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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동요시인 윤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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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의 주요 일간지나 아동 잡지를 뒤적거려 보면 그 이름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요 시인 윤복진(尹福鎭, 1907-1991)이다. 일제 시대에는 윤복진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어린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노래는 사랑을 받았으리라 짐작되는데, 지금은 윤복진이라는 이름을 아는 어린이들이 하나도 없을 듯하다. 그가 월북 시인인 탓이다. 겨레가 둘로 나뉘면서 아동문학에서조차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 세기 가량 지속되어 온 것이다.

  봉사나무 씨 하나
  꽃밭에 묻고

  하루 해도 다 못 가
  파내 보지요,

  아침결에 묻은 걸
  파내 보지요.(〈봉사나무〉, 전문)

  나라를 잃어 어두웠던 시절 한 줄기 햇살처럼 퍼져 나가며 온 겨레 어린이들이 함께 부르고 즐겨했을 그의 작품들에 분단체제가 드리운 이데올로기의 검은 장막을 이제는 말끔히 거두어 들여야 할 때가 아니겠는지?

  윤복진은 1907년 1월 9일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9월 《어린이》지에 〈별 따러 가세〉가 입선 동요로 뽑힌 것이 동요 시인으로서 그의 첫 출발이 된다. 다음 해에도 〈종달새〉(1926.4), 〈바닷가에서〉(1926.6), 〈각씨님〉(1926.7) 따위 동요가 《어린이》지에서 계속 입선되었다. 당시는 이원수, 윤석중, 서덕출, 최순애, 신고송 등이 잇달아 등단하던 때인데, 이들은 《어린이》지의 열렬한 독자로 시작해서 우리 아동문학을 본격적으로 정립시킨, 말하자면 방정환의 첫째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어린이》지 1926년 6월호의 애독자 사진란에는 윤복진의 주소가 '대구 남산정 가나리아회'로 되어 있다. 아마도 '가나리아회'는 동요를 지어 보급하는 작은 모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또한 《어린이》지 1927년 3월호의 독자 담화란에는 서덕출, 신고송, 문인암, 박태석, 황종철, 윤복진을 '대구 등대사'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신고송은 언양에 살았고, 서덕출은 울산에 살았다. 지금까지도 자못 활발한 바 있는 대구·경북 지역의 아동문학 인맥이 여기에서부터 그 뿌리가 만들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윤복진은 대구 사립 희원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에는 4년제인 대구사립계성학교(현 계성고등)를 제13회로 졸업했다고 한다.(정영진, 〈동요시인 윤복진의 반전극〉, 《문학사의 길 찾기》, 국학자료원 1993, 82쪽) 그리고 보통학교 상급반 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대구소년회'의 회원이었다고 한다.(같은 곳) 이는, 방정환에서 시작한 우리 아동문학이 소년회 활동과 한 몸이 되어 민족·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윤복진은 1927년 윤석중 중심의 '기쁨사' 회원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초창기 동요운동의 주요 인물로서 기억되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윤복진의 작품 세계는 순진한 동심의 표현의 대부분이다.

 
  바닷가에 조그만 돌
  어여뻐서 주워 보면
  다른 돌이 또 좋아서
  자꾸 새 것 바꿉니다.

  바닷가의 모래밭에
  한이 없는 조그만 돌
  어여뻐서 바꾸고도
  주워 들면 싫어져요.(〈바닷가에서〉, 부분)


  할버지 안경은
  돋보기 안경
  두 눈을 뜨고도
  꿈꾸는 안경
  콧등에 걸고서
  들여다 보면
  하늘 땅 어리리
  꿈같아 뵈어요.(〈할버지 안경〉, 부분)


  어린이 마음의 천진난만함에 착안해서 시적 감흥을 일으켜 낸 그의 동요시들은 이른바 '동심주의'의 좁은 범위에 갇혀 있는 한계를 드러낸 작품들도 꽤 많다. 게다가 4.4조나 7.5조라는 정형률의 글자 맞추기로서 의성·의태어를 남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유년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요의 세계란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함께 쌍벽을 이룬 윤석중과 마찬가지로, 아빠와 엄마와 아기라는 가족의 틀 내에서 작품이 취재되는 걸 무작정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 유년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의 특징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윤석중과 다른 윤복진 동요시들의 강점은 그 활달한 아이들의 놀이 세계를 잘 그려낸 점이다. 윤석중의 경우엔 때묻지 않은 기지(奇智)가 발휘되어 일종의 충격을 가하는 작품들이 많은 데 비해, 윤복진의 경우엔 개구쟁이들의 하루 일과를 바로 그들의 눈으로 그려 보이고 있는 작품이 많다.


  주먹나팔 뜃, 뜃, 뛰,
  미닫이 북이 둥, 둥, 둥,

  우리 집 군악대 야단이지요,
  우리 집 군악대 말썽이지요.

  피리 젓대 랄, 랄, 라,
  장판 방이 쿵, 쿵, 쿵,

  우리 집 군악대 야단이지요,
  우리 집 군악대 말썽이지요.(〈우리 집 군악대〉, 부분)



  뱅글뱅글 돌아라 울애기야
  뱅글뱅글 돌아라 땅도 돈다.
  뱅글뱅글 돌아라 울애기야
  뱅글뱅글 돌아라 집도 돈다.(〈뱅글뱅글 돌아라〉, 전문)


  자야 자야 금자야
  어깨동무 네 동무
  누구 누구 누구고,


  그건 물어 뭐하노
  어깨동무 내 동무
  아무 아무 아무지.(〈자야 자야 금자야〉, 부분)


  꼬옥꼬옥 숨어라
  꼬옥꼬옥 숨어라

  텃밭에는 안 된다,
  상추 씨앗 밟는다,

  꽃밭에도 안 된다,
  꽃모종을 밟는다,

  울타리도 안 된다,
  호박순을 밟는다.(〈숨바꼭질〉, 부분)

  집 안팎에서 요란하게 웃고 떠들며 노니는 아이들의 활달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동무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 말로 된 것들은 그 생동감이 곧 작품의 율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따라 읽노라면 진짜로 숨이 가빠지고 어깨가 들먹여진다. 시인은 우리말에 배어 있는 흥겹고도 아름다운 가락을 아주 잘 살려 쓰고 있는 것이다.

  중중 때때중
  바랑 메고 어디 갔나
  중중 때때중
  목탁 치고 어디 갔나

  등등 등 넘어
  골목골목 동냥 갔지
  강강 강 건너
  이집저집 동냥 갔지.(〈중중 때때중〉, 부분)


  노래로 지어져 널리 알려진 바 있는 이 작품은 빡빡머리 깎고 나온 동무를 여럿이 놀려 주는 말처럼 되어 있다. 악의 없는 개구쟁이들의 짓궂은 모습이라 하겠는데, 이런 동요를 따라 부르면서 아이들은 바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동요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가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윤복진의 동요시들은 박태준, 홍난파, 정순철 등 동요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서 널리 퍼지게 된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 노래인 창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1927년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서부터 윤복진의 작품을 비롯한 겨레의 노래들이 동요 프로그램을 통해서 활발히 전파되었던 것이다. 작곡가 박태준의 첫 번째 작곡집 이름이 《중중 때때중》(1929)이고, 두 번째 작곡집 이름이 《양양 범버궁》(1931)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윤복진과 박태준의 사이는 각별하였다. 박태준은 윤복진이 졸업한 대구 계성학교의 음악 선생을 했고, 윤복진이 다니던 남성정 교회의 성가대 리더였다.(정영진, 위의 책, 85쪽) 박태준이 윤복진의 동요만을 가지고 펴낸 가요집으로는 《참새 발자국》(1939, '물새 발자국'이란 시가 있는 걸로 봐서 광고 문안이 잘못되지 않았나 여겨진다)과 《박태준 동요곡집》(해방 후)이 있다.

  윤복진은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과에서 수업하고 법정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김수향(金水鄕), 김귀환(金貴環)이란 이름으로도 작품 활동을 벌인다. 1930년을 전후로 해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주요 일간지의 각종 현상 문예에 그의 동요가 당선되었다. 이 즈음 카프(KAPF) 문학운동의 영향 아래 경향적 색채를 띤 아동문학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윤복진도 예외는 아니라서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스무 하루 밤〉은 그런 경향적 색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스무 하루 이 밤은 월급 타는 밤
  실 뽑는 어머니가 월급 타는 밤

  버드나무 숲 위에 높은 굴뚝엔
  동짓달 조각달은 밝아 오는데

  어머니는 어디 가 무엇하시고
  이 밤이 깊어 가도 아니 오실까.(〈스무 하루 밤〉, 부분)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대 현실을 담아낸 작품으로 〈이삭 줍는 어머니 노래〉(중외일보, 1929.11.15), 〈봐라 참새야〉(중외일보, 1929.11.26), 〈달아난 부엌댁이〉(중외일보, 1930.2.6), 〈기차가 달려 오네〉(어린이, 1930.8) 〈쪽도리꽃〉(중외일보, 1930.8.19), 〈선생님 얄궂더라〉(조선일보, 1930.8.26), 〈송아지 팔러 가는 집〉(중외일보, 1930.9.6), 〈가을밤〉(조선일보, 1933.9.17) 등의 작품을 더 들 수 있다. 하지만 윤복진이 월북 시인이라고 해서 이런 경향적 색채의 작품이 우세했을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수백 편을 넘는 그의 전체 작품을 두고 볼 때, 어린이의 생활을 당대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한 작품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 같고, 위에 나열한 작품들도 몇 몇을 빼고는 그저 당시의 문단 추세를 쫓아간 태작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윤복진 동요시의 특질은 천진한 동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윤복진 동요시 가운데 또 주목되는 것은 이를테면 '토속적 해학미'이라 함직한 것들이다. 이는 윤석중의 이른바 '낙천주의'와도 구별되는 요소이다.



  달랑달랑
  당나귀
  점잖 피더라,

  아주 아주
  제 꼴에
  점잖 피더라,

  쫄랑쫄랑
  강아지
  마구 덤벼도,

  옆눈 한번
  안 보고
  지나 가더라.(〈당나귀〉, 전문)


  산 너머 풍서방이
  장난꾸러기 풍서방이
  남의 집 대문짝을 왈캉 달캉
  주인 양반 안계시우 왈캉 달캉

  바두기가 망, 망,
  삽살이가 멍, 멍,(〈산 너머 풍서방이〉, 부분)


  슬그머니 웃음이 지어지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옛이야기 열두 발〉 〈총각 마찻군〉 〈영감 영감 야보소 에라 이놈 침줄까〉 〈양양 범버궁〉 〈구멍가게〉 〈아기 참새〉 〈가이 두 마리〉 〈하나 둘 셋〉 등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들은 아주 많다. 해맑은 동심과 토착 정서가 결합되어 이룩된 이런 작품군은 윤복진 동요시들이 지니는 독특한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하기에 윤복진 동요시에서 풍경을 다룬 작품들도 대부분 토속성이 아주 짙고, 아울러 아이들 눈에 쏙 들어오는 단순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숨가쁜 뛰놀기를 잠깐 멈추었을 때 찾아든 바로 그 순간의 고요함과도 같이 티없이 맑고 소담스러운 한국적 서정의 세계이다.



  산 밑에
  조그만
  초가집 문에,

  문 구멍이
  송, 송,
  뚫어져 있네.


  산 밑에
  조그만
  초가집에는,
  조무라기
  형제들이
  사는가 보다.(〈초가집〉, 전문)


  산모롱이 고욤낢게
  고욤이 두 개,

  새까맣게 익어 가는
  고욤이 두 개,

  산골에 때때중이
  흔들어 보고,

  산 밑에 까까중도
  흔들어 보고,(〈고욤〉, 부분)



  저 건너 갈미봉에
  진달래 피었다.
  산모랭이 빙-빙
  소리개도 못봤다.
  소남게 꾹-꾹
  비둘기도 못봤다.
  천길만길 안개 속에
  진달래 피었다.(〈진달래〉, 전문)



  동요시의 전통에서 볼 때, 윤복진의 작품에 나오는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해방 후 권태응의 작품 세계로 이어진다. 해방이 되자 윤복진은 아연 경향적 색채를 강조하기에 이르는데, 〈무궁화 피고피고〉(조선주보, 1945.11.19), 〈돌을 돌을 골라내자〉(중앙신문, 1945.12.13), 〈새 나라를 세우자〉(자유신문, 1946.1.1), 〈자장 자장 자장-화전민 아들딸의 자장 노래〉(예술, 1946.2) 따위 작품들이 바로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작품들은 권태응한테서 볼 수 있는 농촌적 생활의 화폭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전하고픈 어른의 말을 주로 쓰고 있다. 이는 그가 아직도 아동문학의 리얼리즘을 예술 형상의 원리라기보다 일개 관념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1949년 아동문예예술원에서 동요집 《꽃초롱 별초롱》을 펴낸다.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의 발문에서 자신의 아동관을 힘주어 밝히고 나선 점이다. 여기서 그는 "봉건시대와 그 전시대에서 천대만 받아오던 아동을, 인간 이상의 인간으로 떠받쳐 현실의 아동을 선녀나 천사로 숭상하려던 시대도 있었다. 나도 그러한 과오를 범한 사람의 한 사람이다."(120쪽)라고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다. 그리고는 그렇게 "아동을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존재처럼 신앙하여, 현실의 아동을 우상화시켜 구가하는 근대 낭만주의자의 동심지상주의 내지 천사주의의 아동관은 더욱 불법하고, 부당한 것"(121쪽)이라고 힘주어 비판한다. 과연 그한테도 현실의 아동관이 자리잡은 것처럼 보였다.



  아동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인간이다. 우리네 성인과 마찬가지로 현실 안에 살고 현실 안에 생활하는 인간이다. 그저 성인 이전의 인간으로서 나날이 시시각각으로 생장하는 어린 인간이다. 미래할 세계의 새로운 인간이요, 닥쳐 오는 새 시대의 주인공이다.(같은 곳)



  이렇게 해서 내린 그의 결론은 "일체의 봉건적 요소를 배제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길로! 일체의 비과학적 사상을 배격하고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과학으로 더불어 우리의 아동관을 새로이 하자!"(122쪽)는 것이었다. 실상 이 문구는 그가 가담했던 조선문학가동맹의 표어를 베껴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동요문학을 민주주의적 과학적 아동관에 입각"(같은 곳)시켜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지만, 단지 이런 추상적 문구만으로 그의 세계관과 문학관의 변화를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문학부 사무장(1946)을 지낸다. 그리고 건강 때문에 대구로 낙향해서는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경상북도 지부 부위원장단(4명)의 한 사람이 된다.(정영진, 위의 책, 90쪽) 그런 탓으로 정부 수립 후에는 이른바 좌익 활동자 전향 단체인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시 6.25 동란시의 월북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윤복진의 문학관이 그의 월북 동기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복진의 작품 세계는 동심주의에 가까우나, 그 일부는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토속적 해학미과 결합시켜 성공한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월북 동기는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으로 신고송을 떠올려야  할 것 같다. 신고송은 《어린이》지 애독자 시절부터 윤복진과 동요운동을 함께 벌인 동향의 문우이다. 말하자면 윤복진은 같은 나이의 신고송과는 영원한 라이벌 관계였던 것이다. 그런 신고송이 카프에 가담하고 동경 유학 후 연극과 문학 양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맹렬하게 활동했던 것을 윤복진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더욱이 신고송은 카프 아동문학의 전성기에 윤복진의 동심주의적 작풍을 비판하는 평론도 썼던 바이다. 윤복진은 아무래도 지배적인 경향을 쫓아 부하뇌동한 측면이 크다. 그는 월북 후에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다가 1991년 7월 16일 84세로 평양에서 타계했다고 하는데(정영진, 위의 책, 94쪽), 북의 체제를 찬양하는 시를 써서 문학적으로도 장수했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아침햇살》 97년 겨울 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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