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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현제명의 친일사상에 관한 논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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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제명(玄濟明창씨명玄山濟明,1902∼1970)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
1944년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조선음악협회 이사
서울음대 창설의 주역

'현제명' 하면 누구나 곡목은 몰라도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고향생각])랄지,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그 집 앞])이랄지, 또는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희망의 나라로]) 등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귀에 익숙한 노래들이 생각난다. 그만큼 현제명*은 가곡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이다. 그가 살아온 생애는 분명 홍난파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양악계의 큰 별임에 틀림없다.
그는 한국 양악계에서 부동의 중진 음악가이다. 더욱이 홍난파가 광복 이전의 한국근대양악계의 대부라는 점과 달리 현제명은 근대뿐만 아니라 현대양악계에까지 큰 산맥을 이룬 음악가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노래 몇 곡 작곡하고 성악가로 활동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각종 조직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 광복 직후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이라는 점에서도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이나 역사적 평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제명은 또한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었으며, 광복 이후 역사적 반성 없이 악단에서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한 인물이었다.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의 대상이지 윤리적·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아님을 정당화시킨 병리적 계기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현제명 역시 홍난파와 함께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총독부 관제 친일단체에 지도자로 가장 강력하게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친일 전력의 음악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개신교 출신이었고, 또 홍난파와 함께 현제명은 극소수의 미국유학파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근대양악계가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것도, 이들의 음악활동이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광복 후 음악계가 '기독교-친일-친미-반공이데올로기'로 사고를 제한시키는 데 공헌한다.

현제명은 1902년 12월 8일에 대구 남산동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나 1970년 10월에 고혈압으로 작고할 때까지 성악가(전공), 국민개창운동 지도자,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고려교향악단 창설자, 음악원 교장으로서 음악교육가, 오페라 연출가,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예술원 종신회원 등을 지냈다. 대구 대남국민학교와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 제일교회 성가대 단원으로 음악 체험을 시작하였다가 1924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성악과 피아노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전주 신흥중학교에서 음악과 영어교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2년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무디(Moody)성경학교를 다녔고, 1928년부터 1년 동안은 인디애나주 레인보우의 건(Gunn)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국내악단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29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 음악교수, 조선음악가협회(1930년 결성)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부각은 뚜렷하였다.
1930년대 초·중반 동안 국내 음악인으로는 홍난파, 김영환, 채동선, 안기영, 최호영, 독고선, 홍재유, 윤성덕, 김인식, 박경호, 김세형, 박태준, 김동진, 권태호, 이인선, 한기주, 김재훈, 김관, 정훈모, 채선엽, 이유선, 이영세, 홍성유, 이흥렬, 박태현, 홍종인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현제명은 작곡집 2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1937년은 현제명에게 전환점을 가져오는 해이다. 즉, 이 해에 그는 전에 유학한 바 있는 건음악학교에서 '자연발성법'이라는 논제로 성악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직후부터 국내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음악가로 주목받았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음악보국'운동 본격화

1937년 5월에 그는 홍난파, 김영환, 박경호, 윤성덕, 이종태 그리고 전통음악분야의 함화진과 함께 새롭게 결성된 조선문예회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그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홍난파와 마찬가지로 친일의 배경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이 있었고, 또한 민족음악 개량운동의 허구성도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문예회는 사회교화단체로서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인과 조선인 문예가 30여 명이 결성한 단체였다. 음악인들은 주로 곡을 붙여 발표하거나 악보제작과 음반취입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조선 음악인이 조선인을 계몽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 지배층과 손을 잡음으로써 양악전공활동을 보장받은 것이다.

현제명은 1937년 조선문예회 활동을 통하여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으로 국체 관념을 뚜렷이 함으로써 시국인식을 고취하고 황군을 격려한다'는 취지 아래 [가는 비], [서울](이상 최남선* 작시), [전송](お見送り, 土生よねさく 작시)을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1938년 6월에 현제명은 홍난파, 전영택 등 18명의 수양동우회원이 1937년 7월에 기소된 사건을 계기로 친일 대동민우회에 가입·활동하면서 그의 친일활동을 본격화한다.
그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938년 결성)에서 경성지부 간사를 역임하였고,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1941년 결성)가 후에 개편될 때에는 이사를 맡았다. 또한 '전시하의 국민들에게 건전한 음악과 음악 자체의 예술성을 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서 활동·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1942)된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제2기로 개편(1944)될 당시에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친일음악활동은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구로야마(玄山濟明)라는 창씨명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1941년 6월 조선음악협회가 신체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음악보국'(音樂報國)하자며 양악·조선음악·일본음악별로 음악회를 개최할 때(6. 4), 자신의 성악작품 [후지산을 바라보며] 등을 발표하였다. 현제명 이외에 이 음악보국 음악회에 출연하거나 작품을 발표한 음악인들을 살펴보면, 지휘 겸 테너 히라마 분쥬(平間文壽), 작곡 안기영·김메리·임동혁·김성태·박경호·이흥렬·김세형, 소프라노 이관옥·채선엽·김자경·최희남·이승학·이유선·김천애·주경돈, 테너 송진혁, 바리톤 최창은, 피아노 이흥렬·김영의·이경희, 바이올린 홍지유·림향자·하대응·계정식·김생려·김재훈·고종익, 비올라 안성교, 첼로 김태연, 플루트 김재호 등 국내 주요 음악인들이 망라되어 있었으며, 조선음악협회합창단과 이화여전·세브란스의전·경성음악학원·경성여자사범학교 학생연합합창단도 출연하였다.

1941년 11월 9일에 현제명은 일본어 보급을 통하여 '참된 황국신민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한 전국적 시국학교' 중의 하나인 경성대화숙이 주최한 '(일본)국민음악의 밤'(부민관 대강당)에서 독창을 하였다. 이 음악회에는 김자경, 계정식, 경성음악전문학교 합창단, 이화여전합창단, 경성취주악단 등이 출연하였다. 그리고 경성대화숙이 1941년 12월 14일에 '총후 사상전에 정신(挺身)'하면서 개최한 대화숙 1주년 기념식에서는 현제명의 반주로 군가와 성수만세가 봉창되기도 하였다.
1942년 1월 23일에는 역시 대화숙 주최의 '군가강연의 밤'에서도 현제명은 일본 정신과 일본 정서로 만들어진 군가와 일본 국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현제명이 대화숙과 관련을 맺은 결과, 마침내 1943년 4월 1일에 경성대화숙 내에 '경성음악연구원'을 개설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음악연구원 교수진은 현제명을 대표로 하여 성악 김천애, 피아노 김영의, 바이올린 김생려, 작곡 및 이론 김성태 등으로 짜여졌다.
중요한 사실은 경성대화숙 부설 경성음악연구원이 광복 직후 경성음악학교로 이어지고 다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그는 1942년 12월 11일에 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 후원으로 개최한 조선음악협회 주최 제1회 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부 심사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1943년 2월 24일 부민관에서 경성후생실내악단 주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원으로 열린 '(일본)국민음악연주회'에서는 개창지도를 하였다. 이 음악회는 미국과 영국음악을 몰아 내고 태평양전쟁 결전음악으로 '1억 국민이 군가로 국민개창운동을 보급'하자는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3년에 태평양전쟁에 대한 결전결의 앙양기간을 설정하고, 조선음악협회와 합동으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여러 가창지도대를 전국에 보내 순회지도하도록 하였다. 이 때 현제명은 가창지도대 지도자로 나섰다. 즉, 4월 29일에는 수원 일원, 5월 7일부터는 경기도 이천읍 일원, 5월 9일부터는 경기도 강화면 일원 등에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주요 (일본)국민가는 일본 제2 국가(國歌)로 선정된 [바다로 가면](海行かば), [애국행진곡], [흥아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태평양 행진곡], [애마진군가], [대소봉대일의 노래], [대일본 청소년단가], [대일본 부인회가], [아세아의 힘], [야스쿠니 신사의 노래], [국민진군가], [일월화수목금토], [대동아결전의 노래] 등 하나같이 일본 육군성이나 해군성 그리고 전시체제를 수호하는 기관들이 공모하여 유명해진 일본어 노래들이었다. 이 노래들은 조선의 민족정신을 약화시키고 민족정서를 해체시키고 일본 정신과 일본 정서를 표현한 곡들이다. 이러한 노래들을 현제명을 비롯한 국내 음악 주역들이 앞장 서서 가창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길들이는 가창지도였다. 현제명은 1943년 8월 1일부터 징병실시 감사주간에 실시된 조선총독부 행사에 어김없이 출연한다. 즉, 8월 3일 오후 7시 경성운동장에서 진행된 '야외음악·영화의 밤'에 징병실시 시행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항공일본의 노래]와 [대일본의 노래]를 부른다.

홍난파 사후 친일음악계의 지도자로 부상

현제명은 홍난파가 없는 1941년 이후에 일제권력과 더욱 밀착한 결과 강력한 악단 대부로 존재하게 되었다. 1944년 5월에 '건전한 (일본)국민음악예술의 수립을 위하여' 제2기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면서 현제명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한다. 단원으로는 피아노 김원복·윤기선·김영애, 편곡 이흥렬, 바이올린 정희석, 첼로 나운영, 소프라노 이규봉·고영희, 바리톤 정영재, 김학상, 이종태 등이 있었고, 상무이사에는 스즈키 칸이치로(鈴木貴一郞), 즉 이종태(李宗泰:일본 도쿄음악학교 출신의 음악교육가)가 창씨명으로 활동하였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은 광산이나 공장 등 소위 병참기지화가 되어 버린 조선의 생산지대들을 찾아 산업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일본)국민음악 건설에 매진한다는 취지에서 발족된 것이었다.
한편, 조선음악협회는 1944년 7월에 일본에서 정보과 촉탁으로 이와모토(岩本政藏)를 영입하여 새로운 정비를 단행하는데, 이 때 현제명은 이사로 선임되었다. 조선음악협회의 회장은 아베(阿部) 총독부 정보과장이었고, 이사는 재류(諸留) 조사관과 이와모토 정보과 촉탁이 맡았으며, 민간인 이사로는 오오바 이사노스케(大場勇之助: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겸 경성제1고등여학교 음악교유) 및 아베(阿部文雄)와 함께 현제명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로써 현제명은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직과 더불어 유일한 조선인 조선음악협회 이사로서 조선 최고의 친일 음악실력자가 되었다. 현제명은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세 가지 주요 사업을 전개하였다.

첫째,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서 조선음악협회 회원과 경성시내 중등학교 학생을 동원(30개 단체 500여 명)하여 국가봉납식(國歌奉納式), 곧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를 일본신전에서 봉창하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일본 정신을 고취하고 음악보국을 맹세하는 식을 거행하였다(1944. 7. 26. 오후 2시 30분). 이 자리에는 아베 총독부 정보과장과 음악협회 관계자, 중앙방송 관현악단, 각급 학교장 등이 참가하였는데, 일본 국가를 부르고 역시 제2 국가인 [바다로 가면]을 부르면서 음악보국을 맹세하였으며, 식이 끝난 후 밴드를 앞세워 남대문에서 총독부 앞 광장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다.

둘째, 음악가 숙정사업이었다. 1944년 5월 18일 조선총독부 부령으로 확정한 '조선흥행취체규칙'에 의거, 같은 해 9월 1일부터 전면 실시하는 '기예자 증명서'(기예증) 발부를 기화로 음악관계자 약 400명 중 350명을 합격시키고 나머지는 숙정하였다. 물론 이 숙정사업에는 음악협회 이사장과 일본인 이사 그리고 현제명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셋째, 조선총독부 지시하에 조선음악협회를 비롯하여 경성후생실내악단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연대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일본국민음악 보급으로 전시체제를 갖추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각종 노래 보급과 음악회 개최, 일본 음악인 초청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음악협회가 1945년 5월 27일부터 9월 10일에 걸쳐 경성부민관에서 일본음악, 조선음악, 조선양악 등 세 분야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도 그의 일환이었다.

또한 일본 테너로서 이탈리아를 유학하고 일본에서 꽤나 알려진 후지와라 요시에(藤原義江)를 초청하여(1945. 1. 5∼7, 약초국민극장), 조선군 보도부, 경성군인원호회, 국민총력조선연맹 홍보부 등의 협력으로 상이군인 및 산업전사 위문 결전음악회를 개최한데 이어 경성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개최한 것도 그 예이다. 또한 일본음악을 각급 학교에 보급한 것도 이예 속한다. 그는 광복이 가까워지면서도 일본본토 결전을 위한 경성부민대회나 그 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현제명이 이사장으로 있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은 1945년 5월 8일에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조선의 문화향상 발전을 꾀하고 그 공적이 많은 문인·화가·음악가 또는 단체에게 도쿄 신태양사가 수여"하는 조선예술상은 제5회 수상대상자로 경성후생실내악단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즉, 결전음악과 활발한 공연활동으로 일본음악보국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었다.

광복 직후 현제명은 제일 먼저 고려교향악협회와 그 산하에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미군정 장관을 명예회장으로 영입하였으며, 한국민주당 문교위원으로 정당활동을 하였으며, 경성음악학교 교장으로,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초대 음악학부장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사실 일본제국주의 잔재를 민족정기로 청산하지 못한 광복정국에 기인한다. 수많은 음악가와 음악교사 그리고 유행가 작곡가와 가수들이 펼친 식민지하의 일본식 가창운동을 광복 이후 청산하지 못한 결과 오늘날 가라오케, 비디오케 등 일본문화사업이 노래방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 또한 그 음악가들의 친일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들에게 과제로 남는다.

■ 노동은(목원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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