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과 수선화[시인 김동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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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울타리는 낯선 객도 아랑곳없이 저 홀로 청청하다. 사립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텅 빈 마당에 들어서서 장지문 밖 토방 위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곁눈질하며 아무리 주인을 불러도 종내 기척이 없다. 오래된 흙벽 위로 시멘트를 발라놓은 단칸 누옥은 그저 잠잠하고,헛간 벽에 매달린 연주황 감줄기가 그마나 집주인의 가난한 행색을 막아서듯 오연하다. 진눈개비 날리는 길을 달려 대관령을 넘어서니 태백산맥 동쪽은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세상의 풍진은 남의 것인양 계절을 거부하는 따사로운 양광이 잔잔하게 산야에 스며든다.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노동하리 54번지. 정열과 의분과 선비정신으로 한 세상 살다간 초허 김동명 시인(1900∼1968)이 태를 묻었던 생가는 아늑하고 잔잔한 대기 속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다. 생전의 시인이 걸었던 정열과 지조를 침묵으로 웅변할 따름이다. 그가 남기고 간 시편들에 붙여진 가곡 「수선화」가 자꾸 귓가를 맴도는데 그 고독과 정열의 흔적이 세월의 풍진 위에 시멘트를 바른 흙벽 속에서 석류알 벙글듯 딱딱한 거죽을 깨뜨리고 금방 노래 가락으로 터져나올 것만 같다.
김동명은 이곳에서 태어나 서당을 다니다가 1908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원산으로 개화된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나기까지 시인의 원형질을 배양했다. 집 앞으로 나지막히 흘러가는 새끼 산맥들과 들판,뒤편으로 푸른 동해바다를 거느린 아늑한 곳이다. 거친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겉보기에 그냥 평화롭기는 하지만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던 김씨의 선조중 어느 한 분이 당쟁과 분란을 피해 숨어든 「세상 바깥」이었다. 시인의 대에 이르러 세상 바깥에서 다시 세상 속으로 탈향을 도모했으니 이곳은 유토피아를 닮은 시인 정서의 원형질을 간직한 곳일 뿐이다.
김동명의 「탈향」은 오래도록 정체된 생활과의 단절이라는 의미와 비바람 몰아치는 시대의 광야로 나서서 격동의 삶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의미심장한 기점이었다.
원산에서 소학교를 졸업했고 다시 함흥 영생중학교를 거쳐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리 동진소학교와 평안남도 강서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1922년 무렵부터 김동명은 뒤늦게 문학에 눈이 뜨이게 된다. 1923년 다시 원산으로 돌아가 「개벽」지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과 「나는 보고 섰노라」「애닯은 기억」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 시기의 시작들이란 습작품 수준이었고 그가 본격적으로 시창작에 몰입한 것은 1925년 도일,청산학원 신학과 수학시절부터로 기록된다. 1930년 1백32편의 시를 수록한 첫시집 「나의 거문고」를 펴냈고,지금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오래 기억되는 「파초」를 표제시로 수록한 시집은 그로부터 6년 뒤에 출간했다. 일제의 엄혹한 우리 글 탄압의 시기에 기개가 꼿꼿한 김동명이 유일하게 일제에 저항할 수 있었던 수단은 우리의 말과 글로 우리의 생각을 담아내는 문학이라는 도구였다는 게 평자들의 한결같은 시각이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파초」 전문)
남국을 떠난 화초의 외로움을 조국을 잃어버린 식민지적 상황에 비유한 이 작품은 애틋한 민족적 향수를 정열의 여인에 비기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한낱 그 조국의 종이고자 하는 투지를 보여준다. 그가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절의 함경남도 서호의 그의 집은 동해가 멀리 바라보이는 나즈막한 야산 솔밭 속의 외딴집이었다. 그집의 뜨락은 김동명의 남부럽지 않은 영지였으며 화단의 꽃들과 소나무,무궁화나무,사과나무,복숭아나무,오동나무 등은 그 영지의 한가로운 주민들이었다. 이 시절에 후일 유명한 가곡이 된 「수선화」 또한 창작된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날으는 / 애달픈 마음. //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 가여운 넋은 아닐까. // 부칠곳 없는 정열을 / 가슴 깊이 감추이고 / 찬 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 불멸의 소곡. // 또한 나의 적은 애인이니 / 아아,내 사랑 수선화야 /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수선화」 전문)
해방공간의 함남에서 조선민주당 당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혼돈의 극치를 이룬 소련의 협잡질에 혈기를 참지 못하고 목숨을 걸고 3·8선을 월남,이승만 정권에서는 또다시 독재에 항거하는 정열적인 글을 발표하며 지사로 살았던 김동명. 4·19공간에서는 급기야 참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 일선에도 뛰어들었지만 5·16으로 그 시절은 짧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의 야망과 정열을 빌미로 후일 평자들은 「파초」와 「수선화」를 쓸 수밖에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한 시기를 가장 문학적으로 찬연한 시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후로 「하늘」(1947) 「삼팔선」(1947) 「진주만」(1953) 「목격자」(1957) 등 모두 6권에 이르는 시집을 더 내지만 초기 시집이 김동명의 시인다운 문학적 정수를 보여주는 핵심이다.
강릉시에서 주문진 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시계를 막 벗어난 곳 동해바다쪽으로 우뚝 솟은 시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김동명의 시업을 기리는 시비가 바로 그것이거니와 시인의 두상을 부조로 조각한 시비 아랫부분은 아침 햇볕 속에서 부릅뜬 두 눈과 강팍한 의지의 시인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시비동산 입구에는 해당화 열매가 빨갛게 가시에 뒤덮여서 타고 있다. 겨울 수선화와 파초의 정열과 고독 대신 해당화의 붉은 마음이 시인이 가고 없는 동해안가를 홀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수선화」와 더불어 우리 귀에 익숙한,노래가 된 또 하나의 명시가 그 시비 앙옆에 「파초」와 함께 나란히 새겨져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 / 그대 저어 오오 /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 안고,옥같이 /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 내 마음은 촉불이오 / 그대 저 문을 닫어주오 /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고요히 /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 내 마음은 나그네요 /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 나는 달 아래에 귀를 기울이며,호젓이 /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 내 마음은 낙엽이오 /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외로이 / 그대를 떠나리다』
1996-12-01 세계일보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