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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시인 조병화씨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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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한 원로시인 조병화(趙炳華)씨가 8일 오후 8시 55분 경희의료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82세.
경기도 안성 출신인 조씨는 경성사범학교와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를 나와 경희대, 인하대 교수를 역임했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문단에등단했으며, 지금까지 모두 51권의 책을 냈다.
빈소는 경희의료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2일 오전.
(연합뉴스)2003년 3월 9일

- 중앙일보 관련기사 -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고독이 전율처럼 지나갑니다./무료한 시간이 무섭게 흘러갑니다./시간의 적막 속에서/속수무책, 온몸이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아, 이 공포,/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고독이 전율처럼 머물고 있습니다.// 그럼."

보통의 우리 삶을 기다림과 고독, 낭만과 사랑으로 노래하며 한 해 한 권 꼴로 신작 시집만 무려 52권을 펴내던 조병화(趙炳華) 시인이 마지막 시 구절로 '그럼'을 남기고 잠들었다. 趙씨는 자신의 시집을 '숙(宿)'이라 했다. 그는 무릇 시는 '영혼이 잠자는 집'이라며 현실은 현실대로 시는 시대로 따로 살다 간, 강팍했던 우리 시대 보기 드문 낭만.순수 시인이었다.

부음을 듣고 부랴부랴 빈소를 찾은 이근배 한국현대시인협회장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를 잃어 막막하다.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 처럼 누가 읽어도 이게 시구나라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인을 빼앗겼으니 이제 시는 점점 더 꼬이고 어려워지겠구나"하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1월 8일 입원 이후 줄곧 병실을 지켜온 고인의 '수제자' 김삼주 시인은 "'하늘엔 별, 땅엔 꽃, 사람엔 시'라며 시를 별과 같이 지키는 시인들을 위해 나머지 재산을 다 쓰라 하며 눈을 감으셨다"며 "현실주의.상업주의 시대지만 많은 시인이 선생님의 뜻에 따라 시의 순수성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여름 가고/가을 가고/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 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추억'전문)

학창 시절 누구나 한번 아련히 빠져들었을 위 시와 같이 趙씨의 시는 쉬워 그대로 노래가 될 수 있다. 시적 미학이나 현실성을 강조해 난해하거나 팍팍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슴 가득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게 반세기 이상 그의 시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경성사범을 수석으로 입학한 준재인 그는 평탄한 삶을 유복하게 살았으면서도 시 자체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 그리움이 고독을 낳고 허무를 낳는다.

고독과 허무를 노래하면서도 고뇌에 찬 어두운 그림자는 찾을 수 없어 趙씨의 시들은 환한 꽃 그림자다. 현실에서는 결코 순하게 합해질 수 없는 꿈과 그리움과 사랑이지만 인간이란 결코 그런 가치와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다며 시와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집.에세이집 등을 합쳐 총 1백30여권의 저서를 펴내, 꽤 되는 인세 수입을 모두 털어 자신의 호를 딴 편운(片雲)문학상을 만들었다. 벌써 12회째 후배 시인.평론가들의 순수문학 혼을 격려하고 있다. 학창시절 자신도 장학금으로 공부했으니 문인 장학금으로 내놓겠다며 그의 저작권과 사재 모두를 순수문학의 제단에 바치고 갔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장남 진형(眞衡.세종대 대학원장)씨와 장녀 원(媛.의사).차녀 양(洋.음악가).3녀 영(泳.화가)씨가 있다. 발인은 12일 오전 9시. 고인의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경기도 안성 난실리 선영. 02-958-9545.

중앙일보 2003-03-09

- 한겨레신문 관련기사 -

지난 8일 타계한 조병화 시인은 쉽고 평이한 어조에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시를 선보여 왔다. 거창한 사회적 메시지나 형식 실험을 배제한 채, 자신의 일상사에서 우러난 개인적 감정과 철학을 그만의 소박한 틀에 담아 빚어낸 그의 시세계에는 ‘인생파’라는 이름이 어울릴 법하다. 편지를 쓰듯 혹은 일기를 쓰듯 쓰여진 그의 시들은 별다른 문학적 훈련 없이도 이해 가능한 성격의 것들이었다. 그가 생전에 50권 넘는 엄청난 분량의 시를 쓰고 대중 독자들이 그의 시를 애송한 데에는 ‘평이성’과 ‘보편성’이라는 비밀이 숨어 있는 셈이었다.
1949년에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내면서 등단한 조 시인은 전쟁과 그 직후의 폐허 속에서 문학적 삶의 초기를 보냈음에도 비교적 발랄하고 경쾌한 시풍을 선보였다. 그는 명동과 관철동의 술집에서는 김수영, 박인환, 김기림 등과 어울렸지만, 시에서는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만의 세계를 고수했다. 그가 고독과 허무와 절망을 노래할 때도 거기에는 사회니 역사니 하는 따위의 얼룩이 끼여들 틈은 없었고, 그 때문에 시풍은 자못 화사하기까지 했다.

‘바다엔/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허무한 희망에/몹시도 쓸쓸해지면/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해와 달이 지나갈수록/소라의 꿈도/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큰 바다 기슭엔/온종일/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소라〉 전문)

친근한 어조와 입에 감기는 가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감정과 교훈을 담은 그의 시들은 노래로 만들어지거나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많은 독자를 만났다.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추억〉 부분)

‘지금 어디메쯤/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그분을 위하여/묵은 의자를 비워드리지요.’(〈의자 7〉 부분)

한쪽에서는 그의 시를 두고 ‘너무 쉽게 쓰여진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자신은 ‘시를 산다’는 말로 시와 삶이 혼연일체가 된 상태를 자부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가 시를 쓰고 또 사는 것은 스스로를 비워 내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쓰는 건/나를 버리기 위해서다/나를 떠나기 위해서다/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내가 시를 쓰는 건〉중에서)

한겨레 200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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