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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아, 윤용하! 순백의 예술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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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윤용하 형의 40주기가 되는 해다. 벌써 40주기가 되었나 싶게 세월은 화살처럼 흘렀다. 용하 형을 그리워하고 그의 음악과 인생역정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40주기를 그대로 지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급히 필자를 회장으로 하는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정부에 문화훈장 추서를 건의하는 한편 추모음악회도 준비했다. 고맙게도 정부에서는 보관문화훈장의 추서를 결정해 주었고, 추모음악회도 '늘 금 밖에 섰던 남자 윤용하 - 보리밭의 추억'이라는 주제를 걸고 내일(26일) 저녁 호암아트홀에서 열리게 되었다.많은 사람이, 특히 용하 형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으레 보리밭을 떠올린다. 그의 대표적인 가곡 '보리밭'이 우리 국민 누구나 사랑하는 국민가곡이 된 지 오래됐다. 이 가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란 수도 부산에서 박화목 선생의 노랫말에 곡을 붙여 태어났다.

전란으로 인해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우리네 마음을 푸근하게 적셔주어야겠다는 두 사람의 뜻이 투합하여 만들어졌다. 용하 형의 작품 영역은 넓고 다양하다. 가곡뿐만 아니라 오페라 오페레타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동요가 두드러진다. 그는 광복 전 20세 전후에 이미 오페라 '조선의 사계'를 작곡했고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의 고전이 된 '나뭇잎배' '노래는 즐겁다' 등 수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또한 지금도 우리들이 부르고 있는 '광복절 노래'를 비롯하여 '민족의 노래' 등 많은 국민가요를 작곡했다.

용하 형은 광복과 전란 기간 중에 지치고 메마른 우리 국민의 정서를 위로하고 순화시키기 위해 음악활동을 펼쳤다. 그는 특히 어린이들이 전란 속에서도 즐겁고 밝게 자라려면 아름답고 씩씩한 노래들을 많이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 이후 그는 서울 중앙방송 어린이 시간의 전속 작곡가 노릇을 했다.

용하 그의 삶 자체가 음악이고 예술이었다. 그는 어떤 가식이나 타협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천형(天刑)처럼 둘러메고 살다가 그 가난을 깔고 누워 세상을 등졌다.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술로써 저항하고 술로써 풀어보려 했다. 그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늘 금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우리는 용하의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불꽃 같은 순수예술혼을 그리워한다.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던 집이나 악기를 가져보지 못했으면서도 창작열에 들떠 살면서 타협을 모르고 곧은 길을 걸어간 그의 고집에 경의를 보낸다. 허기진 배를 술로 채우며 일으켰던 수많은 소동과 실수에 따듯한 연민의 미소를 보낸다.

우리는 용하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의 생전은 물론이고 그가 세상을 등진 지난 40년 동안 빚 갚을 생각을 못했다. 이제 정부가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추모음악회도 열리게 되었다. 이 보잘것없고 때늦은 보은이 용하 형의 영혼에 위안이 되기를 빌어본다. 용하 형의 40주기 행사를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오현명 윤용하기념사업회 회장·성악가·전 한양대 음대 학장 

[중앙일보]2005-10-25 40판 A29면 2071자
1 Comments
강하라 2006.03.15 13:59  
  요즘 'kbs음악실'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윤용하 작곡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글을 보니 또 새로움을 느끼네요
오늘은 어린이 명절, 세발자전거라는 동요를 틀어줬는데--
전쟁시에도 어린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가곡이 존재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이런 음악회가 있다면 꼭! 반드시 가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