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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되돌아 보는 한국음악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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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얼굴의 창가

찬송가와 일본군가가 외국인에 의해 전달된 서양음악이라고 한다면,창가(唱歌)라는 장르의 음악은 우리가 만들어 부른 최초의 양악이다.창가는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과 같이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찬송가의 선율을 빌려 만든 애국계몽가요도 창가요,항일투쟁가와 독립군가도 창가요,학교교육을 통해 보급된 일본식 서양음악도 창가다.다시말해 1920년대에 동요 대중가요 가곡 등이 출현하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불린 모든 서양의 노래 또는 서양식의 악곡을 창가라고 하였고 노래의 양식이 다양화된 이후 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래나 교육과 관련된 노래도 창가라 불렀다.

찬송가로부터 시작한 애국계몽가요

한국에 있어서 창가는 1896년부터 비롯된다.이 당시 창가는 대부분 찬송가의 선율을 차용했기 때문에 음악적인 면에서는 찬송가와 같지만 가사는 세속적인 내용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찬송가라기 보다는 계몽가,애국가의 역할을 담당했다.교회의 찬송가가 사회참여라는 이름아래 세속적인 음악으로 발전한 것이 이른바 ‘창가’라는 형식의 음악이며 내용면에서는 ‘애국계몽가요’라는 얼굴을 가졌다.

찬송가의 선율을 빌린 최초의 창가,그러니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애국계몽가요는 ‘황제탄신경축가’(일명 ‘애국’)이다.이 노래는 현행 찬송가 79장 ‘피난처 있으니’의 선율에서 따온 것으로 1896년 9월9일 고종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축하예배 때 신도들이 만들어 불렀다고 한다.그리고 ‘애국가’라는 제목의 노래도 많이 불렸는데 이 노래는 현행 찬송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의 선율을 빌린 것이다.이 노래는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던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에서 최초로 불렸다.작사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사는 현재 불리고 있는 ‘애국가’의 모체가 되고 있다.

이와함께 1900년을 전후로 많은 애국계몽가요류의 창가가 만들어졌고 애국계몽가요의 뒤를 이어 항일투쟁가와 독립군가가 등장하게 된다.항일투쟁가와 독립군가 역시 찬송가의 선율을 활용한 것이 많은 게 특징이다.특히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합동찬송가집의 성격을 띠고 있는 ‘찬송가’가 발간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고 또 불렸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근대음악사

항일투쟁가,독립군가 중에는 일본군가와 일본창가의 선율과 비슷한 것도 적지 않다.이들 노래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일본 군가가 대량으로 보급되었고 또 식민지 이후의 학교교육을 통해 일본 창가만 보급됐기 때문에 그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향후 전개되는 남한의 창작음악은 찬송가와 일본의 창가를 바탕으로 했으며 북한의 음악사는 일본의 창가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즉,한국 창작음악의 효시인 창작 창가는 찬송가와 일본 창가를 혼합시켜 만든 것이며,북한음악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는 항일혁명가요는 일본의 군가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이를 답습한 것이 대부분이다.결국 한반도의 창가는 애국계몽운동과 일제의 식민지화,그리고 이에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발전됐으나 남북한 모두 일제의 사슬아래 왜곡된 음악사를 수정 내지 극복하지는 못한 한계를 지닌 채 오늘에 이르렀다.

서양음악의 도입

20세기 들어 우리 민족은 어떤 노래를 즐겨 불렀을까.그리고 어떤 노래를 불러야만 했을까.서양음악의 수입과 함께 우리나라에 새롭게 등장한 노래를 차례대로 살펴보면,찬송가-서양 선율을 차용한 창가-일본창가-한국창작창가-외국의 애창곡을 번역 및 번안한 곡-동요-가곡-대중가요 등의 순으로 이어진다.이 중 많은 노래들이 역사 속에 사라져 버렸지만 적지 않은 노래들이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다.

서양음악 수용 초기에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다름아닌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이다.이 곡은 19세기말에 수입되어 처음에는 중국어와 영어로 불리다가 1894년 한국 최초의 찬송가집인 ‘찬양가’에 한국어 번역 가사가 수록됐다.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유행된 찬송가일 뿐 아니라 서양노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역시 많이 불렸는데 처음에는 4박자로,나중에는 오늘날과 같이 6박자로 불리게 되었다.한국인이라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누구에게나 자장가나 고향의 노래와 같이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찬송가에 이어 서양 노래의 선율을 차용한 창가가 많이 불렸다.대표적인 것으로는 영국 민요 ‘밀밭에서’의 선율을 따온 ‘경부철도가’가 있다.“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로 시작하며 가사는 7·5조로 되어 있는데,이 노래의 영향으로 한국근대시의 운율이 7·5조로 변하게 된다.일제 시대에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청산 속에 묻힌 옥도…” 또는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로 시작하는 ‘학도가’일 것이다.이 노래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폭넓게 불렀으며 지금도 일제시대를 상징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학도가’의 선율을 빌린 노래는 찬송가 ‘성경목록가’를 비롯해 20여종이나 될 정도로 많다.이 곡의 원곡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철도창가’이다.창작창가로는 ‘내 고향을 이별하고’가 많이 불렸다.고향을 그리워하는 서정적인 노래로 군악대 출신인 정사인(鄭士仁)이라는 사람이 작곡했다.그런데 북한에서는 ‘사향가’라는 제목의 노래로 애창되고 있으며 김일성이 만든 것으로 둔갑되어 불후의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양의 노래를 번역한 것으로는 ‘메기의 추억’‘애니노리’‘한떨기 장미’‘로렐라이’ 등 주로 감상적인 분위기의 곡이 애창되었다.한편 학교에서는 일본어 가사로 된 일본창가만을 부르도록 강요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학교 밖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고 정서를 함양시켜 주자는 취지에서 동요와 가곡이 만들어졌다.‘반달’‘고향의 봄’을 비롯해 “지금은 일제의 총칼에 짓밟히고 있지만 화창한 봄바람에 한국의 민족혼이 다시 회생한다”는 내용의 ‘봉선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중가요로는 외국곡을 번안한 ‘희망가’(일명 ‘이 풍진 세월’)와 ‘사의 찬미’를 비롯해 ‘황성옛터’‘목포의 눈물’ 등 감상적인 분위기의 곡들이 많이 불렸다.일제시대 우리민족이 즐겨부른 노래는 허구적이고 비관적인 것이 많으며 과거지향의 노래,고향을 그리는 노래,이별의 노래,죽음을 찬미한 노래 등이 특히 애창됐다.그리고 애상과 비감에 젖는 노래를 좋아했는데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식민지라는 암울한 상황이 감상적인 분위기의 노래를 좋아하게 만들었고 또 서정적인 한국노래의 정형을 낳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노래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처음 불렸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다만 1887년 크리스마스 때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벧엘교회에서 불렸는데,공개적인 장소에서 불린 최초의 노래로 추정되고 있다.20세기초만 하더라도 서양 노래와 서양식의 노래를 전부 ‘창가’라고 했다.창가 제1호는 1896년 새문안교회 신도들이 찬송가의 선율을 빌려 만든 ‘황제탄신경축가’이며,한국인이 작곡한 창작 창가 제1호는 1905년 김인식(1885∼1963)이 만든 ‘학도가’이다.그리고 1902년 초대 군악대장인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가 ‘대한제국애국가’를 작곡하였는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창가에서 현대음악으로

1920년대부터 창가는 동요,가곡,대중가요 등으로 분화했다.창작동요의 효시는 윤극영(1903∼1988)이 1924년에 작곡한 ‘반달’이며 1919년에 작곡돼 1925년에 김형준이 “지금은 일제의 총칼에 억눌려 있지만 따스한 봄이 오면 민족혼이 회생한다”라는 내용의 가사를 넣은 홍난파(1897∼1941)의 ‘봉선화’가 가곡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봉선화’의 원곡은 ‘애수’라는 바이올린 곡으로 최초의 기악곡이라는 기록도 동시에 갖고 있다.창작 대중가요 1호는 1927년 김서정이 영화주제가로 작사·작곡한 ‘낙화유수’(일명 ‘강남달’)이며 이에앞서 1910년대에 정사인(1881∼1958)이 ‘태평가’를 만들었다.이 곡은 전통민요에 서양음악의 요소가 결합된 신민요의 효시다.

최초의 음악사 기록들

1894년에 발행된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찬송가집인 동시에 오선보 악보집,1910년에 발행된 ‘중등창가집’은 최초의 노래집,같은 해 통감부에서 편찬한 ‘보통교육창가집’은 최초의 음악교과서라는 의미를 가진다.동요집은 1926년에 발행된 ‘반달’,가곡집은 1929년에 발행된 ‘안기영작곡집 제1집’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으며 1946년에 발행된 ‘임시중등음악교본’은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음악교과서다.

사람으로는 김인식이 작곡가와 한국인 음악교사,성악가,트럼펫연주자 등 4개 분야에서 최초의 기록을 보유하고 했으며 홍난파가 가곡 작곡,바이올린 연주,평론,방송교향악단 지휘,음악잡지 발행 등 5개 분야에서 기록울 보유하고 있다.그리고 백우용(1883∼1930)이 군악대장 겸 클라리넷 연주자,김세형(1904∼1999)이 전문작곡가,임배세가 여성작곡가,김영환(1893∼1978)이 피아니스트,한기주가 소프라노,안익태(1906∼1965)가 첼리스트 부분에서 각기 최초였다.

또 1910년쯤에 창설된 숭실전문학교 관현악부는 첫 관현악단이고 1926년에 창설된 중앙악우회는 본격 관현악단으로 출발했다.1928년에 창설된 경성제국대학 관현악단은 첫 아마추어 단체,1934년에 창설된 경성관현악단은 처음으로 보수를 받은 직업 연주단체,1940년에 창설된 조선교향악단은 본격적인 민간 심포니 오케스트라라는 역사성을 갖는다.최초의 전문 양악 교육기관은 1909년에 창설된 ‘조양구락부’이며 대학급으로는 1925년에 창설된 이화여자 전문학교 음악과가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국민일보 199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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