술가곡의 탄생
5. 참고문헌
1. 문제제기
한국의 양악사, 그 중에서 한국의 가곡1)역사에 관한 기존의 연구를 일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에 대한 논란이다. 『한국가곡사』를 집필한 김점덕은 작곡가 김성태가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이던 1937년에 정지용 시를 텍스트로 하여 작곡한 세 편의 가곡, '바다3', '말', '산너머저쪽'에 관하여 "이 곡들에게서는 낭만주의적 기법을 엿볼 수 있고 나중 두 가곡은 평조와 4도 5도 화음을 곁들여 한국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특히 이 가곡들은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작품의 효시가 되는 곡2)들로 주목된다"고 주장하고 있다.3) 이상만 역시 이 세편의 작품과 연관하여 "노래와 피아노부가 유기적 관련성을 갖고 독일가곡구성에 접근했고, 이름도 예술가곡이라고 이름이 붙여 예술가곡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4)라고 언급하고 있다. 훗날 작곡가 자신도 매우 조심스럽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위 작품에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이라는 역사성을 부여하고 있다.
"[전략] 산너머저쪽과 말은 1937년의 작품으로 56년전 제가 일본 동경에서 한참 독일 낭만주의 시절, 특히 후기 낭만주의의 J. Brahms, H. Wolf, R. Strauss같은 분들의 예술가곡을 열심히 분석 연구하는 동안에 작곡한 가곡이어서 그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영향이란 그분들에 대한 맹목적 모방이 아니라 그분들을 상당히 소화해 자기화 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창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가곡은, 제가 아는 한, 우리 나라에서 제가 제일 처음 쓴 것이라고 생각되어 지금 생각해도 자그마한 자랑으로 여겨집니다 [후략]."5)
위에서 언급된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성태의 초기 가곡 세편은 우리 양악사에서 역사적 작품으로서 자리매김 되는 영예를 가지게 된다. 슈베르트가 1814년에 발표한 '실잣는 그레첸' (Gretchen am Spinnrade)6)이 서양음악사에서 최초의 "예술가곡"7)이자 "낭만적 가곡"으로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비견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김성태의 위 작품들이 우리 양악사에 있어서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기존 연구에서는 불불명한 상태이다. 이것은 우리의 양악사, 그 중에서 한국 가곡사에 대한 연구가 일천하고 가곡 내지는 예술가곡에 대한 개념규정이 아직 확고하게 정립되지 못한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저자마다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언급하는 곡이 다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동일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발표한 각각의 글에서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지칭하는 곡이 다르게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각 저자들은 '가곡', '근대적 의미의 가곡', '예술가곡' 등의 용어를 혼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더 얽히게 만들고 있다. 다음의 대표적 예는 이러한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시켜 준다. 이때 관찰의 대상은 김성태의 위 가곡들이 작곡된 1937년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2. 논의의 대상
이상만은 「한국 예술가곡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가곡 어디에서 출발했나」8)라는 제목의 글에서 "'예술가곡'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전후"라고 주장한다. "1955년 한규동이 「한국가곡집」이라는 노래 책을 엮음으로써 이 말의 사용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예술가곡의 출발을 -가사와 멜로디가 분리되어 작곡되었다9)는 이유를 들어- 홍난파의 '봉선화'로 잡고 있다. 여기에서 '가사와 멜로디가 분리되어 작곡되었다'함은 홍난파가 1920년에 발간한 자작 단편 소설집, 『처녀혼』의 첫머리 실린 '애수'라는 제목의 멜로디에 훗날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것을 의미한다. 가사가 붙여진 이 곡은 '봉선화'라는 제목으로는 처음으로 1925년에 발행된 『세계명작곡집』에 수록되게 된다.10) 김점덕은 이러한 이상만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홍난파의 '봉선화'를 "첫번째의 한국예술가곡"이라고 언급한다.11)
성의정12)은 "서양음악이 19세기 말 최초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찬송가나 외국민요에 우리 가사를 붙여 부르던 것"에 반해, 홍난파의 '봉선화'는 "시와 음악이 조화된 개념의 의미에서의 최초의 가곡"이라고 주장한다.
이유선13)은 김인식이 학도가14)이후에 작곡한 표모가(漂母歌)를 "예술가곡의 발아"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표모가의 가사내용이 "개인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의식적인 문학행위와 일치한 점"을 들고 있다. 즉 당시의 창가가 "개화의 물결 속에서 젊은이들이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닦아 나라를 빛내라고 하는 일종의 계몽사상을 특징"으로 하는데 반해 표모가의 가사는 단지 "하나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저자는 홍난파의 '봉선화'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 작품이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주장한다.
"[이 노래는] 비록 초기 창가와 다름없는 4·4조의 노래이지만 그 내용은 비할 바 없이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상징성은 전기 창가의 직설적인데 비해 훨씬 예술적으로 순화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홍난파의 가락이 갖는 새로운 양식에서 더욱 의의를 가지게 된다. 즉 난파의 멜로디는 종래의 찬송가나 그와 유사한 류의 창가에서 찾을 수 없는 참신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고도로 예술적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로써 종래의 창가는 완전히 예술가곡으로 승화하기 시작했다."15)
이유선은 다른 지면16)에서도 "1920년대에 와서 '20년대 특유의 시대감각에 따른 또 하나의 양식인 예술가곡이 탄생했다"고 언급하면서 홍난파의 '봉선화'를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반복하고 있다. 황병덕17) 역시 "홍난파의 봉선화의 노랫말은 창가조와 같은 4·4조이나 창가조보다 앞선 음악성·예술성이 풍부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 곡이 "한국예술가곡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한편, 김형준은 그의 글, 「한국가곡사」에서 한국 양악사의 초창기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에케르트를 대장으로 하는 '시위연대 (侍衛聯隊) 군악대'를 언급하면서, 정부의 위촉을 받아 1902년에 작곡한 '한국군가'를 -비록 외국인이 작곡한 것이기는 하지만- "서구 가곡수법으로 작곡하였고, 한국 전래의 국악에 심취한 그가 군가의 선율에도 한국적인 정서를 담았다"는 점을 들어 "우리 나라 최초의 가곡"18)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홍난파의 '봉선화'를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곡"이라고 한다.
"이러한 [한일합방 이후의] 상황에서, 가곡은 초창기의 창가에서 점차 근대적인 예술가곡의 형태로 전화하면서 한편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달래며 한을 심는 내용이나, 자유를 희구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와 내일의 희망을 추구하는 노래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제의 압박으로 자유로운 의사 표시를 할 수 없었던 때인 만큼 추상적인 표현이나 상징적인 뜻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노래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대표적인 가곡이 우리 나라 최초로 작곡된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곡으로 꼽히는 홍난파의 '봉숭아'입니다."19)
이에 반해 박용구20)는 독일 유학 (1924-29)에서 돌아온 채동선이 -역시 같은 기간동안 일본 교토에서 유학후 귀국한-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하여 "시와 음악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진정한 의미의 우리 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박용구는 이 글에서 채동선의 가곡21)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지용의 시22)를 텍스트로 한 채동선의 가곡 대부분이 1932년과 1933년에 작곡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필자가 제기한 논의에서 고려해야 할 대상이 된다. 채동선 가곡의 역사적 중요성은 김점덕에 의해서도 부각되고 있는 데, 그는 특히 -오늘날 채동선의 가곡중에서 가장 애창되고 있는- 1933년에 작곡된 ('그리워'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고향'이 "그 시대에 있어서 가곡의 방향을 예시해준 귀중한 소산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 시대에 있어서 가곡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후에 함태균23)도 채동선의 '그리워'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의 풍부하고도 정감에 넘치는 선율과 조밀한 구상으로 일관된 이 가곡은 당시 우리 작곡계에 큰 선풍을 일으켰으며, 후배 작곡인들에게 방향을 제시한 문제작으로서 가곡의 역사에 좋은 자료가 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국내 최초로 등장한 격조 높은 이 가곡은 종전의 속성을 완전히 탈피한, 우리 작곡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작품"이며, 이 곡은 종래의 가곡에 비해 "자유로운 리듬과 음정의 혁신으로 가사의 억양과 음절 및 선율어법을 중요시"하였고 -이전의 가곡들이 취한 유절형식에 반해- "통절가요형식으로 일대 혁신을 꾀했다"라고 언급한다.
한편, 이상근은 1955년에 발표한 「우리가곡 시론」24)라는 제목의 지면을 통해서 "현제명, 홍난파, 이흥렬 등에 의해 일련의 가곡이 발표되던 그 때에 이미 고답(高踏)적인 몇 개의 Lied가 출판되었으며, 김세형의 연가곡 '먼길' (The long way)이 바로 그에 대한 좋은 증좌"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1932년에 작곡된 바로 이 곡이 우리 가곡사에 있어서 "예술가곡의 선구자로서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근은 이에 대한 근거로서 이 연가곡은 "풍부한 화성색채, 자유로운 음형 취급, 독립된 Piano의 운용 등으로 소위 동요나 창가의 범주를 벗어나 예술적인 높은 향취를 풍기는 작품이며, 이것은 우리 가곡사를 장식할 역사적 사실"25)이라고 한다. 김점덕 역시 김세형의 이 연가곡을 "작곡수법은 견고한 형식아래 풍부한 화성과 짜임새 있는 반주법 등으로 엮은 본격적인 예술가곡"26)이라고 평하고 있다. 김세형의 '먼길'을 우리 가곡사의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자기매김하는 시도는 신정숙의 글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그녀는 우선, 1920년대의 작곡된 많은 가곡들이 일반적으로 일제하에서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민족가곡"27)으로 명명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니까 "1919년 3·1운동 이후 좌절과 절망에 빠진 「우리의 노래」가 지니는 가치는 절대적이며, 예술가곡으로서의 발전을 추구하기보다는 민족혼을 일깨우고 망국의 설움을 함께 나누며 동족애를 고취시킬 민중의 노래를 창작하는 일이 당시의 작곡가들에게 급한 의무요 사명"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세형 (1904- )이 미국 유학시절 작곡한 연가곡 '먼길' (The long way: 1932년작)28)은 "가사와 악곡내용이 한국적일 수 없는 흠29)은 있으나 예술가곡다운 틀을 갖춘 최초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유절형식의 단순한 가곡들이 불리우던 그 시대에서 연가곡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도입한 사실도 기록적이다"30)라면서 이 곡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점은 이어서 저자가 언급한 김성태에 관한 대목이다. 그녀는 김성태가 "반주부에 대한 독자성을 배려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그의 몇 편의 가곡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와 가락과 반주부의 균형감, 가곡구성을 위한 치밀한 노력의 흔적"의 이유를 들어 "한국예술가곡사의 첫 장을 연 작곡가"31)이며, 그에 이르러 "본격적인 예술가곡창작의 면모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건용은 『브리태니카 세계대백과사전』의 <가곡> 항목32)에서 홍난파의 '봉선화'를 "기능적인 요소를 많이 가기고 있었던 창가가 예술적으로 승화된 최초의 창작곡이라는 점에서 한국가곡의 효시"로 보고 있으며, 이어서 "1933년에 작곡된 김동진의 '가고파'를 "가곡 (특히 서정가곡)의 양식적 방향성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예술가곡의 전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밖에 1937년 이전에 작곡된 곡으로서 기존의 문헌에서 예술가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곡으로는 김세형이 1934년에 작곡한 '뱃노래'를 들 수 있다. 김점덕33)은 이 작품에 관하여 "가사는 춘원 이광수의 것이며 작곡가가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망향을 달래면서 작곡한 한국적인 가락과 장단으로 된 작품이다. [중략] 이 곡은 피아노 반주부에서 독립된 기능으로 효과를 노리고 민요적인 분위기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가곡이다."라고 말한다. 김세형의 가곡으로는 -기존문헌에서 예술가곡으로서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본 논의의 관찰의 대상으로삼아야 하는- 그보다 더 이전에 작곡된 '야상' (1925년), '추억' (1929년) 등이 있다.
김미애34)는 1920년을 경계로 우리의 노래가 "창가에서 예술가곡" 시대로 넘어갔다고 하면서 1920년대의 대표적인 예술가곡으로 홍난파의 '봉선화'를 비롯하여 박태준의 '동무생각' (1922), 현제명의 '고향생각' (1922년), 김세형의 '야상' (1925년) 등을 예로 든다. 물론 예술가곡에 대한 개념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행연구에서 제시된 각 저자들이 언급한 한국 최초의 예술가곡은 나름대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일관되지 못하고 그 관점 역시 제각기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본 논의의 결론을 학문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 우선 서양에서, 그 중에서 특히 독일에서 '예술가곡'의 개념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에 작곡된 우리의 가곡이 독일의 예술가곡 (Kunstlied)을 표방하고자 했다35)는 점이 그 첫째 이유이고, 서양의 경우와 우리의 양악사에서는 '예술가곡'의 탄생 배경과 토양 그리고 음악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쳐 19세기에 확립한 '예술가곡'에 대한 개념이 필자가 제기한 문제점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3. Excursion: 서양에서의 예술가곡 (Kunstlied)개념
3.1. 리트에 대한 일반적 사항
'리트' (Lied)라는 명칭은 언어적 (내지는 문학적) 영역과 음악적 영역 양쪽에서 이중적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때문에 모든 부분적 사항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리트의 정확한 정의는 불가능하다.36) 물론 일반적인 인식에 의하면 '시와 음악의 합일체'라는 말은 리트라는 용어의 본질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두 영역에서의 리트라는 용어의 광범위한 사용은 리트를 구성하는 이 두가지 요소가 -개념의 손상 없이- 상호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리트라는 용어는 한편으로는 -비록 작곡되는 것을 목표로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편의 詩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기악형식을 지닌 '無言歌' (Lied ohne Worte)이건 간에 혹은 본래의 리트를 기악곡으로 편곡한 작품이건 간에- 텍스트가 빠진 리트 멜로디 혹은 완성된 리트악곡의 명칭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서 개작하는 콘트라팍투르 (Kontrafaktur)나 기존의 작품을 차용하여 텍스트는 물론이고 그 작품을 조각내거나 양식을 바꾸는 등의 파로디 (Parodie) 기법은 <텍스트와 음악>의 불가분의 결합이라 생각에 모순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37)
하지만 리트는 그 언어적 구성에 있어서 내용적으로는 물론이고 형식적으로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Sangbarkeit)는 규정에 구속된다. 그리고 逆으로 리트를 음악적으로 만드는 것, 즉 단순성, 통일성, 선율적 다듬기, 노래가 가능하도록 음량 및 음역 (Ambitus)이 -기악 작품과 달리- 소폭으로 제한되어야 하는 것, 짧은 모티브, 악절성 (Periodik), 각 절의 상응, 유절적 구성 등은 본질적으로 언어와의 유사성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38)
음악분야에서의 리트는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구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기능과 연관된 리트이다. 여기에는 민요 (Volkslied), 찬송가 (Kirchenlied) 그리고 노동가 (Arbeitslied) 같은 정치적 리트가 포함된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기능과는 관련 없이 탄생하고 예술적으로 형성된 리트이다 (이 리트는 19세기의 "낭만적" 예술가곡 (Kunstlied)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이게된다). 문제는 이 두 종류의 리트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기능적으로 연관된 리트도 예술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예술가곡 역시 사교적 뿌리를 지녔다는 점에서 기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18세기 중엽의 헤르더 (Herder) 이후 그리고 19세기 전반기의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된 민요 (Volkslied)가 同시대의 "예술가곡" 작곡에 하나의 모델로 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리트의 일반적 구분조차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39)
3.2. 리트에 대한 18세기의 이론과 미학
리트40)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은 18세기 중엽 무렵,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와 함께 리트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는 리트에 대한 명백하고 뚜렷한 이론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은 리트가 교회음악이나 무대음악의 그늘에 놓여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17세기말에 리트는 당시 활발했던 음악장르였던 '아리아' (Aria)나 '칸타타' (Kantate)에 의해 뒷전으로 밀렸고, 이러한 상황은 18세기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특징였던 리트의 단순성 (Einfachkeit)과 정형성(Gleichfömigkeit)에 대하여 서서히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게 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당시의 시대정신인 계몽주의 (Aufklärung)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계몽주의 정신에 따른 음악은 "과장되고, 복잡하며, 인위적"41)이어서는 안되며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42)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계몽주의적 음악의 토대는 -대표적인 계몽주의 음악가인 텔레만43)에 의하면- '가창성' (Sangbarkeit), '단순함', '자연스러움'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대정신 하에 '리트'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는 당연한 순서였다고 할 수 있다.
크라우제 (Chr. G. Krause: 1719-1770)는 최초로 리트미학에 대한 포괄적인 저서, Von der Musikalischen Poesie를 1852년에 베를린에서 출간한다. 이 저서에서 크라우제는 수공업적 의미의 시 작법 (詩 作法: Poetik)에서 만들어진 지침을 "음악적 시의 문체"에 적용하고자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세칭 "제1베를린 리트악파" (Berliner Liederschule)의 리트 미학을 규정하였고, 이론적으로 새로운 민요개념에 입각한 그 다음 세대인 "제2베를린 리트악파" 및 19세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크라우제는 리트를 (오페라) 아리아에 직접적으로 대립시키면서 그 이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이상은] 스케르츠리트 (Scherzlied)이며, 이 곡은 모든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부를 수 있고 피아노 혹은 다른 악기의 반주 없이도 부를 수 있다. 우리 [=독일] 작곡가들이 노래하면서 자신들의 리트를 작곡할 경우 -피아노가 필요치 않고 또 다른 베이스[악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우리 나라에서 그 취향은 곧 보편적으로 될 것이며, 도처에서 재미를 느끼고 감정적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44)
바로 이 글에서 괴테가 활동하던 시기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리트의 원칙인 '가창성' (Sangbarkeit)과 '대중성' (Popularität)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러한 원칙은 실제 연주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에 간단한 피아노 반주가 곁들여진 짧은 유절리트 (Strophenlied)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텍스트 (詩)의 언어적 리듬과 문장구성 (Syntax) 그리고 일정하게 제한된 음역 (Ambitus)에 대한 세심한 주의는 모두 이 '노래성'을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의 전체 진행이 가능한 한 최소한의 모티브에서 비롯되도록 하는 작업 역시 기억을 손쉽게 하고 널리 유포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 위 인용문의 "피아노 혹은 다른 악기의 반주 없이도 부를 수 있다"는 구절에서 악기 반주로부터의 독자성과 반주 없이 노래한다는 것에 대한, 당시의 리트 미학에 영향을 끼친 프랑스 샹송 (Chanson)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제1베를린 악파라고 일컬어지는 일군의 작곡가 (Benda, Quantz, Graun 형제, C. Ph. E. Bach)들은 "모든 장식적 음형들과 인위성"을 배제하고, 단순하면서 자연스럽고 손쉽게 노래할 수 있는 유절 형식을 하나의 굳건한 규칙으로 삼았다. 이들은 노래 (멜로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피아노 반주는 후에 덧붙였다. 이들이 양산한 리트들은 높은 경지의 예술적 요구를 충족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리트들이 지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과 제한된 유포로 인하여 당시에 벌어졌던 보편적 예술문제에 대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훗날 전개된, 성악의 경쟁 장르인 아리아와 칸타타와 대등하거나 그보다 우월한 리트의 지위상승을 준비하는 작업이 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작곡가들 중에서 이러한 논쟁에 참여한 수는 매우 적었지만, 뷔르거 (Gottfired August Bürger), 괴테 등 당시의 저명한 시인들이 점차 이 논쟁에 가담하였다. 바야흐로 송가 (Ode)의 개념은 리트의 그것과 분리되게 된다. 줄쩌 (Johann Georg Sulzer)는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들은 이 두 가지 (=리트와 송가)의 외적 차이를 다음과 인정할 수 있다. 즉, 리트는 언제든지 노래로 불려져야하고 한 절의 선율이 다른 나머지 절에도 적합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송가 (Ode)는 단지 읽도록 되어있거나 혹은 송가가 불려지도록 하려면 매 절마다 다른 멜로디가 요구된다."
리트가 예술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민속성의 의미에서의 단순한 유절노래로 파악하고 있는 베를린 리트 악파의 사고는 반박할 여지가 있지만, 이것은 당시 널리 유포되고 사람들에 의해 기대되고 있는 리트의 개념이었다. 이러한 개념규정은 당시에 출간된 사전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노래로 불려지도록 정해진 여러 절로 구성된 모든 서정시는 그 노래의 선율과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선율은 매 절마다 반복된다. 이 선율은 예술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건강하고 유연한 목소리를 지닌 모든 사람들에 의해 불려질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이처럼 리트가 유절형식을 지녀야 한다는 전제는 리트에 대한 당시의 보편적 사고였다. 물론 시의 각 절들이 동일한 선율로 불려질 때 빗어지는 문제점, 즉 각 절의 내용이 다르다면 한 선율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없지는 않았지만, 유절형식의 선호는 텍스트의 상세한 내용을 음으로 그리듯이 묘사하는 음회화적인 것에 대한 거부와 음악적 표현에 있어서 정서적 통일을 최고 가치로 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가곡 선율은 각 단어의 상세한 내용을 그리는 듯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전 가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본질, 즉 그 노래의 기본 정서를 표출해야 하는 것이었다.45)
유절형식의 리트는 변형된 유절형식 혹은 통절 형식으로 작곡된 곡보다 우위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제2베를린 리트악파로 불려지는 그 다음 세대에까지 지속되었으며 민요 (Volkslied)가 리트 작곡의 새로운 이상으로 부각된다. 이 악파의 대표적 리트 작곡가로 일컬어지는 쓜쯔 (J. A. P. Schulz: 1747-1800)는 1785년에 발간한 자신의 가곡집 (Liedersammlung) "민요조의 리트" (Lieder im Volkston)의 제2부 서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 가곡집에 수록된 모든 리트들은 '예술적' (kunstmäßig)이라기 보다는 '민속적' (volksmäßig)으로 불려져야 한다는 나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말하자면, 훈련받지 않은 노래 애호가들도 -비록 그들이 [좋은]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노래들을 쉽게 따라 부르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가곡집의] 마지막에 나는 민중의 노래 (Volksgesang)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겨지는 최상의 리트시들 중에서 그와 같은 텍스트를 골랐으며, 그 멜로디룰 작곡함에 있어서 가장 단순하고 (Simplizität) 잘 이해되도록 (Faßlichkeit) 노력하였다. 그러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잘 알려진 외형' (Schein des Bekannten)이 되도록 한 것이다. [중략] 이러한 '잘 알려진 외형'에 민요조 (Volkston)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46).
이처럼 '리트'라는 장르가 "예술적이기보다는 민속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헤르더 (G. Herder) 이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리트관이자 괴테 시대의 "고전적 리트미학"의 핵심이었다.47) 슐쯔는 민요조의 노래를 통해서 '단순하고' '쉽게 접근되어야 한다'는 두가지 이상을 용해하였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리트가 일반 대중들에게 보다 넓게 확산되도록 하는 민중 교육적 성격을 표방하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함'과 '명료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확한 리듬적·운율적 악절구성, 시퀀스 및 반복을 구사하였다. 이때 화성적 수단은 소극적으로 다뤄졌으며, 피아노의 간주 및 후주는 거의 없었다. 피아노가 펼치는 음화적(音畵的) 표현도 물론 보여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리트작곡에 있어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하는 주요 원칙은 언어 (텍스트)와 음의 관계에 있어서 언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음악가들은 기악음악이 -텍스트가 없음으로 해서-가지는 불분명함 때문에 성악음악보다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겼고, 따라서 가곡 작곡에 있어서도 언어는 음악에 우선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가곡 작곡가의 임무는 '단순함'과 '명료성'에 걸맞은 詩48)를 선정하고, 시인의 문체를 따르면서 시의 정서와 운율적, 리듬적 구조를 노래부를 수 있도록 선율적으로 고양하여 널리 보급하는데 있었다.49) 다른 한편으로, 작곡가는 시인들로 하여금 유절형식의 작곡을 염두에 두고 언어적 액센트와 음악적 액센트가 일치하는 시를 쓰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동일한 선율에 각 절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음악과 텍스트의 일치'라는 원칙이 지켜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50) 18세기 가곡 작곡에서 중요시 되었던 위의 원칙들은 19세기 들어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당시에 새롭게 정립된 "낭만주의 음악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3.3. 음악관의 변화: 낭만주의 음악관의 태동
'낭만주의' (Romantik)는 본래 18세기 후반과 19세기초에 유럽적 차원에서 전개된 정신운동의 일환으로 주창된 것이었다. 이 정신운동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각기 상이한 사회적 발전과정을 겪었고, 철학, 자연과학, 의학, 예술 등 전 분야에서 보여졌다. 그 중에서 훗날 19세기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음악적 낭만주의 이론의 토대는 1790년대에 독일의 낭만주의 문학자, 특히 봐켄로더 (W. Wackenroder: 1773-1798)의 '예술애호가인 수도승의 심정토로' (Herzenergißungen eines kunstliebenden Klosterbruder: 1797)와 봐켄로더와 틱 (L. Tieck: 1773-1853)의 공동작품인 '예술에 대한 환타지' (Phantasien über die Kunst: 1799)라는 제목의 두 저서를 통해 탄생되었다. 그러니까 '이론은 실제보다 늦게 형성된다'는 믿음과는 반대로 당시의 낭만적 음악관은 훗날 낭만적 정신에 의해 창조된 음악을 약 15년 가량 선취한 셈이다.
낭만주의 문인들은 그 이전 시기의 계몽주의 (Aufklärung)에서 비롯된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혁명과 산업문명사회로 이어지는 당시의 세계상, 즉 합리화, 기계화, 탈마법화 (Entzauberung), 생활의 건조화를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 "깊은 타락"으로 보았다.51) 또한 자신들의 희망을 인간성의 해방에 두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 (1789년)의 영향을 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혁명의 실패, 나폴레옹과의 거듭된 전쟁 등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착하지만 문명에 의해 타락하였다는 사고 하에 이성보다는 감정을 신뢰하게 되었다. 훗날 슈만이 "최초의 상념이 언제나 가장 자연스럽고 최상의 것이다. 이성은 실수를 범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다"52)라는 주장도 이러한 낭만주의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것, 신적인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세계는 오로지 예술작품만을 통해서 펼쳐질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제한 받아서는 안되며,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의 세계를 <예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예감은 제반 예술분야 중에서 음악, 그 중에서도 기악음악에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낭만주의자들이 본 점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모든 시인, 문필가 및 철학자들은 앞다투어 음악을 찬미하였고 음악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들에게 음악, 그 중에서 기악음악은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며 음악은 현재의 불만족을 해소하고 미래의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기악 음악이 가지는 모호함 때문이었다. 기악음악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 인간의 일상적인 현실의 언어로는 형용 불가능한 그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파악된 것이다. 이로써 바로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텍스트가 없음으로 인하여 정서 (Affekt) 전달에 불완전한 음악으로 낙인 되었던 기악 음악은 '가장 순수한 예술'로서 자율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그 표현의 추상성으로 인하여 최상의 예술로 낭만주의자들의 찬미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낭만적 사고, 특히 봐켄로더 (W. Wackendoder)와 틱 (L. Tieck)에 의해 주창된 낭만적 음악관은 호프만 (E. Th. A. Hoffmann: 1776 - 1822)에 의해 본격적으로 음악분야에 전이되었다. 그것은 호프만이 1810년 '음악일반신문'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7월 4일자에 기고한 베토벤 제5번 교향곡에 대한 비평문에서부터이다.
"[...] 음악을 독자적인 예술로 말할 때에는 항상 기악을 말한 것이어야 한다. 기악은 다른 예술의 도움이나 간섭을 비웃으며 음악에서 인식될 수 있는 예술의 원래적 본질을 순수하게 발설한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다. [...] 음악은 인간에게 미지의 왕국을 열어준다. 이 세계는 주위의 감각세계와는 너무 다르며, 이 세계에서는 개념으로 규정짓는 감정을 물러나게 하는데, 이는 스스로 형용불가능성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 천재적 작곡가들이 기악음악을 지금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린 것은 표현도구 뿐만 아니라 (악기의 완성도, 연구가의 더 높은 장인성), 음악의 원래적 본질에 대한 깊은 내적 원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기악음악의 창조자들인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그 예술이 가득한 영광으로 만개한 것을 보여준다. 그 예술을 가득찬 사랑으로 바라보고 그 내적 본질로 깊숙이 들어간 사람은 베토벤이다. 이 세사람의 기악 작품들은 [...] 동일한 낭만적 정신을 호흡하고 있다. [...] 하이든의 작품에는 어린애다운 명랑한 감정표현이 지배적이다. [...] 모차르트는 우리를 깊은 정령의 세계로 이끈다. [...] 베토벤의 기악도 엄청나고 측량할 수 없는 왕국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 낭만적 취향은 흔치 않다. 낭만적 재능은 더 드물다. 그러므로 그 놀라운 무한의 왕국을 여는 리라를 켤 수 있다. 하이든은 인간의 삶에서 인간적인 것을 파악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측량 가능하다. 모차르트는 정신의 내면에 있는 초인적인 것, 놀라운 것을 요구한다. 베토벤의 음악은 공포, 무서움, 경악, 고통의 도구를 이용하여 낭만주의의 본질인 무한한 동경을 일깨운다"53).
이처럼 낭만주의자들은 기악음악을 가장 순수한 예술이며, 다른 예술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것을 전제로 하여 가장 탁월한 예술로 간주하였다. 다른 예술들이 뚜렷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에 반하여 기악음악은 <모호>하다. 이 '모호한 것', '형용 불가능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가 말하는 <시적인 것>(Das Poetische)의 특성이 된다. 여기에서 '시적인 것'은 문학적 의미가 아닌 예술의 본질을 의미한다. 그런데 호프만이 주장한 낭만적 음악관은 지금의 시대개념으로의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고전주의"시대의 기악에 관한 이론임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호프만은 특히 슐레겔 (A. W. Schlegel)과 장파울 (Jean Paul)에 의해 정형화된 역사철학적·미학적 안티테제 (Antithese)를 이어받고 여기에 봐켄로더가 음악에 대하여 보여준 ("기악의 해방"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미하여 예술 전반을 이분적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니까 낭만주의자들의 언어관습에서 보여진 "낭만적"이라 함은 전체 기독교 시대에서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시대구분, 즉 '고대'에 대비된 "근·현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중세를 포함한 그 이후의 시대는 "낭만적 근·현대"(romantische Moderne)이고, 이에 반해 "고대"는 "고전적" 시기(klassischer Antike)라는 말이다.54) 호프만은 슐레겔의 주장을 차용하면서 조형예술, 특히 조각은 신의 형상을 표현한 "고대"의 예술이고, 음악, 특히 기악음악은 기독교적 정서를 가장 순수하게 선언한다는 본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이건, 현재의 교향곡이건 간에 기독교시대의 징표로서 예수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형이상학적인 본질로 나타난 예술로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음악에서는 감각(물질, 현상)세계와 분리되고 해방된 "내적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세계에서 '무한함' (Das Unendliche),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예감' (unbeschreibare Vorahnung)이 나타나는 것이다.55)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세계에서 제거된다. 호프만은 음악의 본질을 '무한한 동경' (unendliche Sehnsucht)이라고 말한다. 이 동경은 지상의 것이 아니고, 만질 수도 없으며, 규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다. 호프만은 "정령의 소리 (Geisterstimme)"를 들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낭만적"이라고 하였다. 바하와 모차르트의 양식을 절충하여 작곡한 자신의 초기작품들을 "낭만적"이라고 하는데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낭만적 환타지'를 열어주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56)
3.4. '가곡' (Lied)에서 '예술가곡' (Kunstlied)으로
이러한 음악관의 변화는 리트작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야흐로 "낭만적 리트" 작곡가는 詩의 언어음을 단지 음악적으로 뒷받침하는 임무를 초월하여 詩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가로 인식되고 출현한다. 작곡가는 텍스트에 선율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난 후 거기에서 얻어진 느낌 (혹은 영감)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간다. 작곡가는 언어적 텍스트가 미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57)을 음악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독일의 음악학자 데브린 (C. Debryn)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은 개념적인 일련의 텍스트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정조 (Stimmung)와 정서상태 (Seelenzustände)를 독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詩언어를 초월한다. 음악 특유의 정조가 창조되고 직접적으로, 우회 없이 개념적인 것이 전달된다는 바로 이점 때문에 음악은 무한하고 상징적인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58)
가사를 통해서 더 이상 표현불가능한, 하지만 작곡가가 그 가사에서 얻은 느낌은 피아노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 표현이 가능해졌다. 이제 피아노는 없어도 되는 그러한 반주악기가 아니라 작품의 "정조"와 "정서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적인 반주" (obligates Accompagnement)로 자리매김된다. 이와 함께 음악은 텍스트에서 해방되게 되고 리트 작곡에 있어서 굳이 고정적인 유절형식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낭만적 가곡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슈베르트의 경우 (수많은 다성부 성악곡과 이태리 詩를 작곡한 것까지 포함하여) 총 660여편에 이르는 리트를 작곡했지만, 이 작품들은 보편적인 형식모델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작곡가가 선택한 각 시의 구조와 내용에 따라 음악적 틀이 만들어지곤 하였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곡가의 과제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라이하르트 (Reichardt)와 춤스텍 (J. R. Zumsteeg)의 발라드 (Ballade)에서 그 단초가 보여지고 있었는데, 내겔리 (H. G. Nägeli)는 춤스텍의 작품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언어리듬 [=텍스트], 노래리듬 [=선율] 그리고 연주리듬 [=피아노파트]의 세가지가 보다 높은 경지의 예술전체로 합쳐져야 한다"59)는 새로운 차원의 리트 양식을 요구하였다.
피아노 파트가 노래 성부를 단지 뒷받침하는 반주 역에 그치지 않고 동등한 자격을 지니면서 독자적인 음악적 분위기를 연출해나간다는 사고는 우선 악보 기입에 있어서 3 시스템 (노래성부 1 + 피아노 파트 2)으로 나타났다. 피아노 파트는 -지금까지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던- 멜로디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고 노래성부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파트너가 된다. 피아노 파트는 텍스트가 지닌 표현과 분위기를 개별적으로, 전체적으로 암시해내고, 전주, 간주 및 후주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시적·상징적 암시를 펼쳐 보였다.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리트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슈베르트에 이르러서이다. 슈베르트의 초기 작품이 라이햐르트 (Reichardt), 슈테판 (Steffan) 그리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리트, 특히 춤스텍의 발라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면60), 1814년에 작곡된 '실잣는 그레첸' (Gretchen am Spinnrade, D 811)에서 이미 슈베르트 고유의 음악어법이 선보여진다. 쾨테의 시를 텍스트로 한 이 곡의 피아노 파트는 성악성부의 반주가 아니라, 가사의 상황에 따른, 즉 '물레의 돌아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독자적인 모티브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 물론 성악파트와는 별도의 모티브이다. 시의 해석가로 등장하는 작곡가의 입장변화는 물레를 표현하는 피아노의 수식 외에 텍스트의 변형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즉 괴테 시의 마지막 절정인 "An seinen Küssen vergehen sollt"(그와의 입맞춤 도중에 숨을 거두어도 좋으리) 대신에, 슈베르트는 "Meine Ruh ist hin, mein Herz ist schwer" (나의 평화는 사라졌네, 내 마음은 무겁구나)라는 후렴구를 반복함으로써, 원시의 정형적 구조를 변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하여 '예술가곡' (Kunstlied)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등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술가곡'이라는 용어는 '실잣는 그레첸'이 출간된 1821년보다 20년 뒤인 1841년에 칼 코스말리Carl Kossmaly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다61). 그리고 이 시기부터 '예술가곡'과 '민요'가 구분되기 시작하고, 가곡이라 함은 예술가곡을 지칭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즈음에 독일용어인 Lied는 이웃나라로 수출되어 불란서에서는 "le lied"62)로, 영어권에서는 "the lied"63)로 사용되게 된다).
슈베르트의 리트에서 보여지는 음악의 시적, 상징적 암시는 쇤베르크가 1912년에 '청색기사' (Der blaue Reiter)라는 연보에서 토로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몇 년 전 굉장히 부끄러웠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잘 알고 있었던 몇몇 슈베르트 가곡에서 그 곡의 근저를 이루는 詩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를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통해 이 곡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시를 읽었다고 해서 그 곡에 대한 나의 의견이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시의 언어적 사고의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시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 내용, 그 진정한 내용을 아마 더 깊이 파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니까 나는 시가 붙어있는 Schubert의 가곡을 단지 음악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했던 것이다".64)
김미영은 "쇤베르크가 시의 진정한 내용을 가사를 통해서보다는 음악을 통해서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슈베르트가 각 단어를 음악으로 옮기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시로부터 얻어낸 전체적 표상을 음악의 힘으로 재창조하였기 때문이다"65)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종류의 리트는 전형적인 18세기 미학관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투철한 리트관을 가진 시인, 예를 들자면 괴테 같은 인물은 "낭만적 리트"에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즉, 1816년에 슈베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들장미' (Heidenröslein), '실잣는 그레첸' (Gretchen am Spinnrade), '뜨거운 사랑' (Rastlose Liebe), '마왕' (Erkönig) 등이 수록된 작곡집을 바이마르의 괴테에게 보냈지만, 괴테는 이를 냉담하게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66)
슈베르트에 의해 그 "고전적 모델"이 완성된 "낭만적 리트"는 슈만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슈만은 기악음악을 최고의 예술로 찬미한 낭만주의 문인들의 저서에 정통하였고, 따라서 그의 초기 작품은 기악음악, 그 중에서도 피아노 작품에 한정되었지만, 그의 음악관은 1840년을 고비로 변하게 된다. 1839년에 H. Hirschmann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악은 위대한 예술의 범주에 들지 않으며 기악음악보다 한 수 아래"67)라고 주장했던 슈만은 곧 자세를 바꾸게 된다. '리트'라는 장르에서 풍부한 표현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본인 스스로 "리트의 해"라고 명명한 1840년 한 해 동안 슈만은 자신이 평생동안 작곡한 가곡의 절반 이상을 양산하게 된다. 이때 슈만은 리트라는 장르에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성악과 피아노의 결합에서 시의 음악적 표현이 결정적이고 풍부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슈만은 성악 성부만으로는 詩의 완벽한 표현은 성악성부의 힘에 피아노 성부가 보충되었을 때 가능해진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음악학자 에들러68)는 슈만의 리트에서의 피아노의 역할을 '포장', '뒷받침', '반주' 등과 같은 개념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피아노 파트에서 시 전체의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악성부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슈만이 기악음악에서 추구하였던 포에지 (Poesie: 詩性)은 리트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표현의 극대화를 요구하였고 이는 피아노 성부에 의해서 달성된다고 여겼다. 이처럼 "낭만주의 리트"에서는 "참예술의 속성"이라고 추구되었던 포에지, 즉, 시언어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그 행간에서 해석되는 전체적 분위기를 음악을 통해서 완성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바와 같이, 서양에서 18세기에 정립된 가곡관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라 음악관에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19세기의 "낭만적 가곡"은 "예술가곡"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대두를 가져왔는데, 그 핵심은 작곡가가 시의 해석가로 위치하면서 선택한 시의 전체적 분위기 (Stimmung)를 음악적으로 전개시킨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선율은 일차적으로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그려내고 때로는 어느 특정 단어나 구절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이와 함께 피아노 파트는 독창성부에 대해 때로는 화성적 방법으로, 때로는 선율적 방법을 가미한다. 즉, 음악은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언어적 형태에 상응하는 음악적 형상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이때 유절형식은 텍스트의 내용에 따라 변형되기도 하고 각 행의 마지막 부분 등은 선율의 진행에 따라 반복되어 읊어지는 등의 변화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특정한 음형을 통한 반주가 수반되기도 한다. 통작형식으로 작곡된 리트의 경우에는 음악은 텍스트의 매 절마다 독자적인 선율을 지니게 되며 이들간의 통일성은 모티브적 짜임새, 즉 "고전적 기악음악"에서부터 그 모습을 선보인 "절대음악적 구조원칙"을 통해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피아노 파트는 독자적으로 텍스트의 절과 절, 혹은 詩句의 行과 行사이에 간주를 삽입함으로써 시의 표현 형식을 보다 고양시킨다. 혹은 슈만의 가곡에서처럼 에필로그 (후주)에 그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요약하는 수법이 사용될 수도 있다. 요약하자면 음악은 텍스트에 부가적인 차원을 추가하고, 동시에 음악의 영역은 텍스트를 통해서 그 정밀함이 지시된다. 이와 같이 음악과 텍스트는 상호간의 해석관계를 통해서 음악은 텍스트의 '言外의 의미' (Konnotation)를 그리고 텍스트는 음악의 '言外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그러니까 텍스트의 시적 구조와 음악적 구조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다.69)
4. 한국적 예술가곡의 탄생
작곡가가 시의 해석가로 자리매김 되고 피아노가 더 이상 선율의 반주가 아닌 독자성을 지닌 파트너로 위치하게 되는 서양의 "예술가곡"의 개념의 본질은, 본 논의의 서두에서 제시된 작품들의 경계설정을 보다 분명하게 해준다. 대표적으로 홍난파의 가곡70) '봉선화'는 그 이전 시기 혹은 동시대의 창가와는 구별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술가곡"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가가 "일반적으로 1900년에서 1920년대에 불려진 노래로서 서양의 악곡 형식에다 계몽사상과 교훈을 담은 가사와 반일 감정 등 당시의 시대상을 담고 있으며, 주로 찬송가나 외국 민요의 선율에 가사만 바꾸어 붙이는 작곡가 미상의 가사 위주의 노래이고 그 목적도 반일 감정과 문명개화의 시대상황에서 민중의식의 형성과 계몽에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71) 라고 한다면, 홍난파의 '봉선화'는 그 텍스트의 내용이 동시대의 창가와는 확실하게 구분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적인 구성 면에서 보자면 피아노 파트는 선율적 진행을 아주 단순한 형태로 반주하는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이 곡의 가사가 선율이 작곡된 후에 붙여졌다는 사실은 본 논의에서 규정한 '예술가곡'의 본래 의미를 벗어나게 된다.
이와는 달리 김세형, 김동진, 채동선의 작품은 '예술가곡'에 보다 접근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의 피아노 파트는 대부분 화성적 뒷받침을 통한 단순한 반주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음회화적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고 (예: 김동진의 '가고파'에서 트레몰로 진행을 통한 잔잔한 물결 묘사) 노래 성부와 피아노파트의 댓구적 진행 (예: 김동진의 '가고파'에서 48번째 마디부터 52번째 마디까지), 전주에서의 독자적인 멜로디 운용 (예: 채동선의 '그리워') 내지는 피아노 파트의 비교적 독립적인 진행 (김세형의 '야상', '뱃노래') 등의 특성이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은 -조두남이 1937년에 작곡한 '제비'와 함께- 홍난파 류의 '가곡'의 범주를 넘어서서 '예술가곡'에 보다 접근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가곡의 前史'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슈베르트의 예술가곡 이전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작곡한 (연)가곡, 라이햐르트와 춤스텍의 리트와 발라드들이 훗날 규정되는 예술가곡적 특성을 지녔다고 언급될 수 있듯이 말이다.
한국 양악사는 김성태가 1937년에 작곡한 세 편의 작품에 이르러 드디어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술가곡'의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작곡가 자신은 이 작품에 -한국작곡가로는 최초로- '예술가곡' (영어로는 'art song'으로 표기하였음)이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의식적으로 기존의 성악작품과 차별성을 표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곡가는 정지용의 시에서 얻어진 느낌, 시의 行間에서 얻어진 이미지를 빈번한 박자변화를 통한 선율의 진행과 다이내믹의 변화 및 변화화음 등을 통하여 음회화적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피아노 파트는 "치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용의 하에"72) 성악성부를 화성적·선율적·리듬적으로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주제를 지니면서 성악성부와 대등한 자격을 지닌 파트너로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二位一體的 합일체를 창출하고 있다. 김성태의 초기 가곡은 이처럼 한국 가곡사의 여명기에 한 획을 그리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다3'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반음계적 선율진행 진행 (前奏部)과 후기 낭만적 화성으로 도입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산 넘어 저쪽'과 '말'은 "한국적"이라는 수사어를 지닐 수 있는 음악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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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공간에서 6·25까지 공백기 한국음악사를 말한다」, 『객석』 1988년 6월호, 69쪽 이하.
성의정, 「한국예술가곡 무엇인 문제인가. 외국가곡과의 비교」, 『객석』 1984년 12월호, 75쪽 이하.
이정화,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본 한국예술사」 (박용구와의 대담기록 정리), 『객석』 1989년 1월호부터 1991년 7월호까지 25회에 걸쳐 연재
한상우, 「한국양악사: '산유화'의 김성태」, 『주간조선』, 1981년 5월 31일자, 78/79쪽.
1) 가곡 (歌曲)이라는 용어는 본래 우리의 전통음악인 시조 (時調) 시에 관현악반주를 얹어 부르던 노래 (만년장환지곡)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국양악사에서 통용되는 의미, 즉 대략 1920년 이후 서양예술양식을 빌려와 발전된, (피아노)반주가 곁들여진 새로운 노래양식만을 지칭한다.
2) 진한 글씨체는 필자가 강조한 것임.
3) 김점덕, 『한국가곡사』, 32쪽.
4) 이상만, 「한국 예술가곡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가곡 어디에서 출발했나」, 79쪽.
5) 1993년 11월 23일에 개최된 한 음악회의 프로그램 노트에 실린 작곡가 자신의 작품해설 "나의 가곡"중에서
6)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17세 되던 해 (1814년)에 작곡하였지만, 출판은 1821년 4월 30일에 작품번호 2번 (op. 2)을 붙여 성사된다 (이 작품의 도이취 번호는 118번이다). 작품번호 1번 (op. 1)을 달고 출판된 작품은 1815년에 작곡된 발라드 (Ballade) '마왕' (Erkönig)이다 (이 작품의 도이취 번호는 328번이다).
7) "예술가곡"의 발아는 이미 모차르트, 베토벤의 가곡, 랴이하르트와 춤스텍 등의 작품에서 싹터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슈베르트의 '실잣는 그레첸'을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언급하는 것은 슈베르트 사후 그의 리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18세기에 통용되던 '리트'의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용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8) 이상만, 「한국 예술가곡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가곡 어디에서 출발했나」, 『객석』 1984년 12월호, 77쪽 이하.
9) 위의 글, 78쪽.
10) 김점덕, 『한국가곡사』, 9쪽.
11) 김점덕, 「한국의 오늘의 음악. 한국가곡의 실상」, 『음악평론』 제1집 (1987년), 58쪽.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곡의 멜로디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콘체르탄트'의 멜로디가 유사하며, 이처럼 "봉선화가 독일 멜로디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어 "아이러니한 음악역사의 계승"이라 주장한다.
12) 성의정, 「한국예술가곡 무엇인 문제인가. 외국가곡과의 비교」, 『객석』 1984년 12월호, 75쪽 이하.
13) 『한국양악100년사』, 54쪽.
14) 김인식이 19세였던 1904년에 작사·작곡한 '학도가'는 『음악대사전』 ('김인식' 항목, 193쪽) 『파스칼 대백과사전』 (제5권, '김인식' 항목, 2724쪽) 등에서 "한국 근대가곡의 효시"로 기록되어 있다.
15) 이유선, 『한국양악 백년사』, 188-189쪽.
16) 이유선, 「양악의 유입과 일제 국권 침탈기의 음악활동. 제1장 시대적 배경과 양악의 유입」, 『한국음악총람』, 11/12쪽.
17) 황병덕, <가곡> 항목, 『파스칼 세계대백과사전』, 제1권, 18쪽.
18) 김형주, 「한국가곡사」, 『한국가곡전집』 (성음사: 1979), 21쪽 이하.
19) 위의 글, 29쪽.
20) 이정화,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본 한국예술사」, 『객석』 1989년 12월호, 212쪽 이하.
21) 당시의 노래들은 일반적으로 "가요"라는 용어를 썼던데 반해, 채동선은 "독창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22)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은 그의 작품번호 5번에서 8번까지, 각 번호당 2곡씩이며 작품번호 10번은 모두 4곡으로 구성되어 총 12곡이다. 그 중에서 본래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했던 곡은 모두 여덟 곡이며, 정지용이 월북한 후에 이은상 시와 모윤숙의 시로 대체된다. 이 여덟 곡은 다음과 같다.
1. '향수', op. 5/1 : 후에 '추억' (이은상 시)으로 바뀜
2. '압천', op. 5/2 : 후에 '동백꽃' (이은상 시)으로 바뀜
3. '고향', op. 6/1 : 후에 '그리워' (이은상 시)와 '망향' (박화목 시)로 바뀜
4. '산에 색시 들녘 사내', op. 6/2 (이 곡의 텍스트는 작곡가 자신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정지용의 시이다)
5. '다른 하늘', op. 7/1 : 후에 '그 창가에' (모윤숙 시)로 바뀜
6. '또 하나 다른 태양', op. 7/2 : 후에 '또 하나 다른 세계' (이은상 시)로 바뀜
7. '바다', op. 8/1 : 후에 '갈매기' (이은상 시)로 바뀜
8. '風浪夢', op. 10/1 : 후에 '동해' (이은상 시)로 바뀜.
23) 『한국가곡의 작곡학적 고찰』,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74년, 21쪽 이하.
24) 이 글은 『음악과 민족』 제6호 (1993년, 13쪽 이하)와 제7호 (1994년, 8쪽 이하)에 재수록되었다.
25) 위의 글 (1993), 27쪽.
26) 김점덕, 『한국가곡사』, 24쪽.
27) 신정숙, 『한국예술가곡에의 접근』, 서울대 음대 석사학위논문 (1981년), 9쪽.
28) 연가곡 '먼길'은 Gilbert G. Moyle의 詩를 텍스트로 하여 1. 그대에게 매인 나의 마음 (My spirit with thine enchained), 2. 모든 행복이 내것이라도 (If all the happiness that is were mine), 3. 잘 자오 (Good night), 4. 오! 복된 잠이여 (Oh! Blessed sleep)의 모두 네편이다. 작곡당시는 英詩에 곡을 붙여져 작곡된 해에 미국인 테너 해러드 스폴링 (Harold Spauling)에 의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챕맨대학 음악회에서 처음으로 演唱되었다. 이 작품은 1936년에 한국에서 출판되는데, 이때는 韓黑鷗 (세광)씨의 譯詩와 함께 다음과 같은 서언을 덧붙였다. "이 가요곡 (song cycle)은 내가 미국유학시에 특히 시인 길버트 모일의 聖時를 애독하여 작곡한 것입니다. 그의 시집 「먼길」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되는 시 네편을 뽑아서 「먼길」에 대한 나의 Inspiration을 작곡 표현한 것입니다. 이 가요곡은 1932년 6월 25일에 미국 라디오 방송사 수석 테너인 해럴드 스폴링 (Harold spauling)씨가 처음으로 노래했습니다. 그후, 1933년 11월 26일에 '엠씨 무어 작곡구락부' (M.C. Moore Manuscript club)에서 그리고 1934년 4월 20일에 Holywood에 있는 '트리아츠 구락부' (Three Arts club)음악회 등에서 推薦되어 불려진 노래입니다". 신정숙, 위의 글, 10쪽에서 재인용.
29) 구두회는 그의 논문, 「한국적 예술가곡의 창작을 위한 논리연구와 시도작품 분석」에서"한국인 작곡가가 한국인이 쓴 시와 혹은 외국인이 쓴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가사로 삼아 가곡을 쓰되 전적으로 서양음악의 음악소재와 작곡기법을 활용하여 작품을 완성하였을 경우와 외국인 작곡가가 한국인이 쓴 시를 자기네말로 번역하여 가사로 사용하여 우리 나라 특유의 음악소재들을 활용하여 가곡을 작곡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하는가? 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의 유명 아리아 (Aria)가 동양적 선율을 사용하고 일본의 생활양식과 풍습 및 문화들을 묘사·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음악이 아닌 이태리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위 질문에서 제기한 전자의 경우를 '한국적' 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한국예술가곡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 문제에 관한 한 저자에게는 소재와 기법의 국적을 떠나 우선은 그 작곡가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가 구분의 경계가 되는 셈이다. 이에 따르면 본 논의에서 언급된 김세형의 '먼길'은 그 텍스트가 외국인의 것이지만 '한국예술가곡'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30) 같은 곳.
31) 신정숙, 위의 글, 12쪽.
32) 이건용, <가곡>항목, 『브리태니카 세계대백과사전』, 제1권 (1992년), 15쪽.
33) 김점덕, 『한국가곡사』, 25쪽.
34) 김미애, 『한국예술가곡』, 21쪽.
35) 이상만, 위의 글, 77쪽.
36) Art. "Lied", in: Riemann-Musiklexikon, p. 522.
37) P. Jost, Art. "Lied", in: MGG2, Bd. 5 (1996), pp. 1259/1260.
38) Art. "Lied", in: Brockhaus Riemann Musiklexikon, p. 40.
39) ibid.
40) 18세기의 용어사용 관습에 있어서 '리트'라는 단어는 아주 드물게 그 모습이 보여졌다. (예술가곡의 의미에서의) 바소 콘티누오 (Basso continuo)를 반주로 하는 '솔로리트' (Sololied)는 일반적으로 '아리아' (Aria)라고 하였으며, 이 '아리아'의 토대를 이루는 텍스트의 형태가 동일한 운율 (Metrik)과 운 (韻)을 지닌 여러 '절' (Strophe)로 구성되면 '송가' (Ode)라고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 '아리아'의 개념은 오페라와 칸타타에 등장하는 3부 구성의 노래로 국한되고 이와 함께 문학적 개념인 '송가'는 동일한 종류의 유절구성을 지니고 단일 멜로디로 불려지는 모든 성악작품에 사용되었다.
41) 이것은 당대의 계몽주의 음악관에 입각한 저명한 음악이론가들인 마테죤 (Johann Matteson: 1681-1764), 마르푸르크 (Friedrich Wilhelm Marpurg: 1718-1759), 샤이베 (Johann Adolf Scheibe: 1798-1776) 등이 바하 (J. S. Bach: 1685-1750)의 대위기법적 음악을 비판하면서 나온 수사어들이다. 바하음악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비판은 특히 P. Cahn, Scheibes Kritik an Bach und das Ende des Barock, in: Funkkolleg Musikgeschichte. Europäische Musik vom 12. - 20. Jahrhundert. Studienbegleitbrief 5. Weinheim und Basel 1988, pp. 11 이하에 잘 정리되어 있다.
42) 음악은 이제 더 이상 교회나 궁정만의 점유물이 아니며 인간의 여흥과 오락을 위한 것이여야 했다. 각자의 마음에 드는 음악이라면 모두가 연주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장려되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음악 (문화)에 대한 향수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43)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논문, 「18세기의 음악개혁가, 텔레만에 대한 재조명」, 『낭만음악』 1994년 겨울호, 181쪽 이하 참조.
44) P. Jost, 위의 글, 1264쪽에서 재인용.
45) 김미영, 위의 글, 133쪽.
46) Kim, Mi-Young, Das Ideal der Einfachkeit im Lied von der Berliner Liederschule bis zu Brahms, Dissertation, Kassel 1995, p. 62에서 재인용.
47) P. Jost, 위의 글, 1290쪽.
48) 쓜쯔는 Ode (송가)의 작곡을 거부하였다. 송가의 운율과 내용이 자신이 생각하는 리트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9) 김미영, 위의 글, 133쪽.
50) Kim, Mi-Young, 위의 책, 63쪽 이하 참고.
51) 김미영, 위의 글, 135쪽. '낭만적' (romantic)이라는 용어가 산업혁명을 일찍 겪은 영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산업화로 인하여 농민들은 도시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은 곧 이어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되면서 그 이전에 가졌던 농촌에서의 소박했던 전원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52) K. H. Wörner, Robert Schumann, München 1949, p. 83에서 재인용.
53) 홍정수 (역), 「호프만」,『음악미학텍스트』, 한독음악학회편 (부산: 세종출판사, 1998년), 200쪽 이하.
54) C. Dahlhaus, Musikästhetische Paradigmen, in: Funk-Kolleg Musik, edited by G. Kadelbach, Bd. 2. Frankfurt am Main 1981, p. 25; idem, Klassische und Romantische Musikästhetik, Laaber 1988, pp. 94-95.
55) ibid.
56) C. Dahlhaus, "Dschinnistan" oder Das Reich der absoluten Musik: Romantische
Musiästhetik und Wiener Klassik, in: ders. Klassische und Romantische Musikästhetik,
Laaber 1988, p. 87.
57) 18세기의 음악관에 영향을 준 계몽주의 정신에 투철했던 괴테가 1808년 12월 3일자 훔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어만이 음악과는 반대로 이성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낭만주의 시인였던 베티나 폰 아르님은 1810년에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님이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어떤 신선한 언어의 지고한 요소를 격하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성이 더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음악뿐입니다".
58) C. Debryn, Vom Lied zum Kunstlied, p. 269. 여기에서는 Kim, Mi-Young, 위의 책, 138쪽에서 재인용.
59) H. G. Nägeli, Die Liederkunst, in: AmZ 19, 1817, Sp. 766. 여기에서는 P. Jost, 위의 글, 1265쪽에서 재인용.
60) M. Schneider, Franz Schubert mit Seb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Rowolt Taschenbuch Verlag, Hamburg 1958, p. 96.
61) H. W. Schwab, Sangbarkeit, Popularität und Kunstlied. Studien zu Lied und Liedästhetik der mittleren Goethezeit 1770-1814, Regensburg 1965, p. 137.
62) 이 용어는 1830년대부터 사용되었지만 1868년, Edouard Schuré에 의해 결정적으로 불란서 용어로 수용된다.
63) 이 용어는 1876년 영국에서 발간된 사전에 수록된다.
64) 김미영, 위의 글, 138쪽에서 재인용.
65) 위의 글, 138쪽.
66) 이러한 괴테의 태도는 훗날 변하게 된다. 1825년에 괴테는 자신의 시에 음악을 붙인 슈베르트의 리트 '마부 크로노스에게', '미뇽에게' (1815), '가니메트'를 소장하고 있었으며, 1830년 4월 24일에 당대 최고의 성악가중의 한사람인 빌헬미네 슈뢰더 데브리앙 (Wilhelmine Schröder-Devrient)이 부르는 '마왕'을 듣고 완전히 매료된다. 그 이전에 보여줬던 냉담함이 자신의 '마왕'에서 표현된 단순함과 소박함이 슈베르트에 의해 환각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에 기인한다면, 이 음악회를 계기로 괴테는 슈베르트에게 영광의 찬사를 바치게 된다.
67) A. Edler, Schumann und seine Zeit, Laaber 1982, p. 212에서 재인용.
68) A. Edler, op. cit., p. 219.
69) S. Grossmann-Vendrey, "VII. Teil. Das 19. Jahrhundert", in: Karl H. Wörner. Geschichte der Musik, 8. Auflage, Göttingen 1993, pp. 442.
70) 당시에 창가라는 용어는 가곡과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1915년 윤치호가 경영하는 개성의 '한영서원'에서 발행된 창가집의 서문에서 알 수 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정신에 있다. 국민의 정신을 感發시키는 것은 가곡이 으뜸이다. 그런 고로 歐米諸國에 있어서는 巨擘의 시인, 음악가의 미묘한 시조 및 가곡으로써 국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우리 海東의 조국은 古來 가곡이 없지 않았으나 그 뜻이 대개 淫蕩放逸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卽 我 大韓 志士 仁人이 다 같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다. 然이나 現時 유식한 저작에 의한 미묘한 가곡이 적지 않다고 생각되나 각처에 散在하여 통일된 것이 없다. 이에 同志 서로 參詣하여 현재 諸大家의 가곡 有餘種을 수집 편찬하고 이름지어 창가집이라 한다 [...]". 민경찬, 『한국창가의 색인과 해제』, 70쪽에서 재인용.
71) 민경찬, 「시대별로 살펴본 한국 가곡 60년사」, 『음악동아』 1985년 9월호, 246쪽 참조.
72) 이상근, 위의 글 (2), 9/10쪽.
[저자소개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피아노 전공)음악학사(BM)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음악학 석사(MA)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음악학 박사(Ph. D)
서울대, 한양대, 성신여대, 경원대 등 출강
한세대학교 부교수, 음악학부장 및 음악연구소장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에 관한 소고
1. 문제제기
2. 논의의 대상
3. excursion: 서양에서의 예술가곡(Kunstlied)개념
3.1. 리트에 대한 일반적 사항
3.2. 리트에 대한 18세기의 이론과 미학
3.3. 음악관의 변화: 낭만주의 음악관의 태동
3.4. 가곡(Lied)에서 예술가곡(Kunstlied)으로
4. 한국적 예술가곡의 탄생
5. 참고문헌
1. 문제제기
한국의 양악사, 그 중에서 한국의 가곡1)역사에 관한 기존의 연구를 일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에 대한 논란이다. 『한국가곡사』를 집필한 김점덕은 작곡가 김성태가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이던 1937년에 정지용 시를 텍스트로 하여 작곡한 세 편의 가곡, '바다3', '말', '산너머저쪽'에 관하여 "이 곡들에게서는 낭만주의적 기법을 엿볼 수 있고 나중 두 가곡은 평조와 4도 5도 화음을 곁들여 한국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특히 이 가곡들은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작품의 효시가 되는 곡2)들로 주목된다"고 주장하고 있다.3) 이상만 역시 이 세편의 작품과 연관하여 "노래와 피아노부가 유기적 관련성을 갖고 독일가곡구성에 접근했고, 이름도 예술가곡이라고 이름이 붙여 예술가곡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4)라고 언급하고 있다. 훗날 작곡가 자신도 매우 조심스럽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위 작품에 "한국최초의 예술가곡"이라는 역사성을 부여하고 있다.
"[전략] 산너머저쪽과 말은 1937년의 작품으로 56년전 제가 일본 동경에서 한참 독일 낭만주의 시절, 특히 후기 낭만주의의 J. Brahms, H. Wolf, R. Strauss같은 분들의 예술가곡을 열심히 분석 연구하는 동안에 작곡한 가곡이어서 그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영향이란 그분들에 대한 맹목적 모방이 아니라 그분들을 상당히 소화해 자기화 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창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가곡은, 제가 아는 한, 우리 나라에서 제가 제일 처음 쓴 것이라고 생각되어 지금 생각해도 자그마한 자랑으로 여겨집니다 [후략]."5)
위에서 언급된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성태의 초기 가곡 세편은 우리 양악사에서 역사적 작품으로서 자리매김 되는 영예를 가지게 된다. 슈베르트가 1814년에 발표한 '실잣는 그레첸' (Gretchen am Spinnrade)6)이 서양음악사에서 최초의 "예술가곡"7)이자 "낭만적 가곡"으로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비견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김성태의 위 작품들이 우리 양악사에 있어서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기존 연구에서는 불불명한 상태이다. 이것은 우리의 양악사, 그 중에서 한국 가곡사에 대한 연구가 일천하고 가곡 내지는 예술가곡에 대한 개념규정이 아직 확고하게 정립되지 못한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저자마다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언급하는 곡이 다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동일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발표한 각각의 글에서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지칭하는 곡이 다르게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각 저자들은 '가곡', '근대적 의미의 가곡', '예술가곡' 등의 용어를 혼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더 얽히게 만들고 있다. 다음의 대표적 예는 이러한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시켜 준다. 이때 관찰의 대상은 김성태의 위 가곡들이 작곡된 1937년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2. 논의의 대상
이상만은 「한국 예술가곡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가곡 어디에서 출발했나」8)라는 제목의 글에서 "'예술가곡'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전후"라고 주장한다. "1955년 한규동이 「한국가곡집」이라는 노래 책을 엮음으로써 이 말의 사용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예술가곡의 출발을 -가사와 멜로디가 분리되어 작곡되었다9)는 이유를 들어- 홍난파의 '봉선화'로 잡고 있다. 여기에서 '가사와 멜로디가 분리되어 작곡되었다'함은 홍난파가 1920년에 발간한 자작 단편 소설집, 『처녀혼』의 첫머리 실린 '애수'라는 제목의 멜로디에 훗날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것을 의미한다. 가사가 붙여진 이 곡은 '봉선화'라는 제목으로는 처음으로 1925년에 발행된 『세계명작곡집』에 수록되게 된다.10) 김점덕은 이러한 이상만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홍난파의 '봉선화'를 "첫번째의 한국예술가곡"이라고 언급한다.11)
성의정12)은 "서양음악이 19세기 말 최초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찬송가나 외국민요에 우리 가사를 붙여 부르던 것"에 반해, 홍난파의 '봉선화'는 "시와 음악이 조화된 개념의 의미에서의 최초의 가곡"이라고 주장한다.
이유선13)은 김인식이 학도가14)이후에 작곡한 표모가(漂母歌)를 "예술가곡의 발아"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표모가의 가사내용이 "개인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의식적인 문학행위와 일치한 점"을 들고 있다. 즉 당시의 창가가 "개화의 물결 속에서 젊은이들이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닦아 나라를 빛내라고 하는 일종의 계몽사상을 특징"으로 하는데 반해 표모가의 가사는 단지 "하나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저자는 홍난파의 '봉선화'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 작품이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주장한다.
"[이 노래는] 비록 초기 창가와 다름없는 4·4조의 노래이지만 그 내용은 비할 바 없이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상징성은 전기 창가의 직설적인데 비해 훨씬 예술적으로 순화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홍난파의 가락이 갖는 새로운 양식에서 더욱 의의를 가지게 된다. 즉 난파의 멜로디는 종래의 찬송가나 그와 유사한 류의 창가에서 찾을 수 없는 참신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고도로 예술적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로써 종래의 창가는 완전히 예술가곡으로 승화하기 시작했다."15)
이유선은 다른 지면16)에서도 "1920년대에 와서 '20년대 특유의 시대감각에 따른 또 하나의 양식인 예술가곡이 탄생했다"고 언급하면서 홍난파의 '봉선화'를 '최초의 예술가곡'이라고 반복하고 있다. 황병덕17) 역시 "홍난파의 봉선화의 노랫말은 창가조와 같은 4·4조이나 창가조보다 앞선 음악성·예술성이 풍부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 곡이 "한국예술가곡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한편, 김형준은 그의 글, 「한국가곡사」에서 한국 양악사의 초창기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에케르트를 대장으로 하는 '시위연대 (侍衛聯隊) 군악대'를 언급하면서, 정부의 위촉을 받아 1902년에 작곡한 '한국군가'를 -비록 외국인이 작곡한 것이기는 하지만- "서구 가곡수법으로 작곡하였고, 한국 전래의 국악에 심취한 그가 군가의 선율에도 한국적인 정서를 담았다"는 점을 들어 "우리 나라 최초의 가곡"18)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홍난파의 '봉선화'를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곡"이라고 한다.
"이러한 [한일합방 이후의] 상황에서, 가곡은 초창기의 창가에서 점차 근대적인 예술가곡의 형태로 전화하면서 한편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달래며 한을 심는 내용이나, 자유를 희구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와 내일의 희망을 추구하는 노래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제의 압박으로 자유로운 의사 표시를 할 수 없었던 때인 만큼 추상적인 표현이나 상징적인 뜻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노래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대표적인 가곡이 우리 나라 최초로 작곡된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곡으로 꼽히는 홍난파의 '봉숭아'입니다."19)
이에 반해 박용구20)는 독일 유학 (1924-29)에서 돌아온 채동선이 -역시 같은 기간동안 일본 교토에서 유학후 귀국한-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하여 "시와 음악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진정한 의미의 우리 나라 최초의 예술가곡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박용구는 이 글에서 채동선의 가곡21)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지용의 시22)를 텍스트로 한 채동선의 가곡 대부분이 1932년과 1933년에 작곡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필자가 제기한 논의에서 고려해야 할 대상이 된다. 채동선 가곡의 역사적 중요성은 김점덕에 의해서도 부각되고 있는 데, 그는 특히 -오늘날 채동선의 가곡중에서 가장 애창되고 있는- 1933년에 작곡된 ('그리워'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고향'이 "그 시대에 있어서 가곡의 방향을 예시해준 귀중한 소산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 시대에 있어서 가곡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후에 함태균23)도 채동선의 '그리워'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의 풍부하고도 정감에 넘치는 선율과 조밀한 구상으로 일관된 이 가곡은 당시 우리 작곡계에 큰 선풍을 일으켰으며, 후배 작곡인들에게 방향을 제시한 문제작으로서 가곡의 역사에 좋은 자료가 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국내 최초로 등장한 격조 높은 이 가곡은 종전의 속성을 완전히 탈피한, 우리 작곡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작품"이며, 이 곡은 종래의 가곡에 비해 "자유로운 리듬과 음정의 혁신으로 가사의 억양과 음절 및 선율어법을 중요시"하였고 -이전의 가곡들이 취한 유절형식에 반해- "통절가요형식으로 일대 혁신을 꾀했다"라고 언급한다.
한편, 이상근은 1955년에 발표한 「우리가곡 시론」24)라는 제목의 지면을 통해서 "현제명, 홍난파, 이흥렬 등에 의해 일련의 가곡이 발표되던 그 때에 이미 고답(高踏)적인 몇 개의 Lied가 출판되었으며, 김세형의 연가곡 '먼길' (The long way)이 바로 그에 대한 좋은 증좌"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1932년에 작곡된 바로 이 곡이 우리 가곡사에 있어서 "예술가곡의 선구자로서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근은 이에 대한 근거로서 이 연가곡은 "풍부한 화성색채, 자유로운 음형 취급, 독립된 Piano의 운용 등으로 소위 동요나 창가의 범주를 벗어나 예술적인 높은 향취를 풍기는 작품이며, 이것은 우리 가곡사를 장식할 역사적 사실"25)이라고 한다. 김점덕 역시 김세형의 이 연가곡을 "작곡수법은 견고한 형식아래 풍부한 화성과 짜임새 있는 반주법 등으로 엮은 본격적인 예술가곡"26)이라고 평하고 있다. 김세형의 '먼길'을 우리 가곡사의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자기매김하는 시도는 신정숙의 글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그녀는 우선, 1920년대의 작곡된 많은 가곡들이 일반적으로 일제하에서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민족가곡"27)으로 명명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니까 "1919년 3·1운동 이후 좌절과 절망에 빠진 「우리의 노래」가 지니는 가치는 절대적이며, 예술가곡으로서의 발전을 추구하기보다는 민족혼을 일깨우고 망국의 설움을 함께 나누며 동족애를 고취시킬 민중의 노래를 창작하는 일이 당시의 작곡가들에게 급한 의무요 사명"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김세형 (1904- )이 미국 유학시절 작곡한 연가곡 '먼길' (The long way: 1932년작)28)은 "가사와 악곡내용이 한국적일 수 없는 흠29)은 있으나 예술가곡다운 틀을 갖춘 최초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유절형식의 단순한 가곡들이 불리우던 그 시대에서 연가곡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도입한 사실도 기록적이다"30)라면서 이 곡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점은 이어서 저자가 언급한 김성태에 관한 대목이다. 그녀는 김성태가 "반주부에 대한 독자성을 배려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그의 몇 편의 가곡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와 가락과 반주부의 균형감, 가곡구성을 위한 치밀한 노력의 흔적"의 이유를 들어 "한국예술가곡사의 첫 장을 연 작곡가"31)이며, 그에 이르러 "본격적인 예술가곡창작의 면모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건용은 『브리태니카 세계대백과사전』의 <가곡> 항목32)에서 홍난파의 '봉선화'를 "기능적인 요소를 많이 가기고 있었던 창가가 예술적으로 승화된 최초의 창작곡이라는 점에서 한국가곡의 효시"로 보고 있으며, 이어서 "1933년에 작곡된 김동진의 '가고파'를 "가곡 (특히 서정가곡)의 양식적 방향성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예술가곡의 전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밖에 1937년 이전에 작곡된 곡으로서 기존의 문헌에서 예술가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곡으로는 김세형이 1934년에 작곡한 '뱃노래'를 들 수 있다. 김점덕33)은 이 작품에 관하여 "가사는 춘원 이광수의 것이며 작곡가가 미국 로스앤젤스에서 망향을 달래면서 작곡한 한국적인 가락과 장단으로 된 작품이다. [중략] 이 곡은 피아노 반주부에서 독립된 기능으로 효과를 노리고 민요적인 분위기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가곡이다."라고 말한다. 김세형의 가곡으로는 -기존문헌에서 예술가곡으로서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본 논의의 관찰의 대상으로삼아야 하는- 그보다 더 이전에 작곡된 '야상' (1925년), '추억' (1929년) 등이 있다.
김미애34)는 1920년을 경계로 우리의 노래가 "창가에서 예술가곡" 시대로 넘어갔다고 하면서 1920년대의 대표적인 예술가곡으로 홍난파의 '봉선화'를 비롯하여 박태준의 '동무생각' (1922), 현제명의 '고향생각' (1922년), 김세형의 '야상' (1925년) 등을 예로 든다. 물론 예술가곡에 대한 개념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행연구에서 제시된 각 저자들이 언급한 한국 최초의 예술가곡은 나름대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일관되지 못하고 그 관점 역시 제각기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본 논의의 결론을 학문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 우선 서양에서, 그 중에서 특히 독일에서 '예술가곡'의 개념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에 작곡된 우리의 가곡이 독일의 예술가곡 (Kunstlied)을 표방하고자 했다35)는 점이 그 첫째 이유이고, 서양의 경우와 우리의 양악사에서는 '예술가곡'의 탄생 배경과 토양 그리고 음악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쳐 19세기에 확립한 '예술가곡'에 대한 개념이 필자가 제기한 문제점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3. Excursion: 서양에서의 예술가곡 (Kunstlied)개념
3.1. 리트에 대한 일반적 사항
'리트' (Lied)라는 명칭은 언어적 (내지는 문학적) 영역과 음악적 영역 양쪽에서 이중적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때문에 모든 부분적 사항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리트의 정확한 정의는 불가능하다.36) 물론 일반적인 인식에 의하면 '시와 음악의 합일체'라는 말은 리트라는 용어의 본질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두 영역에서의 리트라는 용어의 광범위한 사용은 리트를 구성하는 이 두가지 요소가 -개념의 손상 없이- 상호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리트라는 용어는 한편으로는 -비록 작곡되는 것을 목표로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편의 詩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기악형식을 지닌 '無言歌' (Lied ohne Worte)이건 간에 혹은 본래의 리트를 기악곡으로 편곡한 작품이건 간에- 텍스트가 빠진 리트 멜로디 혹은 완성된 리트악곡의 명칭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서 개작하는 콘트라팍투르 (Kontrafaktur)나 기존의 작품을 차용하여 텍스트는 물론이고 그 작품을 조각내거나 양식을 바꾸는 등의 파로디 (Parodie) 기법은 <텍스트와 음악>의 불가분의 결합이라 생각에 모순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37)
하지만 리트는 그 언어적 구성에 있어서 내용적으로는 물론이고 형식적으로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Sangbarkeit)는 규정에 구속된다. 그리고 逆으로 리트를 음악적으로 만드는 것, 즉 단순성, 통일성, 선율적 다듬기, 노래가 가능하도록 음량 및 음역 (Ambitus)이 -기악 작품과 달리- 소폭으로 제한되어야 하는 것, 짧은 모티브, 악절성 (Periodik), 각 절의 상응, 유절적 구성 등은 본질적으로 언어와의 유사성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38)
음악분야에서의 리트는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구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기능과 연관된 리트이다. 여기에는 민요 (Volkslied), 찬송가 (Kirchenlied) 그리고 노동가 (Arbeitslied) 같은 정치적 리트가 포함된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기능과는 관련 없이 탄생하고 예술적으로 형성된 리트이다 (이 리트는 19세기의 "낭만적" 예술가곡 (Kunstlied)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이게된다). 문제는 이 두 종류의 리트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기능적으로 연관된 리트도 예술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예술가곡 역시 사교적 뿌리를 지녔다는 점에서 기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18세기 중엽의 헤르더 (Herder) 이후 그리고 19세기 전반기의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된 민요 (Volkslied)가 同시대의 "예술가곡" 작곡에 하나의 모델로 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리트의 일반적 구분조차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39)
3.2. 리트에 대한 18세기의 이론과 미학
리트40)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은 18세기 중엽 무렵,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와 함께 리트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는 리트에 대한 명백하고 뚜렷한 이론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은 리트가 교회음악이나 무대음악의 그늘에 놓여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17세기말에 리트는 당시 활발했던 음악장르였던 '아리아' (Aria)나 '칸타타' (Kantate)에 의해 뒷전으로 밀렸고, 이러한 상황은 18세기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특징였던 리트의 단순성 (Einfachkeit)과 정형성(Gleichfömigkeit)에 대하여 서서히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게 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당시의 시대정신인 계몽주의 (Aufklärung)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계몽주의 정신에 따른 음악은 "과장되고, 복잡하며, 인위적"41)이어서는 안되며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42)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계몽주의적 음악의 토대는 -대표적인 계몽주의 음악가인 텔레만43)에 의하면- '가창성' (Sangbarkeit), '단순함', '자연스러움'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대정신 하에 '리트'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는 당연한 순서였다고 할 수 있다.
크라우제 (Chr. G. Krause: 1719-1770)는 최초로 리트미학에 대한 포괄적인 저서, Von der Musikalischen Poesie를 1852년에 베를린에서 출간한다. 이 저서에서 크라우제는 수공업적 의미의 시 작법 (詩 作法: Poetik)에서 만들어진 지침을 "음악적 시의 문체"에 적용하고자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세칭 "제1베를린 리트악파" (Berliner Liederschule)의 리트 미학을 규정하였고, 이론적으로 새로운 민요개념에 입각한 그 다음 세대인 "제2베를린 리트악파" 및 19세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크라우제는 리트를 (오페라) 아리아에 직접적으로 대립시키면서 그 이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이상은] 스케르츠리트 (Scherzlied)이며, 이 곡은 모든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부를 수 있고 피아노 혹은 다른 악기의 반주 없이도 부를 수 있다. 우리 [=독일] 작곡가들이 노래하면서 자신들의 리트를 작곡할 경우 -피아노가 필요치 않고 또 다른 베이스[악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우리 나라에서 그 취향은 곧 보편적으로 될 것이며, 도처에서 재미를 느끼고 감정적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44)
바로 이 글에서 괴테가 활동하던 시기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리트의 원칙인 '가창성' (Sangbarkeit)과 '대중성' (Popularität)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러한 원칙은 실제 연주에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에 간단한 피아노 반주가 곁들여진 짧은 유절리트 (Strophenlied)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텍스트 (詩)의 언어적 리듬과 문장구성 (Syntax) 그리고 일정하게 제한된 음역 (Ambitus)에 대한 세심한 주의는 모두 이 '노래성'을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의 전체 진행이 가능한 한 최소한의 모티브에서 비롯되도록 하는 작업 역시 기억을 손쉽게 하고 널리 유포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 위 인용문의 "피아노 혹은 다른 악기의 반주 없이도 부를 수 있다"는 구절에서 악기 반주로부터의 독자성과 반주 없이 노래한다는 것에 대한, 당시의 리트 미학에 영향을 끼친 프랑스 샹송 (Chanson)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제1베를린 악파라고 일컬어지는 일군의 작곡가 (Benda, Quantz, Graun 형제, C. Ph. E. Bach)들은 "모든 장식적 음형들과 인위성"을 배제하고, 단순하면서 자연스럽고 손쉽게 노래할 수 있는 유절 형식을 하나의 굳건한 규칙으로 삼았다. 이들은 노래 (멜로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피아노 반주는 후에 덧붙였다. 이들이 양산한 리트들은 높은 경지의 예술적 요구를 충족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리트들이 지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과 제한된 유포로 인하여 당시에 벌어졌던 보편적 예술문제에 대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훗날 전개된, 성악의 경쟁 장르인 아리아와 칸타타와 대등하거나 그보다 우월한 리트의 지위상승을 준비하는 작업이 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작곡가들 중에서 이러한 논쟁에 참여한 수는 매우 적었지만, 뷔르거 (Gottfired August Bürger), 괴테 등 당시의 저명한 시인들이 점차 이 논쟁에 가담하였다. 바야흐로 송가 (Ode)의 개념은 리트의 그것과 분리되게 된다. 줄쩌 (Johann Georg Sulzer)는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들은 이 두 가지 (=리트와 송가)의 외적 차이를 다음과 인정할 수 있다. 즉, 리트는 언제든지 노래로 불려져야하고 한 절의 선율이 다른 나머지 절에도 적합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송가 (Ode)는 단지 읽도록 되어있거나 혹은 송가가 불려지도록 하려면 매 절마다 다른 멜로디가 요구된다."
리트가 예술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민속성의 의미에서의 단순한 유절노래로 파악하고 있는 베를린 리트 악파의 사고는 반박할 여지가 있지만, 이것은 당시 널리 유포되고 사람들에 의해 기대되고 있는 리트의 개념이었다. 이러한 개념규정은 당시에 출간된 사전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노래로 불려지도록 정해진 여러 절로 구성된 모든 서정시는 그 노래의 선율과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선율은 매 절마다 반복된다. 이 선율은 예술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건강하고 유연한 목소리를 지닌 모든 사람들에 의해 불려질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이처럼 리트가 유절형식을 지녀야 한다는 전제는 리트에 대한 당시의 보편적 사고였다. 물론 시의 각 절들이 동일한 선율로 불려질 때 빗어지는 문제점, 즉 각 절의 내용이 다르다면 한 선율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없지는 않았지만, 유절형식의 선호는 텍스트의 상세한 내용을 음으로 그리듯이 묘사하는 음회화적인 것에 대한 거부와 음악적 표현에 있어서 정서적 통일을 최고 가치로 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가곡 선율은 각 단어의 상세한 내용을 그리는 듯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전 가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본질, 즉 그 노래의 기본 정서를 표출해야 하는 것이었다.45)
유절형식의 리트는 변형된 유절형식 혹은 통절 형식으로 작곡된 곡보다 우위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제2베를린 리트악파로 불려지는 그 다음 세대에까지 지속되었으며 민요 (Volkslied)가 리트 작곡의 새로운 이상으로 부각된다. 이 악파의 대표적 리트 작곡가로 일컬어지는 쓜쯔 (J. A. P. Schulz: 1747-1800)는 1785년에 발간한 자신의 가곡집 (Liedersammlung) "민요조의 리트" (Lieder im Volkston)의 제2부 서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 가곡집에 수록된 모든 리트들은 '예술적' (kunstmäßig)이라기 보다는 '민속적' (volksmäßig)으로 불려져야 한다는 나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말하자면, 훈련받지 않은 노래 애호가들도 -비록 그들이 [좋은]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노래들을 쉽게 따라 부르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가곡집의] 마지막에 나는 민중의 노래 (Volksgesang)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겨지는 최상의 리트시들 중에서 그와 같은 텍스트를 골랐으며, 그 멜로디룰 작곡함에 있어서 가장 단순하고 (Simplizität) 잘 이해되도록 (Faßlichkeit) 노력하였다. 그러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잘 알려진 외형' (Schein des Bekannten)이 되도록 한 것이다. [중략] 이러한 '잘 알려진 외형'에 민요조 (Volkston)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46).
이처럼 '리트'라는 장르가 "예술적이기보다는 민속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헤르더 (G. Herder) 이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리트관이자 괴테 시대의 "고전적 리트미학"의 핵심이었다.47) 슐쯔는 민요조의 노래를 통해서 '단순하고' '쉽게 접근되어야 한다'는 두가지 이상을 용해하였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리트가 일반 대중들에게 보다 넓게 확산되도록 하는 민중 교육적 성격을 표방하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함'과 '명료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확한 리듬적·운율적 악절구성, 시퀀스 및 반복을 구사하였다. 이때 화성적 수단은 소극적으로 다뤄졌으며, 피아노의 간주 및 후주는 거의 없었다. 피아노가 펼치는 음화적(音畵的) 표현도 물론 보여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리트작곡에 있어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하는 주요 원칙은 언어 (텍스트)와 음의 관계에 있어서 언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음악가들은 기악음악이 -텍스트가 없음으로 해서-가지는 불분명함 때문에 성악음악보다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겼고, 따라서 가곡 작곡에 있어서도 언어는 음악에 우선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가곡 작곡가의 임무는 '단순함'과 '명료성'에 걸맞은 詩48)를 선정하고, 시인의 문체를 따르면서 시의 정서와 운율적, 리듬적 구조를 노래부를 수 있도록 선율적으로 고양하여 널리 보급하는데 있었다.49) 다른 한편으로, 작곡가는 시인들로 하여금 유절형식의 작곡을 염두에 두고 언어적 액센트와 음악적 액센트가 일치하는 시를 쓰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동일한 선율에 각 절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음악과 텍스트의 일치'라는 원칙이 지켜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50) 18세기 가곡 작곡에서 중요시 되었던 위의 원칙들은 19세기 들어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당시에 새롭게 정립된 "낭만주의 음악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3.3. 음악관의 변화: 낭만주의 음악관의 태동
'낭만주의' (Romantik)는 본래 18세기 후반과 19세기초에 유럽적 차원에서 전개된 정신운동의 일환으로 주창된 것이었다. 이 정신운동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각기 상이한 사회적 발전과정을 겪었고, 철학, 자연과학, 의학, 예술 등 전 분야에서 보여졌다. 그 중에서 훗날 19세기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음악적 낭만주의 이론의 토대는 1790년대에 독일의 낭만주의 문학자, 특히 봐켄로더 (W. Wackenroder: 1773-1798)의 '예술애호가인 수도승의 심정토로' (Herzenergißungen eines kunstliebenden Klosterbruder: 1797)와 봐켄로더와 틱 (L. Tieck: 1773-1853)의 공동작품인 '예술에 대한 환타지' (Phantasien über die Kunst: 1799)라는 제목의 두 저서를 통해 탄생되었다. 그러니까 '이론은 실제보다 늦게 형성된다'는 믿음과는 반대로 당시의 낭만적 음악관은 훗날 낭만적 정신에 의해 창조된 음악을 약 15년 가량 선취한 셈이다.
낭만주의 문인들은 그 이전 시기의 계몽주의 (Aufklärung)에서 비롯된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혁명과 산업문명사회로 이어지는 당시의 세계상, 즉 합리화, 기계화, 탈마법화 (Entzauberung), 생활의 건조화를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 "깊은 타락"으로 보았다.51) 또한 자신들의 희망을 인간성의 해방에 두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 (1789년)의 영향을 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혁명의 실패, 나폴레옹과의 거듭된 전쟁 등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착하지만 문명에 의해 타락하였다는 사고 하에 이성보다는 감정을 신뢰하게 되었다. 훗날 슈만이 "최초의 상념이 언제나 가장 자연스럽고 최상의 것이다. 이성은 실수를 범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다"52)라는 주장도 이러한 낭만주의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것, 신적인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세계는 오로지 예술작품만을 통해서 펼쳐질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제한 받아서는 안되며,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의 세계를 <예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예감은 제반 예술분야 중에서 음악, 그 중에서도 기악음악에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낭만주의자들이 본 점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모든 시인, 문필가 및 철학자들은 앞다투어 음악을 찬미하였고 음악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들에게 음악, 그 중에서 기악음악은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며 음악은 현재의 불만족을 해소하고 미래의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기악 음악이 가지는 모호함 때문이었다. 기악음악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 인간의 일상적인 현실의 언어로는 형용 불가능한 그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파악된 것이다. 이로써 바로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텍스트가 없음으로 인하여 정서 (Affekt) 전달에 불완전한 음악으로 낙인 되었던 기악 음악은 '가장 순수한 예술'로서 자율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그 표현의 추상성으로 인하여 최상의 예술로 낭만주의자들의 찬미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낭만적 사고, 특히 봐켄로더 (W. Wackendoder)와 틱 (L. Tieck)에 의해 주창된 낭만적 음악관은 호프만 (E. Th. A. Hoffmann: 1776 - 1822)에 의해 본격적으로 음악분야에 전이되었다. 그것은 호프만이 1810년 '음악일반신문'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7월 4일자에 기고한 베토벤 제5번 교향곡에 대한 비평문에서부터이다.
"[...] 음악을 독자적인 예술로 말할 때에는 항상 기악을 말한 것이어야 한다. 기악은 다른 예술의 도움이나 간섭을 비웃으며 음악에서 인식될 수 있는 예술의 원래적 본질을 순수하게 발설한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다. [...] 음악은 인간에게 미지의 왕국을 열어준다. 이 세계는 주위의 감각세계와는 너무 다르며, 이 세계에서는 개념으로 규정짓는 감정을 물러나게 하는데, 이는 스스로 형용불가능성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 천재적 작곡가들이 기악음악을 지금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린 것은 표현도구 뿐만 아니라 (악기의 완성도, 연구가의 더 높은 장인성), 음악의 원래적 본질에 대한 깊은 내적 원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기악음악의 창조자들인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그 예술이 가득한 영광으로 만개한 것을 보여준다. 그 예술을 가득찬 사랑으로 바라보고 그 내적 본질로 깊숙이 들어간 사람은 베토벤이다. 이 세사람의 기악 작품들은 [...] 동일한 낭만적 정신을 호흡하고 있다. [...] 하이든의 작품에는 어린애다운 명랑한 감정표현이 지배적이다. [...] 모차르트는 우리를 깊은 정령의 세계로 이끈다. [...] 베토벤의 기악도 엄청나고 측량할 수 없는 왕국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 낭만적 취향은 흔치 않다. 낭만적 재능은 더 드물다. 그러므로 그 놀라운 무한의 왕국을 여는 리라를 켤 수 있다. 하이든은 인간의 삶에서 인간적인 것을 파악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측량 가능하다. 모차르트는 정신의 내면에 있는 초인적인 것, 놀라운 것을 요구한다. 베토벤의 음악은 공포, 무서움, 경악, 고통의 도구를 이용하여 낭만주의의 본질인 무한한 동경을 일깨운다"53).
이처럼 낭만주의자들은 기악음악을 가장 순수한 예술이며, 다른 예술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것을 전제로 하여 가장 탁월한 예술로 간주하였다. 다른 예술들이 뚜렷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에 반하여 기악음악은 <모호>하다. 이 '모호한 것', '형용 불가능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가 말하는 <시적인 것>(Das Poetische)의 특성이 된다. 여기에서 '시적인 것'은 문학적 의미가 아닌 예술의 본질을 의미한다. 그런데 호프만이 주장한 낭만적 음악관은 지금의 시대개념으로의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고전주의"시대의 기악에 관한 이론임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호프만은 특히 슐레겔 (A. W. Schlegel)과 장파울 (Jean Paul)에 의해 정형화된 역사철학적·미학적 안티테제 (Antithese)를 이어받고 여기에 봐켄로더가 음악에 대하여 보여준 ("기악의 해방"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미하여 예술 전반을 이분적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니까 낭만주의자들의 언어관습에서 보여진 "낭만적"이라 함은 전체 기독교 시대에서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시대구분, 즉 '고대'에 대비된 "근·현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중세를 포함한 그 이후의 시대는 "낭만적 근·현대"(romantische Moderne)이고, 이에 반해 "고대"는 "고전적" 시기(klassischer Antike)라는 말이다.54) 호프만은 슐레겔의 주장을 차용하면서 조형예술, 특히 조각은 신의 형상을 표현한 "고대"의 예술이고, 음악, 특히 기악음악은 기독교적 정서를 가장 순수하게 선언한다는 본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이건, 현재의 교향곡이건 간에 기독교시대의 징표로서 예수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형이상학적인 본질로 나타난 예술로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음악에서는 감각(물질, 현상)세계와 분리되고 해방된 "내적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세계에서 '무한함' (Das Unendliche),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예감' (unbeschreibare Vorahnung)이 나타나는 것이다.55)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세계에서 제거된다. 호프만은 음악의 본질을 '무한한 동경' (unendliche Sehnsucht)이라고 말한다. 이 동경은 지상의 것이 아니고, 만질 수도 없으며, 규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다. 호프만은 "정령의 소리 (Geisterstimme)"를 들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낭만적"이라고 하였다. 바하와 모차르트의 양식을 절충하여 작곡한 자신의 초기작품들을 "낭만적"이라고 하는데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낭만적 환타지'를 열어주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56)
3.4. '가곡' (Lied)에서 '예술가곡' (Kunstlied)으로
이러한 음악관의 변화는 리트작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야흐로 "낭만적 리트" 작곡가는 詩의 언어음을 단지 음악적으로 뒷받침하는 임무를 초월하여 詩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가로 인식되고 출현한다. 작곡가는 텍스트에 선율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난 후 거기에서 얻어진 느낌 (혹은 영감)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간다. 작곡가는 언어적 텍스트가 미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57)을 음악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독일의 음악학자 데브린 (C. Debryn)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은 개념적인 일련의 텍스트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정조 (Stimmung)와 정서상태 (Seelenzustände)를 독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詩언어를 초월한다. 음악 특유의 정조가 창조되고 직접적으로, 우회 없이 개념적인 것이 전달된다는 바로 이점 때문에 음악은 무한하고 상징적인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58)
가사를 통해서 더 이상 표현불가능한, 하지만 작곡가가 그 가사에서 얻은 느낌은 피아노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 표현이 가능해졌다. 이제 피아노는 없어도 되는 그러한 반주악기가 아니라 작품의 "정조"와 "정서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적인 반주" (obligates Accompagnement)로 자리매김된다. 이와 함께 음악은 텍스트에서 해방되게 되고 리트 작곡에 있어서 굳이 고정적인 유절형식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낭만적 가곡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슈베르트의 경우 (수많은 다성부 성악곡과 이태리 詩를 작곡한 것까지 포함하여) 총 660여편에 이르는 리트를 작곡했지만, 이 작품들은 보편적인 형식모델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작곡가가 선택한 각 시의 구조와 내용에 따라 음악적 틀이 만들어지곤 하였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곡가의 과제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라이하르트 (Reichardt)와 춤스텍 (J. R. Zumsteeg)의 발라드 (Ballade)에서 그 단초가 보여지고 있었는데, 내겔리 (H. G. Nägeli)는 춤스텍의 작품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언어리듬 [=텍스트], 노래리듬 [=선율] 그리고 연주리듬 [=피아노파트]의 세가지가 보다 높은 경지의 예술전체로 합쳐져야 한다"59)는 새로운 차원의 리트 양식을 요구하였다.
피아노 파트가 노래 성부를 단지 뒷받침하는 반주 역에 그치지 않고 동등한 자격을 지니면서 독자적인 음악적 분위기를 연출해나간다는 사고는 우선 악보 기입에 있어서 3 시스템 (노래성부 1 + 피아노 파트 2)으로 나타났다. 피아노 파트는 -지금까지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던- 멜로디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고 노래성부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파트너가 된다. 피아노 파트는 텍스트가 지닌 표현과 분위기를 개별적으로, 전체적으로 암시해내고, 전주, 간주 및 후주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시적·상징적 암시를 펼쳐 보였다.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리트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슈베르트에 이르러서이다. 슈베르트의 초기 작품이 라이햐르트 (Reichardt), 슈테판 (Steffan) 그리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리트, 특히 춤스텍의 발라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면60), 1814년에 작곡된 '실잣는 그레첸' (Gretchen am Spinnrade, D 811)에서 이미 슈베르트 고유의 음악어법이 선보여진다. 쾨테의 시를 텍스트로 한 이 곡의 피아노 파트는 성악성부의 반주가 아니라, 가사의 상황에 따른, 즉 '물레의 돌아가는 모습'을 상징하는 독자적인 모티브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 물론 성악파트와는 별도의 모티브이다. 시의 해석가로 등장하는 작곡가의 입장변화는 물레를 표현하는 피아노의 수식 외에 텍스트의 변형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즉 괴테 시의 마지막 절정인 "An seinen Küssen vergehen sollt"(그와의 입맞춤 도중에 숨을 거두어도 좋으리) 대신에, 슈베르트는 "Meine Ruh ist hin, mein Herz ist schwer" (나의 평화는 사라졌네, 내 마음은 무겁구나)라는 후렴구를 반복함으로써, 원시의 정형적 구조를 변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하여 '예술가곡' (Kunstlied)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등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술가곡'이라는 용어는 '실잣는 그레첸'이 출간된 1821년보다 20년 뒤인 1841년에 칼 코스말리Carl Kossmaly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다61). 그리고 이 시기부터 '예술가곡'과 '민요'가 구분되기 시작하고, 가곡이라 함은 예술가곡을 지칭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즈음에 독일용어인 Lied는 이웃나라로 수출되어 불란서에서는 "le lied"62)로, 영어권에서는 "the lied"63)로 사용되게 된다).
슈베르트의 리트에서 보여지는 음악의 시적, 상징적 암시는 쇤베르크가 1912년에 '청색기사' (Der blaue Reiter)라는 연보에서 토로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몇 년 전 굉장히 부끄러웠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잘 알고 있었던 몇몇 슈베르트 가곡에서 그 곡의 근저를 이루는 詩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를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통해 이 곡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시를 읽었다고 해서 그 곡에 대한 나의 의견이 조금도 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시의 언어적 사고의 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시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 내용, 그 진정한 내용을 아마 더 깊이 파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니까 나는 시가 붙어있는 Schubert의 가곡을 단지 음악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했던 것이다".64)
김미영은 "쇤베르크가 시의 진정한 내용을 가사를 통해서보다는 음악을 통해서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슈베르트가 각 단어를 음악으로 옮기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시로부터 얻어낸 전체적 표상을 음악의 힘으로 재창조하였기 때문이다"65)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종류의 리트는 전형적인 18세기 미학관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투철한 리트관을 가진 시인, 예를 들자면 괴테 같은 인물은 "낭만적 리트"에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즉, 1816년에 슈베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들장미' (Heidenröslein), '실잣는 그레첸' (Gretchen am Spinnrade), '뜨거운 사랑' (Rastlose Liebe), '마왕' (Erkönig) 등이 수록된 작곡집을 바이마르의 괴테에게 보냈지만, 괴테는 이를 냉담하게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66)
슈베르트에 의해 그 "고전적 모델"이 완성된 "낭만적 리트"는 슈만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슈만은 기악음악을 최고의 예술로 찬미한 낭만주의 문인들의 저서에 정통하였고, 따라서 그의 초기 작품은 기악음악, 그 중에서도 피아노 작품에 한정되었지만, 그의 음악관은 1840년을 고비로 변하게 된다. 1839년에 H. Hirschmann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악은 위대한 예술의 범주에 들지 않으며 기악음악보다 한 수 아래"67)라고 주장했던 슈만은 곧 자세를 바꾸게 된다. '리트'라는 장르에서 풍부한 표현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본인 스스로 "리트의 해"라고 명명한 1840년 한 해 동안 슈만은 자신이 평생동안 작곡한 가곡의 절반 이상을 양산하게 된다. 이때 슈만은 리트라는 장르에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성악과 피아노의 결합에서 시의 음악적 표현이 결정적이고 풍부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슈만은 성악 성부만으로는 詩의 완벽한 표현은 성악성부의 힘에 피아노 성부가 보충되었을 때 가능해진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음악학자 에들러68)는 슈만의 리트에서의 피아노의 역할을 '포장', '뒷받침', '반주' 등과 같은 개념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피아노 파트에서 시 전체의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악성부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슈만이 기악음악에서 추구하였던 포에지 (Poesie: 詩性)은 리트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표현의 극대화를 요구하였고 이는 피아노 성부에 의해서 달성된다고 여겼다. 이처럼 "낭만주의 리트"에서는 "참예술의 속성"이라고 추구되었던 포에지, 즉, 시언어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그 행간에서 해석되는 전체적 분위기를 음악을 통해서 완성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바와 같이, 서양에서 18세기에 정립된 가곡관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라 음악관에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19세기의 "낭만적 가곡"은 "예술가곡"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대두를 가져왔는데, 그 핵심은 작곡가가 시의 해석가로 위치하면서 선택한 시의 전체적 분위기 (Stimmung)를 음악적으로 전개시킨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선율은 일차적으로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그려내고 때로는 어느 특정 단어나 구절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이와 함께 피아노 파트는 독창성부에 대해 때로는 화성적 방법으로, 때로는 선율적 방법을 가미한다. 즉, 음악은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언어적 형태에 상응하는 음악적 형상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이때 유절형식은 텍스트의 내용에 따라 변형되기도 하고 각 행의 마지막 부분 등은 선율의 진행에 따라 반복되어 읊어지는 등의 변화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특정한 음형을 통한 반주가 수반되기도 한다. 통작형식으로 작곡된 리트의 경우에는 음악은 텍스트의 매 절마다 독자적인 선율을 지니게 되며 이들간의 통일성은 모티브적 짜임새, 즉 "고전적 기악음악"에서부터 그 모습을 선보인 "절대음악적 구조원칙"을 통해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피아노 파트는 독자적으로 텍스트의 절과 절, 혹은 詩句의 行과 行사이에 간주를 삽입함으로써 시의 표현 형식을 보다 고양시킨다. 혹은 슈만의 가곡에서처럼 에필로그 (후주)에 그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요약하는 수법이 사용될 수도 있다. 요약하자면 음악은 텍스트에 부가적인 차원을 추가하고, 동시에 음악의 영역은 텍스트를 통해서 그 정밀함이 지시된다. 이와 같이 음악과 텍스트는 상호간의 해석관계를 통해서 음악은 텍스트의 '言外의 의미' (Konnotation)를 그리고 텍스트는 음악의 '言外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그러니까 텍스트의 시적 구조와 음악적 구조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다.69)
4. 한국적 예술가곡의 탄생
작곡가가 시의 해석가로 자리매김 되고 피아노가 더 이상 선율의 반주가 아닌 독자성을 지닌 파트너로 위치하게 되는 서양의 "예술가곡"의 개념의 본질은, 본 논의의 서두에서 제시된 작품들의 경계설정을 보다 분명하게 해준다. 대표적으로 홍난파의 가곡70) '봉선화'는 그 이전 시기 혹은 동시대의 창가와는 구별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술가곡"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가가 "일반적으로 1900년에서 1920년대에 불려진 노래로서 서양의 악곡 형식에다 계몽사상과 교훈을 담은 가사와 반일 감정 등 당시의 시대상을 담고 있으며, 주로 찬송가나 외국 민요의 선율에 가사만 바꾸어 붙이는 작곡가 미상의 가사 위주의 노래이고 그 목적도 반일 감정과 문명개화의 시대상황에서 민중의식의 형성과 계몽에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71) 라고 한다면, 홍난파의 '봉선화'는 그 텍스트의 내용이 동시대의 창가와는 확실하게 구분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적인 구성 면에서 보자면 피아노 파트는 선율적 진행을 아주 단순한 형태로 반주하는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이 곡의 가사가 선율이 작곡된 후에 붙여졌다는 사실은 본 논의에서 규정한 '예술가곡'의 본래 의미를 벗어나게 된다.
이와는 달리 김세형, 김동진, 채동선의 작품은 '예술가곡'에 보다 접근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의 피아노 파트는 대부분 화성적 뒷받침을 통한 단순한 반주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음회화적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고 (예: 김동진의 '가고파'에서 트레몰로 진행을 통한 잔잔한 물결 묘사) 노래 성부와 피아노파트의 댓구적 진행 (예: 김동진의 '가고파'에서 48번째 마디부터 52번째 마디까지), 전주에서의 독자적인 멜로디 운용 (예: 채동선의 '그리워') 내지는 피아노 파트의 비교적 독립적인 진행 (김세형의 '야상', '뱃노래') 등의 특성이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은 -조두남이 1937년에 작곡한 '제비'와 함께- 홍난파 류의 '가곡'의 범주를 넘어서서 '예술가곡'에 보다 접근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가곡의 前史'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슈베르트의 예술가곡 이전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작곡한 (연)가곡, 라이햐르트와 춤스텍의 리트와 발라드들이 훗날 규정되는 예술가곡적 특성을 지녔다고 언급될 수 있듯이 말이다.
한국 양악사는 김성태가 1937년에 작곡한 세 편의 작품에 이르러 드디어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술가곡'의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작곡가 자신은 이 작품에 -한국작곡가로는 최초로- '예술가곡' (영어로는 'art song'으로 표기하였음)이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의식적으로 기존의 성악작품과 차별성을 표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곡가는 정지용의 시에서 얻어진 느낌, 시의 行間에서 얻어진 이미지를 빈번한 박자변화를 통한 선율의 진행과 다이내믹의 변화 및 변화화음 등을 통하여 음회화적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피아노 파트는 "치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용의 하에"72) 성악성부를 화성적·선율적·리듬적으로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주제를 지니면서 성악성부와 대등한 자격을 지닌 파트너로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二位一體的 합일체를 창출하고 있다. 김성태의 초기 가곡은 이처럼 한국 가곡사의 여명기에 한 획을 그리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다3'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반음계적 선율진행 진행 (前奏部)과 후기 낭만적 화성으로 도입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산 넘어 저쪽'과 '말'은 "한국적"이라는 수사어를 지닐 수 있는 음악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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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서양음악을 돌아본다』, 『음악동아』 1986년 4월호부터 1987년 3월호까지 8회에 걸쳐 연재.
-----, 「해방공간에서 6·25까지 공백기 한국음악사를 말한다」, 『객석』 1988년 6월호, 69쪽 이하.
성의정, 「한국예술가곡 무엇인 문제인가. 외국가곡과의 비교」, 『객석』 1984년 12월호, 75쪽 이하.
이정화,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본 한국예술사」 (박용구와의 대담기록 정리), 『객석』 1989년 1월호부터 1991년 7월호까지 25회에 걸쳐 연재
한상우, 「한국양악사: '산유화'의 김성태」, 『주간조선』, 1981년 5월 31일자, 78/79쪽.
1) 가곡 (歌曲)이라는 용어는 본래 우리의 전통음악인 시조 (時調) 시에 관현악반주를 얹어 부르던 노래 (만년장환지곡)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국양악사에서 통용되는 의미, 즉 대략 1920년 이후 서양예술양식을 빌려와 발전된, (피아노)반주가 곁들여진 새로운 노래양식만을 지칭한다.
2) 진한 글씨체는 필자가 강조한 것임.
3) 김점덕, 『한국가곡사』, 32쪽.
4) 이상만, 「한국 예술가곡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가곡 어디에서 출발했나」, 79쪽.
5) 1993년 11월 23일에 개최된 한 음악회의 프로그램 노트에 실린 작곡가 자신의 작품해설 "나의 가곡"중에서
6) 이 작품은 슈베르트가 17세 되던 해 (1814년)에 작곡하였지만, 출판은 1821년 4월 30일에 작품번호 2번 (op. 2)을 붙여 성사된다 (이 작품의 도이취 번호는 118번이다). 작품번호 1번 (op. 1)을 달고 출판된 작품은 1815년에 작곡된 발라드 (Ballade) '마왕' (Erkönig)이다 (이 작품의 도이취 번호는 328번이다).
7) "예술가곡"의 발아는 이미 모차르트, 베토벤의 가곡, 랴이하르트와 춤스텍 등의 작품에서 싹터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슈베르트의 '실잣는 그레첸'을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언급하는 것은 슈베르트 사후 그의 리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18세기에 통용되던 '리트'의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용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8) 이상만, 「한국 예술가곡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가곡 어디에서 출발했나」, 『객석』 1984년 12월호, 77쪽 이하.
9) 위의 글, 78쪽.
10) 김점덕, 『한국가곡사』, 9쪽.
11) 김점덕, 「한국의 오늘의 음악. 한국가곡의 실상」, 『음악평론』 제1집 (1987년), 58쪽.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곡의 멜로디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콘체르탄트'의 멜로디가 유사하며, 이처럼 "봉선화가 독일 멜로디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어 "아이러니한 음악역사의 계승"이라 주장한다.
12) 성의정, 「한국예술가곡 무엇인 문제인가. 외국가곡과의 비교」, 『객석』 1984년 12월호, 75쪽 이하.
13) 『한국양악100년사』, 54쪽.
14) 김인식이 19세였던 1904년에 작사·작곡한 '학도가'는 『음악대사전』 ('김인식' 항목, 193쪽) 『파스칼 대백과사전』 (제5권, '김인식' 항목, 2724쪽) 등에서 "한국 근대가곡의 효시"로 기록되어 있다.
15) 이유선, 『한국양악 백년사』, 188-189쪽.
16) 이유선, 「양악의 유입과 일제 국권 침탈기의 음악활동. 제1장 시대적 배경과 양악의 유입」, 『한국음악총람』, 11/12쪽.
17) 황병덕, <가곡> 항목, 『파스칼 세계대백과사전』, 제1권, 18쪽.
18) 김형주, 「한국가곡사」, 『한국가곡전집』 (성음사: 1979), 21쪽 이하.
19) 위의 글, 29쪽.
20) 이정화,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본 한국예술사」, 『객석』 1989년 12월호, 212쪽 이하.
21) 당시의 노래들은 일반적으로 "가요"라는 용어를 썼던데 반해, 채동선은 "독창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22)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은 그의 작품번호 5번에서 8번까지, 각 번호당 2곡씩이며 작품번호 10번은 모두 4곡으로 구성되어 총 12곡이다. 그 중에서 본래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했던 곡은 모두 여덟 곡이며, 정지용이 월북한 후에 이은상 시와 모윤숙의 시로 대체된다. 이 여덟 곡은 다음과 같다.
1. '향수', op. 5/1 : 후에 '추억' (이은상 시)으로 바뀜
2. '압천', op. 5/2 : 후에 '동백꽃' (이은상 시)으로 바뀜
3. '고향', op. 6/1 : 후에 '그리워' (이은상 시)와 '망향' (박화목 시)로 바뀜
4. '산에 색시 들녘 사내', op. 6/2 (이 곡의 텍스트는 작곡가 자신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정지용의 시이다)
5. '다른 하늘', op. 7/1 : 후에 '그 창가에' (모윤숙 시)로 바뀜
6. '또 하나 다른 태양', op. 7/2 : 후에 '또 하나 다른 세계' (이은상 시)로 바뀜
7. '바다', op. 8/1 : 후에 '갈매기' (이은상 시)로 바뀜
8. '風浪夢', op. 10/1 : 후에 '동해' (이은상 시)로 바뀜.
23) 『한국가곡의 작곡학적 고찰』,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74년, 21쪽 이하.
24) 이 글은 『음악과 민족』 제6호 (1993년, 13쪽 이하)와 제7호 (1994년, 8쪽 이하)에 재수록되었다.
25) 위의 글 (1993), 27쪽.
26) 김점덕, 『한국가곡사』, 24쪽.
27) 신정숙, 『한국예술가곡에의 접근』, 서울대 음대 석사학위논문 (1981년), 9쪽.
28) 연가곡 '먼길'은 Gilbert G. Moyle의 詩를 텍스트로 하여 1. 그대에게 매인 나의 마음 (My spirit with thine enchained), 2. 모든 행복이 내것이라도 (If all the happiness that is were mine), 3. 잘 자오 (Good night), 4. 오! 복된 잠이여 (Oh! Blessed sleep)의 모두 네편이다. 작곡당시는 英詩에 곡을 붙여져 작곡된 해에 미국인 테너 해러드 스폴링 (Harold Spauling)에 의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챕맨대학 음악회에서 처음으로 演唱되었다. 이 작품은 1936년에 한국에서 출판되는데, 이때는 韓黑鷗 (세광)씨의 譯詩와 함께 다음과 같은 서언을 덧붙였다. "이 가요곡 (song cycle)은 내가 미국유학시에 특히 시인 길버트 모일의 聖時를 애독하여 작곡한 것입니다. 그의 시집 「먼길」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되는 시 네편을 뽑아서 「먼길」에 대한 나의 Inspiration을 작곡 표현한 것입니다. 이 가요곡은 1932년 6월 25일에 미국 라디오 방송사 수석 테너인 해럴드 스폴링 (Harold spauling)씨가 처음으로 노래했습니다. 그후, 1933년 11월 26일에 '엠씨 무어 작곡구락부' (M.C. Moore Manuscript club)에서 그리고 1934년 4월 20일에 Holywood에 있는 '트리아츠 구락부' (Three Arts club)음악회 등에서 推薦되어 불려진 노래입니다". 신정숙, 위의 글, 10쪽에서 재인용.
29) 구두회는 그의 논문, 「한국적 예술가곡의 창작을 위한 논리연구와 시도작품 분석」에서"한국인 작곡가가 한국인이 쓴 시와 혹은 외국인이 쓴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가사로 삼아 가곡을 쓰되 전적으로 서양음악의 음악소재와 작곡기법을 활용하여 작품을 완성하였을 경우와 외국인 작곡가가 한국인이 쓴 시를 자기네말로 번역하여 가사로 사용하여 우리 나라 특유의 음악소재들을 활용하여 가곡을 작곡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하는가? 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의 유명 아리아 (Aria)가 동양적 선율을 사용하고 일본의 생활양식과 풍습 및 문화들을 묘사·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음악이 아닌 이태리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위 질문에서 제기한 전자의 경우를 '한국적' 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한국예술가곡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 문제에 관한 한 저자에게는 소재와 기법의 국적을 떠나 우선은 그 작곡가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가 구분의 경계가 되는 셈이다. 이에 따르면 본 논의에서 언급된 김세형의 '먼길'은 그 텍스트가 외국인의 것이지만 '한국예술가곡'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30) 같은 곳.
31) 신정숙, 위의 글, 12쪽.
32) 이건용, <가곡>항목, 『브리태니카 세계대백과사전』, 제1권 (1992년), 15쪽.
33) 김점덕, 『한국가곡사』, 25쪽.
34) 김미애, 『한국예술가곡』, 21쪽.
35) 이상만, 위의 글, 77쪽.
36) Art. "Lied", in: Riemann-Musiklexikon, p. 522.
37) P. Jost, Art. "Lied", in: MGG2, Bd. 5 (1996), pp. 1259/1260.
38) Art. "Lied", in: Brockhaus Riemann Musiklexikon, p. 40.
39) ibid.
40) 18세기의 용어사용 관습에 있어서 '리트'라는 단어는 아주 드물게 그 모습이 보여졌다. (예술가곡의 의미에서의) 바소 콘티누오 (Basso continuo)를 반주로 하는 '솔로리트' (Sololied)는 일반적으로 '아리아' (Aria)라고 하였으며, 이 '아리아'의 토대를 이루는 텍스트의 형태가 동일한 운율 (Metrik)과 운 (韻)을 지닌 여러 '절' (Strophe)로 구성되면 '송가' (Ode)라고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 '아리아'의 개념은 오페라와 칸타타에 등장하는 3부 구성의 노래로 국한되고 이와 함께 문학적 개념인 '송가'는 동일한 종류의 유절구성을 지니고 단일 멜로디로 불려지는 모든 성악작품에 사용되었다.
41) 이것은 당대의 계몽주의 음악관에 입각한 저명한 음악이론가들인 마테죤 (Johann Matteson: 1681-1764), 마르푸르크 (Friedrich Wilhelm Marpurg: 1718-1759), 샤이베 (Johann Adolf Scheibe: 1798-1776) 등이 바하 (J. S. Bach: 1685-1750)의 대위기법적 음악을 비판하면서 나온 수사어들이다. 바하음악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비판은 특히 P. Cahn, Scheibes Kritik an Bach und das Ende des Barock, in: Funkkolleg Musikgeschichte. Europäische Musik vom 12. - 20. Jahrhundert. Studienbegleitbrief 5. Weinheim und Basel 1988, pp. 11 이하에 잘 정리되어 있다.
42) 음악은 이제 더 이상 교회나 궁정만의 점유물이 아니며 인간의 여흥과 오락을 위한 것이여야 했다. 각자의 마음에 드는 음악이라면 모두가 연주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장려되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음악 (문화)에 대한 향수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43)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논문, 「18세기의 음악개혁가, 텔레만에 대한 재조명」, 『낭만음악』 1994년 겨울호, 181쪽 이하 참조.
44) P. Jost, 위의 글, 1264쪽에서 재인용.
45) 김미영, 위의 글, 133쪽.
46) Kim, Mi-Young, Das Ideal der Einfachkeit im Lied von der Berliner Liederschule bis zu Brahms, Dissertation, Kassel 1995, p. 62에서 재인용.
47) P. Jost, 위의 글, 1290쪽.
48) 쓜쯔는 Ode (송가)의 작곡을 거부하였다. 송가의 운율과 내용이 자신이 생각하는 리트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9) 김미영, 위의 글, 133쪽.
50) Kim, Mi-Young, 위의 책, 63쪽 이하 참고.
51) 김미영, 위의 글, 135쪽. '낭만적' (romantic)이라는 용어가 산업혁명을 일찍 겪은 영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산업화로 인하여 농민들은 도시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은 곧 이어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되면서 그 이전에 가졌던 농촌에서의 소박했던 전원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52) K. H. Wörner, Robert Schumann, München 1949, p. 83에서 재인용.
53) 홍정수 (역), 「호프만」,『음악미학텍스트』, 한독음악학회편 (부산: 세종출판사, 1998년), 200쪽 이하.
54) C. Dahlhaus, Musikästhetische Paradigmen, in: Funk-Kolleg Musik, edited by G. Kadelbach, Bd. 2. Frankfurt am Main 1981, p. 25; idem, Klassische und Romantische Musikästhetik, Laaber 1988, pp. 94-95.
55) ibid.
56) C. Dahlhaus, "Dschinnistan" oder Das Reich der absoluten Musik: Romantische
Musiästhetik und Wiener Klassik, in: ders. Klassische und Romantische Musikästhetik,
Laaber 1988, p. 87.
57) 18세기의 음악관에 영향을 준 계몽주의 정신에 투철했던 괴테가 1808년 12월 3일자 훔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어만이 음악과는 반대로 이성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낭만주의 시인였던 베티나 폰 아르님은 1810년에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님이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어떤 신선한 언어의 지고한 요소를 격하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성이 더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음악뿐입니다".
58) C. Debryn, Vom Lied zum Kunstlied, p. 269. 여기에서는 Kim, Mi-Young, 위의 책, 138쪽에서 재인용.
59) H. G. Nägeli, Die Liederkunst, in: AmZ 19, 1817, Sp. 766. 여기에서는 P. Jost, 위의 글, 1265쪽에서 재인용.
60) M. Schneider, Franz Schubert mit Seb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Rowolt Taschenbuch Verlag, Hamburg 1958, p. 96.
61) H. W. Schwab, Sangbarkeit, Popularität und Kunstlied. Studien zu Lied und Liedästhetik der mittleren Goethezeit 1770-1814, Regensburg 1965, p. 137.
62) 이 용어는 1830년대부터 사용되었지만 1868년, Edouard Schuré에 의해 결정적으로 불란서 용어로 수용된다.
63) 이 용어는 1876년 영국에서 발간된 사전에 수록된다.
64) 김미영, 위의 글, 138쪽에서 재인용.
65) 위의 글, 138쪽.
66) 이러한 괴테의 태도는 훗날 변하게 된다. 1825년에 괴테는 자신의 시에 음악을 붙인 슈베르트의 리트 '마부 크로노스에게', '미뇽에게' (1815), '가니메트'를 소장하고 있었으며, 1830년 4월 24일에 당대 최고의 성악가중의 한사람인 빌헬미네 슈뢰더 데브리앙 (Wilhelmine Schröder-Devrient)이 부르는 '마왕'을 듣고 완전히 매료된다. 그 이전에 보여줬던 냉담함이 자신의 '마왕'에서 표현된 단순함과 소박함이 슈베르트에 의해 환각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에 기인한다면, 이 음악회를 계기로 괴테는 슈베르트에게 영광의 찬사를 바치게 된다.
67) A. Edler, Schumann und seine Zeit, Laaber 1982, p. 212에서 재인용.
68) A. Edler, op. cit., p. 219.
69) S. Grossmann-Vendrey, "VII. Teil. Das 19. Jahrhundert", in: Karl H. Wörner. Geschichte der Musik, 8. Auflage, Göttingen 1993, pp. 442.
70) 당시에 창가라는 용어는 가곡과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1915년 윤치호가 경영하는 개성의 '한영서원'에서 발행된 창가집의 서문에서 알 수 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정신에 있다. 국민의 정신을 感發시키는 것은 가곡이 으뜸이다. 그런 고로 歐米諸國에 있어서는 巨擘의 시인, 음악가의 미묘한 시조 및 가곡으로써 국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우리 海東의 조국은 古來 가곡이 없지 않았으나 그 뜻이 대개 淫蕩放逸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卽 我 大韓 志士 仁人이 다 같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다. 然이나 現時 유식한 저작에 의한 미묘한 가곡이 적지 않다고 생각되나 각처에 散在하여 통일된 것이 없다. 이에 同志 서로 參詣하여 현재 諸大家의 가곡 有餘種을 수집 편찬하고 이름지어 창가집이라 한다 [...]". 민경찬, 『한국창가의 색인과 해제』, 70쪽에서 재인용.
71) 민경찬, 「시대별로 살펴본 한국 가곡 60년사」, 『음악동아』 1985년 9월호, 246쪽 참조.
72) 이상근, 위의 글 (2), 9/10쪽.
[저자소개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 (피아노 전공)음악학사(BM)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음악학 석사(MA)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음악학 박사(Ph. D)
서울대, 한양대, 성신여대, 경원대 등 출강
한세대학교 부교수, 음악학부장 및 음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