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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한국시의 가곡화에 대한 분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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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의 가곡화에 대한 분석

이장직 / 음악평론가

① 한국가곡의 현재상황

요한 복음의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태초에 말이 있느니라, 이 말이 노래와 함께 있었으니 이 말은 곧 노래이니라. 그것이 태초에 노래와 함께 있었고 노래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느니라. "

음악의 맨 처음 모습이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은 음악에 대한 역사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문제이다. 음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많은 가설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언어와 음악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언어기원설>은, 초기의 음악형태는 언어와 음악의 미분화 상태였으며 따라서 언어의 음악성, 음악의 언어성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음의 높낮이로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성조언어(tonal language)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초기의 음악이 춤·의·식·축제와 결합된 것이었으며, 예술적·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성의 확인 수단이었기 때문에 음악 자체보다는 음악외적인 의미 발생이 더 중요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음악의 언어기원설을 뒷받침해 준다. 특히 성악음악의 발생은 언어와의 관계를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서양음악의 역사는 줄곧 음악외적인 의미에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겪어왔다. 성악의 경우를 보면, 자연스러운 가사낭독의 리듬이 음악의 리듬을 지배하던 상태에서, 시의 리듬이 차츰 배제되고 그 대신 독자적인 음악의 리듬이 사용되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서양문화는 세속화경향을 거친다. 이와 함께 성악음악은 기악음악에 음악적 주도권을 내어 주고 말았다. 이는 음악이 가사에서 해방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성악 음악은 그 가사가 지니는 함축 때문에 그것이 종교음악이든 행사용 음악이든 음악외적인 영역으로부터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다. 반면에 기악음악은 그 소재가 지니는 추상성 때문에 다소 현실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이 <거리>는 바로 미적 자율성의 획득이다. 무엇보다도 기악음악을 꽃피운 것은 고전주의 시대였다. 소나타·현악4중주·실내악·교향곡 등의 기악 양식이 고전주의 음악을 이끌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음악과 언어와의 관계는 예술가곡과 오페라 양식에서 다시 회복된다. 기악곡 위주의 양식에서 성악곡이 중요시되는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예견된다. 슈베르트·슈만·브람스·볼프 등의 예술가곡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핵심을 이루었다.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에서의 최초의 <서양식 노래>가 나타난 것은 찬송가의 수입부터이다. 음악적으로는 서양적인 것이었지만 가사를 우리말로 옮겨 부름으로써 문화적 충격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선율도 주로 5음 음계로 된 노래를 즐겨 부름으로써 문화 절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찬송가가 기독교적 신앙이나 교리를 담은 것이라면, 이와 함께 보급된 창가는 사회 계몽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개화기 초기의 음악이 종교·교육제도와 긴밀한 관련성을 유지했다는 사실로, 가사를 내포하고 있는 성악음악이 당시의 음악문화를 지배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직 노래에서 "개인적인 정서와 감성을 노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음악의 예술성이나 전문성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민경찬)

한국 가곡의 전신이랄 수 있는 찬송가와 창가는 당시 아직 미분화 상태에 놓여 있던 대중가요와 함께 상당한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격차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즉 창가에서 예술가곡과 대중가요가 갈라져 나온 것이다. 성악을 전공한 윤심덕이 대중가요를 레코딩하여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당시 초기 형태의 가곡과 대중가요가 가라지는 대목은 음악적인 차이라기보다는 경제적·교육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계층의 구분에 있었다. 당시 예술가곡과 대중가요의 영역이 다소 겹쳐져 있었음은, 홍난파가 <봉선화>에서 시작하여 가곡을 작곡하는 한편 대중가요도 몇 편 작곡하여 예명으로 발표한 사실에서도 암시 받을 수 있다.

1920년에 발표된 홍난파의 <봉선화>부터 시작하여 한국 가곡의 역사는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경찬(1986)은 한국가곡사를 크게 10년 단위의 5단계로 나눈다. 즉 (1) <봉선화> 이후의 1920년대의 개척기 (2) 30년대의 서정가곡기 (3) 1940년대의 예술가곡기 (4) 1950년대의 과도기 (5) 1960년대 이후의 현대가곡기가 그것이다. 한편 그는 20년 단위로 한국가곡의 <세대>를 구분하기도 한다. (ⅰ) 1920년 이후의 제1세대 (ii) 1940년 이후의 제2세대 (iii) 1960년 이후의 제3세대가 그것이다(여기서의 <제3세대>는 작곡동인 그룹의 이름과는 다른 것이다). 제1세대는 창가에서 가곡양식으로의 발전을 이룩하여 한국가곡의 장르를 개척하였으며, 제2세대는 예술가곡을 청중들 사이에 정착시켰으며, 제3세대는 현대적 어법의 가곡을 창작했다는 점에서 각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그리 엄격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의 예술음악 장르 중에서 비교적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가곡에 사용된 시들을 작가별·내용별로 분석함으로써, 한국가곡에 대한 성격의 규명과 아울러 그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데에 있다. 이 글에서의 통계자료에는 기존의 것에 필자가 다소 수정을 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기존의 통계자료가 만들어진 이후에 출판된 몇 권의 가곡집에 수록된 노래들 때문에 통계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② 작사자·가곡수·작곡자 현황 분석

좋은 가곡은 훌륭한 시인과 작곡가가 만나서 이루어진다. 한국가곡에 있어서 작곡자가 시를 선택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우선 시의 내용이 작곡가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생소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 다음의 문제는 형식적 요인, 즉 음수율이나 시의 길이에 있다. 대체로 한국가곡은 일정한 음수율이 있는 정형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 준다. 이것은 가곡화하는 과정에서의 손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정한 틀을 유지할 수 있고, 유절 가곡화하여 짧은 오선지 내에 긴 가사를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형시가 아닌 경우 그것을 가곡화하려면 보통 음악의 규범적인 박절구조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많은 음절을 일정한 박자에 담기 위해서 짧은 음표, 가령 예를 들면 16분 음표를 동시에 많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가곡에 들어오면서 곡 중간에 박자 바꾸는 기법이 보편화되지만, 초기에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초기의 가곡은 대부분이 정형시를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소월의 시가 한국가곡 전체의 1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시가 갖는 7·5조의 음수율은 4마디를 기본단위로 하는 가요형식(song form)의 한 악구와 대응된다. 가령 그의 시 <옛 이야기>를 보면 우선 낭독에서부터 리듬을 감지할 수 있다. (서우석 1981. p.38참조)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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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의 시가 한국가곡에서 최고의 빈도로 나타나는 것에는 음수율 외에도 그의 시가 갖는 내용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곡이란 원래가 낭만주의의 산물이었다. 음악과 문학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가곡은 낭만주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 소월 시가 갖는 낭만주의·자연주의·향토색은 가곡 작곡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표1에서 굳이 <작사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가곡에 사용된 가사에는 기존의 시외에도 고시조나 자작시, 성경 등에서 따온 종교적 내용의 가사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비고란에 ☆표를 한 것은 한 시인이 쓴 여러 편의 시를 단 한 사람의 작곡가가 가곡화한 경우를 나타낸다. 이에 반해서 같은 시를 여러 명의 작곡가가 가곡화한 경우도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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