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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나의인생 나의신앙] 성악가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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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목소리는 일평생 나에게 큰 자산이 됐다.아무 재능도 가진 것 없는 한 소년을 성악가로 세우시고 목소리를 통해 쓰임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움과 감사함 그 자체였다.나는 평생을 예수님 덕분에 살아온 사람이다. 193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나는 1945년 1월부터 서울에서 생활했다.그리고 중학교 시절 6·25전쟁이 일어나 어려운 시절을 맞았다.우리 가족은 피란을 가면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믿음이 좋은 어머니는 나와 헤어지면서도 주일성수를 끊임없이 강조하셨다.나는 만삭이 된 큰누나와 단 둘이서 대구 반야월이라는 마을에서 칩거하며 피란생활을 했다.

1951년 2월,먹고 살기 위해 나는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다행히 동촌비행장이라는 임시비행장에서 활주로를 깔고 닦는 일을 얻을 수 있었다.못 먹고 헐벗은 나는 추위를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비행장에서 일하던 나는 기중기를 운전하는 토머스라는 상사의 눈에 띄어 조수석에서 그를 돕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밖이 아닌 따뜻한 기중기 안에서 일할 수 있게 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기중기에 올라 조수석에서 토머스 상사를 거드는 일이란 별 일이 아니었다.어느날 나는 여러 연장이 들어 있는 스페어 상자를 아래에서 올려 받은 뒤 무심코 가열된 배터리 위에 올려놓았다.순간 기중기 안이 터졌고 나는 무조건 밖으로 뛰어내렸다.밖에 있던 사람이 나를 받자마자 불에 탄 바지를 벗겼다.배꼽까지 3도 화상을 입은 나는 난생 처음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했다.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한 나는 미군들의 위문을 받으며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다리의 화상으로 고생스럽긴 했지만 코 큰 미국인들이 초콜릿과 소시지 등 레이션박스를 가지고 위문을 와서 함께 입원한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퇴원한 뒤 우리 가족은 부산에서 함께 살게 됐다.아버지와 어머니,남동생 둘과 여동생,누나와 그 아기 등 모두 여덟 식구였다.그곳에서 우리는 드럼통에 물을 길어와 동네사람들에게 파는 물장사를 하면서 생활했다.물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돕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창피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혹시 길을 가다 내가 좋아하는 여학생과 마주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사실 남부민교회에서 고등부 음악부장을 하던 나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고등부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뛰어난 음악성을 발휘했다.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지휘를 하면서는 나보다 나이 많은 형과 누나들을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나는 1주일 내내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 등 4파트의 음을 모두 계이름으로 외워 능숙하게 지도했기 때문에 나이 많은 형과 누나들도 잘 따라 주었다.
나의 음악성은 초등학교 때부터 빛을 보였다.4학년 때 보이 소프라노로 ‘누나 생각’을 불러 콩쿠르에서 1등을 하는 등 노래를 잘 불러 유성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남부민교회에서의 지휘 이후 나는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하나님께서 모세를 선지자로 세우기 위해 많은 훈련을 시키신 것처럼 나를 음악가로 만드시기 위해 어려서부터 훈련시킨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3도 화상을 입고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한 사건 외에도 고등학교 때 두번의 큰 사건은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그중 하나는 56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어났다. 우리 집은 물장사 외에도 개를 키워 팔면서 생활을 유지했다.아침마다 먹이를 주고 산책과 간단한 훈련을 시키는 것은 내 일이었다.여러 종류의 개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진도개에 해당하는 일본산 아키다가 특히 사나웠다.어찌나 사나운지 먹이를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주둥이에 사슬을 매었다.
어느날 아침 먹이를 주기 위해 입에 매인 사슬을 풀어준 나는 마당에 있는 빗자루로 그 개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어차피 기둥에 끈으로 묶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약을 올려도 나에게 다가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놓고 장난을 쳤다.화가난 개는 으르렁거리며 몸부림쳤다.순간 기둥에 묶인 사슬이 끊어지더니 개는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물기 위해 달려들었다.
나는 정신이 바짝 들어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부엌에 들어간 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하지만 미처 오른발을 안으로 들이지 못해 그만 발 뒤꿈치를 물리고 말았다.마침 그날은 교련이 든 날이어서 워커를 신었으니 다행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살점이 떨어지거나 인대가 끊어지고 뼈까지도 손상됐을 것이다.
또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 즈음 페니실린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나는 페니실린을 구해 발에 발랐다.그리고 며칠 뒤 개에게 물린 발은 깨끗이 나았다.병원에 가지도 않고 집에서 손쉽게 약을 구해 치료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사하다.
두번째 사건은 그 다음해에 일어났다.그해 8월은 사라호 태풍이 불어닥쳤다.하필이면 그 때 나는 장티푸스를 앓고 있었다.찬바람만 쐬어도,찬물만 닿아도 죽는다는 열병에 걸려 1주일 내내 방에 누워지내야만 했다.
어느날 혼자서 방에 누워 있는데 그만 비바람에 지붕이 날아가버렸다.부실하게 지은 집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열병으로 누워있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황당한 일이었다.그대로 비바람을 맞고 있을 수 없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아간 지붕을 대충 다시 얹어 놓았다.그 다음날 나는 열이 펄펄 올라 무척 고생했다.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별 탈 없이 병이 나은 것이 기적이었다.
이렇듯 3번의 큰 사건을 겪은 뒤로는 지금까지 60평생 큰 병을 앓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다리에 화상이 남고 발 뒷꿈치에 개에게 물린 하얀 상처가 희미하게 있을 뿐 건강하게 지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몸과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 뒤 나의 음악 인생에서 더없이 중요한 바탕이 됐다.특히 내 목소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감사할 뿐이다.나는 성대를 아끼기 위해 굳이 말을 적게 하거나 음식을 가리지 않고도 지금까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다.더구나 호흡이 곧 소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호흡법과 발성법을 익힌 뒤부터는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무리없이 노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성악가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노래를 잘 하기는 했지만 음악을 전공하거나 평생 노래만을 하고 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음악가로 예정하시고 많은 훈련을 통해 성장하도록 해주셨다.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고등부 성가대를 지휘하며 음악성을 발휘했지만 나는 공부도 곧잘 했다.특히 영어를 잘해 외교관이 되는 꿈을 꾸었다.또한 최남선의 독립선언문을 줄줄 외우고 처용가 관동별곡 등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국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부산남고등학교 1회 졸업생인 나는 3년 개근상을 받을 정도로 학교에 열심히 다녔다. 졸업할 즈음 집안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 대학에 들어가기가 힘들어졌다.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대학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나는 무작정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왔다.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음악으로만 가능했다.나는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성가대를 지휘하고 받은 사례비로 생활했다.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대학에 가라고 권하기 시작했다.당시만 해도 음악대학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주위의 권고를 그저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던 중 음악으로 먹고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당시 경희대에 다니던 반주자가 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음악대학에 가려면 레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등록금도 없던 나에게 레슨비가 있을 리 없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60년 2월,입학시험을 한달 앞두고 레슨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바리톤 오현명선생이 이화여고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오선생은 대뜸 “자네 콩코네(Concone·가창을 위한 연습 교본)가 뭔지 아나”라고 물었다.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모르겠다고 했더니 웃음을 보이시며 50개의 콩코네 악보가 들어있는 책을 주고 그 중 하나를 부르라고 했다.음대 시험은 50개 중 25번까지만 연습하면 되는 것이었다.나는 당김음이 많은 어려운 곡을 즉석에서 불렀다.내 노래를 듣고 나서 오선생은 음악성이 좋다며 소개서를 써 주었다.테너 김학상선생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소개서 하나를 달랑 들고 김학상선생을 찾아 갔다.당시 서울 음대 정원이 15명 뿐이었는데 김선생 댁에 가보니 현관에 신발이 20켤레가 넘었다.음악대학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그때까지도 음악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과 열정이 없었던 나는 순간 꼭 붙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하나님,저를 음악대학에 꼭 합격시켜 주세요.그러면 평생 교회에서 음악으로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김학상선생은 소개서를 보더니 노래 하나를 불러보라고 했다.나는 내가 알고 있는 노래 중 가장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이태리 가곡 ‘니나’를 불렀다.“5년 전부터 그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네.다른 노래는 없나”이번에는 애창곡집에서 ‘솔베이지의 노래’를 찾아 불러 보겠다고 했다.찬송가도 높아서 못 부르던 나에게는 베이스가 적당했지만 그 노래가 하이 소프라노 아리아인 것도 모르고 부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김선생과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김선생은 “이 친구 아무 것도 모르는군.정 레슨을 받고 싶다면 해주겠지만 합격은 장담 못하네” 그해 3월3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입학시험을 보았다.시창에서 만점을 받자 김학상선생은 놀란 표정을 지으시며 그래도 합격은 두고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며칠 뒤 신문에 나온 합격자 발표를 보고 뛸 듯이 기뻤다.남들보다 3년이나 늦은 나이인 스물두살에 드디어 대학에 입학한 것이었다.그것도 한달 레슨을 받고 당당히 서울대 음대에 합격을 하고 나니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그 이후 나는 공부해야 산다는 생각만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명동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오델로 공연에 합창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그곳에서 나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당시 이아고의 부인역을 맡은 언니(오순자)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극장에 온 아내(오민자)가 내 눈에 띈 것이었다.아내는 아버지가 일찍 별세해 어머니가 홀로 고려대 뒤편인 평동에서 하숙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4·19를 혁명으로 인정한 박정희 정부가 4·19 추모음악회를 열었고 나는 과대표로 음악회에서 노래 2곡을 불렀다.나는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음악회에 꼭 참석하라고 일렀다.음악회가 끝나고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내는 나에게 잘했다 못했다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집 대문에 도착하고나서야 아내는 “자기,성악 그만 둬”라고 말했다.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지금 같으면 화를 내거나 부인했을 텐데 당시는 연애 초기여서 그랬는지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다.“그럼,나 뭐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처럼 절박했다.“지휘 공부 해라” 그런데 웬일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오기가 들기 시작했다.그 때부터 나는 아내에게 잘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성악 공부에 매달렸다.
나의 첫 연주 실패담은 이렇게 끝났다.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제대로 성악공부를 했다고 할 수 없었다.타고난 목소리 하나로 대학에 입학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나는 지난 시절의 게으름을 반성하고 열심히 노래를 연습했다.그 당시에는 아내의 말이 야속했지만 지나고 보니 아내의 그 말 덕분에 분발,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대학교 4학년 때 아내와 결혼했다.그리고 67년 5월 영락교회 합창대원으로 들어갔다.당시 영락교회에는 1부 성가대가 없었는데 서울대 음대 졸업생이 합창대원으로 들어오자 그해 9월 임마누엘 성가대가 창단되고 나를 지휘자로 임명했다.주위에서는 어디 한달이나 버티나 두고보자는 말이 나왔다.나는 새벽 6시까지 교회에 나가 열심히 연습했다.임마누엘 성가대는 한달 두달 세달 그리고 네달을 거뜬히 넘기더니 급기야 해를 넘겨서까지 건재했다.그 이후 나는 27년 동안 영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 시절은 나의 음악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당시만 해도 찬송가도 높아서 못하던 나는 매주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 4파트를 연습하면서 목소리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했다.그 이후 나의 음역은 베이스에서 바리톤으로 올라 비로소 참다운 내 목소리를 얻은 셈이었다.
나의 음악 인생도 그 때부터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자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서울시립오페라단 등에서 바리톤 주역으로 활동하며 토스카 아이다 리골레토 등 90여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68년 김자경오페라단이 창단됐다.67년부터 신일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지내던 나는 어느날 나보다 못하던 사람들이 김자경오페라단에서 활동하며 유명해지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나는 무작정 오페라단을 찾아가 활동하게 해달라고 말했다.김자경선생은 나를 보더니 “치호 너,합창 지휘자로 전향했다면서”라고 물었다.교회 성가대 지휘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배역이 없으면 합창이라도 시켜달라고 말했다.


김자경오페라단에서 활동하게 된 나는 오페라 아이다의 합창단원으로 연습을 시작했다.에티오피아와 이집트가 전쟁을 하는 내용이어서 병사들로 이루어진 80여명의 합창단이 필요했다.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30여명밖에 모이지 않았다.지휘자는 이 인원으로는 합창을 할 수 없다며 지휘를 거부했다. 김자경선생은 지휘자가 비어 곤란을 겪게 되자 나에게 지휘하라고 일렀다.나는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열심히 지휘를 해서 인정을 받았다.공교롭게도 람피스역(이집트 제사장)까지 비어 나에게 배역이 주어졌고 나는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통해 인정을 받기 시작한 나는 그후 3년 동안 김자경오페라단에서,71년부터는 국립오페라단에서 활동하는 등 왕성한 음악여정을 보냈다.
성악가로서 루치아노 파바로티나 호세 카레라스처럼 음악만을 하면서 생활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우리나라의 여건상 음악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그래서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교수가 되려고 애쓴다.지금이야 디너쇼,CF 등으로 가외수입을 얻는 일이 흔해졌지만 80년 초만 해도 이러한 일들은 파격이었다.교직에 몸담고 있는 음악가가 상업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클래식 음악가라고 해서 고상한 체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디너쇼든 CF든 어차피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하는 것이라면 상관없는 일 아닌가.80년 내가 커피 CF에 출연한 일은 클래식 음악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로 그 당시 클래식 음악계에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80년 1월4일,전화가 걸려왔다.제일기획이라는 광고회사였다.전화를 받은 아내는 순간적으로 CF가 제의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나에게 전화를 바꿔주더니 팬티나 술 광고 외에는 무엇이든 하라고 일렀다.전화를 받았더니 아니나 다를까,CF에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순간 기쁜 와중에도 왜 하필 나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품격있는 커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클래식 음악가를 선택했으며 특히 주부를 대상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주부에게 선호도가 가장 높은 내가 해당된다는 것이었다.당시 40대 초반의 나이에 잘나가는 음악가였으니 주부들에게 어필할 만도 했다.
CF는 1년 계약으로 이루어졌다.개런티로 얼마를 줬으면 좋겠냐고 물었다.나는 당시 1천만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1천만원을 달라고 했고 계약은 순조롭게 끝났다.결국 돈을 꾸지 않고도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매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다.
커피 CF가 나간 이후 이곳저곳에서 CF 제의가 들어왔고 당시 KBS 청소년 음악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에서도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왔다.CF는 너무 많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나가지 않았지만 ‘젊음의 행진’에는 출연했다.짧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떠나가는 배’를 불렀다.이렇듯 나는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대중화의 길을 연 선구자 역할을 한 셈이었다.
지금이야 열린 음악회에 클래식 음악가들이 많이 출연하고 테너 박인수씨와 가수 이동원씨가 ‘고향’을 듀엣으로 부르는 등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가 예사로운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충분히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었다.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느껴진다.


나는 성악가로 활동하는 외에도 중·고교,대학교,문화센터 등에서 강의하고 CF에도 출연 등 많은 활동을 해왔다.음악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뒤 중·고교 교사를 거쳐 대학강사,교수 등 교직생활을 했고 91년부터는 각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가곡을 가르쳤다.음악에의 사랑과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내 인생의 또 다른 축은 교회에서의 봉사활동이다.영락교회에서 27년,명진교회에서 8년 등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찬송 인도에서부터 성가대 지휘까지 하려면 40∼50분 내내 노래를 불러야 할 때도 많았다.어떤 때는 목이 아프기도 하고 힘이 들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이를 통해 더 큰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성악 초기에 베이스를 담당했다.처음엔 찬송가도 너무 높아 부르지 못했다.하지만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 등 각 음역을 넘나들며 노래를 부르다보니 어느새 고음을 정복하게 됐다.그 뒤부터는 음역이 넓어져 지금의 바리톤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97년부터는 신일교회 서울국제예능원에서 예능교수단 자원봉사자로 일주일에 한번씩 장애인들을 가르치고 있다.어느날 기독교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예능원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듣고 곧바로 연락한 것이 계기가 됐다.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어느 성악가 못지 않게 아름답다.나는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일을 가장 큰 보람으로 삼고 있다.
내 가족에게 있어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아내와 아내의 가족들이 나를 통해 모두 전도되도록 역사하시고 대를 이어 성악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아들에게 재능을 주신 일이다.아내는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 손에 자랐다.내가 성가대 지휘하는 것을 자주 봐온 아내는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됐고 아내를 통해 아내의 가족 모두가 신앙인으로 거듭났다.
아들은 서울대 음대를 나와 미국 보스턴대학교 대학원과 미국 커티스음악원에서 공부한 뒤 현재는 뉴욕시티오페라단에서 활동하고 있다.신영옥씨와 홍혜경씨를 이어 한국 남성으로는 최초로 입단한 것이다.나는 아들에게도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봉사활동을 하라고 항상 강조한다.아들은 음대를 다닐 때 영락교회에서 중등부 성가대를 지휘했고 미국에서도 가까운 교회에서 조건없이 봉사하도록 일러 무보수로 지휘를 하고 있다.
내 인생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이끌어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시고,한달동안의 레슨으로도 서울대음대에 합격하도록 해 주시고,유학 한번 다녀오지 않고도 성악가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성악에 있어 지금까지 깨우친 모든 것을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이론과 형식에 치우친 현실에서 벗어나 호흡법과 발성법의 일원화에 바탕한 효과적인 강의를 하고 싶다.또 한가지는 돈이 없는 성악 지망생들을 모아 무료로 가르치는 일이다.목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내가 하나님의 역사로 성악가로 쓰임 받고 있듯 더 많은 사람들로하여금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고 싶다.

◇약력 △1938년 일본 도쿄 △1966년 서울대음대 졸업 △KBS합창단,김자경오페라단,국립오페라단,서울시립오페라단 등서 활동.90여편의 오페라 출연 △1991년∼ 명지대 사회교육원 객원교수 △서울 명진교회 장로

이 글은 국민일보(이준희 기자)2000년 2월 11일 부터 18일 사이의 연재기사 "나의 인생 나의 신앙" 윤치호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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