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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작곡가 이흥렬의 친일활동에 관한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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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병웅(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어제는 친일, 오늘은 친미 반공
 말년에 실명의 상태에서 FM라디오 방송을 타고 흐르는 가곡을 들으며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어!"라며 음악가로서의 생을 매우 만족해 했다는 원로 음악가 이흥렬(창씨명 直木興烈)을 두고 음악계 일부에서는 '한국의 슈베르트' 또는 '한국가곡사의 큰별' 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이흥렬 스스로 해방 이후 각종 대담과 기고문(『예술원보』,『숙음』,『월간음악』등)을 통해 꾸준히 강변해 온 것처럼 음악계에는 그가 항일 민족음악가이자 민족교육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작품이 보여 주는 선율의 서정성과 서양음악의 초창기 수혈자(輸血者)로서 근현대가곡사를 개척해 온 공적을 두고 진행된다. <바위고개>, <꽃구름 속에>, <어머니의 은혜>, <고행 그리워> 등 50여 곡의 가곡과 동요 60여 곡. 군가와 국민가요 1백여 곡, 각 학교 교가 2백여 곡을 지은 작곡가의 위치에서 50여 년을 음악 교육에 투신한 그를 둘러싸고 자의반 타의반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셈이다.

19세의 나이로 동경 유학을 감행하여 스물 두 살이 되던 1931년에 동양음악학교(현대 동경음악대학, 피아노 정공)를 졸업한 그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작곡가, 음악교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악단조직가로서 펼쳐낸 활동상은 가히 한국 음악계의 실력가다운 면모이다. 그러나 다재다능한 외형상의 업적에 힘입어 항일민족음악가와 고매한 음악교육가로 포장된 이흥렬의 음악 세계와 활동 내력은 선전된 사실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선 그는 평소 신념대로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민족과 국가가 있다"는 논리에 따라 근현대의 격변기마다 분명한 정치적, 음악적 태도를 취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 동조자로, 해방과 분단 공간에서는 친미 반공주의자로, 군사 정권 아래서는 군사문화 협력자로서 활약하였다.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작.편곡 지휘자로서, 음악교육가로서 일본 음악의 전국적 이식과 전쟁 음악의 전국적 확산을 도모하고, 학생들이 친일행위를 하도록 동원시켰다.

해방이 되자 이흥렬은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한 방패막이로서 '민족의 자결과 순수음악'의 기치를 내걸고 반공주의자가 된다.

그가 살아 남기 위해 모색한 길은 정치적으로는 미군정의 한반도 지배 구도를 위한 '반공, 반탁'에 응답하면서 음악적으로는 진보 진영의 '친일음악 청산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대응 논리로 '정통적 순수음악'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잔재와 친일음악의 청산,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서양음악의 주체적 수용'의 문제가 음악계의 시대적 과제로 부상되어 모두가 나서서 역사의 궤도를 바로잡아야 할 때 이흥렬과 그의 친일 동료들은 친일에 대한 자기 반성과 역사적 과제 해결의 길을 회피함으로써 스스로 새 인간으로의 탄생을 거부했던 것이다.

서양의 고전, 낭만 음악의 적자임을 자처한 그는 순수음악론자로서의 보신을 꾀하던 중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민족음악 진영 탄압(1947년 8월 15일~1950년 6월25일 전후)을 기회로 삼아 입지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 손에는 '순수음악'을, 다른 한 손에는 '반탁'이라는 정치 구호를 들고 상황에 따라 흔들어댄 그의 정치력의 승리였다.

반공 음악의 전사로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군사 정권 아래서 친일과 친미의 대가로 사회적 지위를 보증받은 그는 해방 이후 한국교육음악협회의 위원장, 우일 문화 단체 총결집체인 문화총연합회(현 예총의 전신)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한국작곡가협회 조직 및 부위원장(1957년), 서울시 문화위원(1960년), 문교부 교육정책심의위원회 위원, 한국음악협회 고문,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고, 풍문여중고, 숙명여중고, 배화여중고, 이화여대 음대 교수,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수도여사대교수, 고려대 교수를 거쳐 1963년 숙명여대 음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10년 가까이 재직하였다.

또한 군사 정권하에서 육군정훈학교 국방대학원에 나가 군가교육을 담당하였고, 새마을 운동의 일원으로서 직장합창, 교원합창, 어머니 합창 등을 활성화시키면서 매우 뿌듯해 했다.



 ●피아노로 수놓은 일본 흠모증
 근현대의 격변기를 성공적으로 넘기면서 다채로운 공적의 소유자로 추앙받는 이흥렬! 이흥렬의 친일행각은 주로 피아니스트, 작편곡 및 지휘자, 음악교육가 등 세 가지 방향에서 해방 직전까지 왕성하게 진행된다. 해방 이후에는 피아노 연주를 그만두고 작곡가와 교육가의 역할에만 전념했다.

원산의 명사십리에서 어머니의 기독교적인 영향 아래에서 자란 그는 원산에 출몰하는 군함의 풍경과 이탈리아 취주악대의 장엄한 행진곡에 심취하였고, 선교사의 풍금소리와 성가대의 합창소리에 매료되어 음악인으로의 길을 결심하게 된다. 이러한 취주악과 교회음악은 훗날 그가 군가를 다작(多作)하여 군사 정권에 화답하고 해방 이후 친미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는 데에 정서적 동질감을 제공하게 된다.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조선음악협회(1941년 1월 25일 결성)가 조직되어 신체제하에서 조직적 통제와 지휘 체계가 이루어진 1940년대에 이르러 음악보국(音樂報國)운동, 군가방송의 일상화, 국민가집(國民歌集)발행 등으로 민족적 음악정서는 차단되고 생활음악의 군가화가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이흥렬은 피아니스트로서 친일 행보의 보폭을 가다듬고 흔들림 없이 각종 친일 음악행사에 참가한다.

총독부가 주도하고 조선음악협회가 주최한 '음악보국주간 음악대연주외(1941년 6월 4일)가 부민관(府民館)에서 열렸다. 궁성요배, 묵도(默禱), 국가제창, 시음(詩吟) 순으로 시작된 이 행사에 이흥렬은 피아노 연주자로 참가하여 '시국하 긴장된 생활에 활기를 넣고자'하는 국책적 행사를 치러냄으로써 일제의 침략 전쟁에 예술봉공(藝術奉公)하였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아세아 천지에 신생의 광명이 비치니 새로운 역사의 여명을 노래하자"며 1942년 12월 20일 부민관에서 '연말결산 부민 음악감상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이흥렬은 김자경(金慈景), 박태현(朴泰絃) 등과 함께 참가하여 <대일본의 노래>, <일본조곡(日本祖曲)>, <흥아해인곡(興亞行進曲)>의 반주를 맡아 일본 군국가요 대합창의 무대를 빛내 주었다.

또한 신체제하에 문필보국하자며 각종 문학 단체들이 통합하여 '반도조선문인보국회'를 결성하고 1943년 4월 17일 부민관에서 발대식을 갖는 자리에 일본 조선지도총책 히라마 분쥬(平間文), 마금희(馬今喜), 계정식(桂楨植)과 함께 반주자로 참가하여 문필보국에 음악보국으로 답례하였다,

피아티스트 이흥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생산현장 위문행각까지 벌이게 되는데, '총후(銃後) 산업전사의 생산력 증가와 전쟁정신 배양'을 위해 국민개창 운동의 첫 사업으로 1943년 5월에는 총력연맹과 지방군연맹이 공동 기획한 '국민가창지도대'에 김성태와 함께 편성되어 강원도 강릉면에 가서 군국가요를 보급하기도 하였다.

지휘자1명, 반주자 1명, 독창자 2명으로 편성된 이들이 침략 전쟁을 위한 전력물자 생산에 내몰리고 있는 동포들에게 가르친 것은 일본의 군국가요인 <바다로 가면>, <애국행진곡>, <청국신토의 가(淸國神土의 歌)>, <대일본 청소년단가>, <대일본 부인회가> 등이다.

 현제명, 마금희, 고종익(高宗益), 김성태(金聖泰), 이흥렬 등이 참가한 국민가창지도대는 3개조로 편성되어 수원, 화천, 인천, 개성 등으로 군국가요 보급활동의 장도에 올랐다(『매일신보』,1943년4월24일자).

이로써 군국가요 보급의 역군이 되어 국민개창 운동의 나팔수로 성장한 이흥렬은 해방 직후 경성의 가두에서, 한국전쟁중 경남 도청 앞 8.15기념식장에서 피난민에게 새로운 노래를 지어 국민개창 운동을 벌인 바 있다.

한편 소화 15년(1940년)에 한반도 일본 음악 지도책으로 파견되어 총력연맹 산하에 친일음악의 지휘부인 조선음악협회를 조직하고 반도음악계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며 국민개창 운동을 기획한 이가 성악가 히라마 분쥬이다. 그는 임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1943년7월12일 부민관에서 '고별음악회'를 열었다. 이 행사에 이흥렬은 피아노 반주를 맡아 줌으로써 석별에 따른 그에 대한 아쉬움과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등 각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가곡과 일본 가곡이 주로 발표되던 강장일(姜長一, 1942년10월15일), 이영선(李榮璇, 1943년6월25일), 정영재(鄭榮在, 1943년10월25일)의 독창회에 피아노 반주를 맡아 일본 음악 교육의 총실한 수업자로서의 역량을 한껏 과시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홍난파(洪蘭坡)와 더불어 '경성방송관현악단' 창설(1936년)에도 참여한 그는 피아노와 편곡을 맡아 일본 군국가요인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태평양행진곡>, <황국 정신을 되새기며> 등을 방송에 내보내기도 하였다. 이를 시발로 홍난파, 김태연(金泰淵)과 함께 조직한 성서(城西) 트리오의 정기적 연주 방송, 한국전쟁중의 군가방송 등 1960년대 말 방송가요 심사자로 방송에 참여하기까지 그의 방송 관계 역사는 30여 년에 이른다.



●친일음악보국의 단위부대 지휘자
일제 식민지 시기에 내선일체, 일본 음악 개창, 음악보국의 실천단위부대로서 친일을 행한 대표적인 음악 집단으로 경성후생악단[京城厚生樂團, 이사장 현제명(玄濟明)]과 대화악단(大和樂團, 단장 윤두선)을 들 수 있다.

경성후생악단은 '총후 국민음악 보급의 정신대'를 자임하며 일본의 군국가요 보급과 전사 위문, 전쟁사기 고취를 위한 지방 순회공연을 담당하고 징병제 실시를 찬양한 친일음악의 첨병이었다.

본래 이 악단은 김생려(金生麗)를 중심으로 1942년4월7일 발족되어 노래로 일본 사랑에 신명바친 일본 국민음악의 프리마돈나 김천애(金天愛)와 이인범(李仁範)을 간판 스타로 내세워 활동을 하다가 1945년5월에 현제명을 중심으로 제2기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이흥렬은 편곡 담당자로 합류한다.

대화악단은 '황국신민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화숙(大和塾) 안에 1944년10월에 창단되었다. '반국가적 음악을 축출하고 웅대한 일본 음악을 수립하는 것을 표방하고 활동함'이라는 창단 목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조선적인 것과 조선음악 일반에 대한 부정과 폐기를 감행한 친일의 금자탑이었다. 이 악단의 지휘자가 이흥렬이다. 이흥렬은 피아니스트로서 연마해 온 친일 수업에 힘입어 그의 음악 조국 일본으로부터 이 두 단체에 중용된 셈이다.

1945년5월 경성후생악단의 신 발족에 즈음하여 이흥렬은 악단의 편곡 담당자로서 함북 일대 생산지를 위문 연주(1944년6월17일경)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4년8월12일부터 19일까지 강원도 해안 지대(삼척 중심)의 어촌과 광산 지역을 순회하는 위문 연주를 하였다. 곧바로 (1944년 8월22일부터 9월 7일까지 호남 지역 순회 연주를 착수하고 공연 지역 : 이리, 군산, 김제, 정읍, 신태인, 남원, 광주, 전주), 이어 1944년9월12일부터 13일까지는 경성 지역 공연을 치어냄으로써 총후 국민의 후생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지휘자로서의 이흥렬은 대화악단을 이끌고 1944년 4월 2,3일에는 평양 대화숙 주최, 총독부 법무국 후원으로 부민관에서 '합창과 실내악의 밤'을 개최하였다, 소프라노 유은경(柳恩卿)과 테너 윤두선(尹斗善), 황학근(黃學根)등과 함께 경성 공연을 가진 이들은 개성, 인천, 원산, 고원, 마산, 안변 등으로 순회 공연을 하였다. 반도의 남반부로 방향을 돌린 이들은 대전, 전주, 이리, 광주, 부산, 대구 지역을 순회함으로써 '웅대한 일본 음악 수립'을 위해 전국을 무대로 전방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친일행각 외에 작곡도 열심히 하여 끊임없이 작품 생산에 매진했는데 울 밑에 선 <봉선화>로 잘 알려진 김천애(1942년3월2일)와 김명신(金明信, 1942년5월15일)의 독창회에서 그리고 테너 하대응(河大應)에 의해 그의 작품 <자장가>와 <부끄러움>, <사라진 그대> 등이 불려진 바 있다.

한편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 조선의 교육 현실은 음악교과서의 85%가 일본의 창가로 구성되어 교육되고,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황국 무궁의 생존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학교에서의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학교교육이 군대교육처럼 엄하고 철저하게 실시되어 일본어로 가르치지 못하거나, 조선의 동요나 노래를 가르치면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각 학교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음악수업을 보증받을 수 있었던 이흥렬이 식민지 기간 동안 교편을 잡은 곳은 원산 광명보통학교(1931~1945), 경신학교(儆新學校, 배재중학 재임시 음악 강사) 등 네 곳이다. 일본에서 동양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일제에게는 그의 수업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다.

음악교육가로서 그가 남긴 친일 흔적은 그리 많지 않은데 1938년7월9일 경성방송국에 경성보육학교(京城保育學校, 이하 경보) 합창단과 경보생도합창대를 이끌고 출연하여 그의 지휘 아래 일본 군국가요인 <애국행진곡> 등을 합창케 하여 방송한 것을 시발로 하고 있다.

그가 광명학교에서 경성보육학교로 옮겼을 때 그곳에는 홍난파가 근무하고 있었다. 친일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와의 첫 만남은 그에게 많은 영행을 주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재직시에 홍난파와 함께 경보학생들을 이끌고 개성, 평양, 신의주 등으로 연주 여행을 떠난 점이나 그와 함께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한 점, 성서 트리오를 조직한 점 등으로 미루어 친일로의 활동 반경과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기반이 확대되고 있었다.

1942년11월10,11일 양일간 부민관에서 제1회 '조선음악경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성악부, 제금부(提琴), 양금부(洋琴), 음간부(音價) 등 4부로 나뉘어 치러졌다. 조선음악협회가 주최하고 총독부, 군사령부, 『매일신보』가 후원한 이 행사는 총독부 학무국장을 대회위원장으로 하여 일본인 히라마 분쥬, 계정식, 현제명, 김재훈을 중심으로 각 부의 심사위원이 배치되었는데 이흥렬은 박경호(朴景浩), 김메리와 함께 양금부 심사전문위원을 맡았다.

행사의 목적은 '불건전함 음악(조선음악을 지칭함)을 말살하고 국민(황국민을 뜻함)의 지조를 견고하게 하며, 시국에 적절한 국민음악을 확립하여 대동아 성전 완수에 매진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였다. 때문에 경영 과목 중에는 무기나 전함, 비행기 등에서 발생되는 소리에 대한 감별력을 조기에 교육시켜 전력에 보태고자 '음감'이 심사되었으며 각 학교는 음감 훈련을 해야 했다. 곡목에 있어서도 과제곡이 주어졌는데 독일, 이탈리아 가곡 중 1곡, 일본 가곡 중 1곡, 국민가요로는 <대동아행진곡>, <애국의 꽃>, <태평양 행진곡> 중 1곡을 필수적으로 불러야 했다.

이 행사는 조선에 대한 일본 음악교육의 진척 정도와 조선인의 황국신민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험대가 아닐 수 없다. 일제 말 친일음악의 실세들이 일제와 하나 되어 꾸며 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흥렬이 배재중학교 재직중에 남긴 친일 흔적이다. 그가 경보에서 배재로 옮기게 된 경위는 그의 최고 음악 선배인 김인식(金仁湜)이 일본말로 가르치지 못한다 하여 서무과로 밀려나면서 가능했다. 식민지 교육현실의 비운의 한 토막이다.

이렇듯 피아노 연주자로서 일본을 노래하고 교육자로서 식민지 조선의 아들 딸들에게 황국 신민이 될 것을 강요한 그가 작편곡 지휘자로서 조선음악의 청소작업을 벌이는 것으로 그의 음악조국 일본을 위한 일정은 막을 내린다.



●오선보에 새겨진 반공사상
느닷없이 찾아온 8.15해방은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해방감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오선보에 그려 온 일본 사랑이 문제였다. 그는 그의 친일 동료들과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먼저 해방 직후 건설된 조선음악건설본부(1945년 10월 결성)에서 현제명, 채동선(蔡東鮮), 김성태, 박태준(朴泰俊)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함께 "새 시대엔 새 노래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가요를 다수 작곡하여 거리, 직장, 방송을 통해 국민개창 운동을 벌임으로써 시대에 편승하는 기민한 현실 적응력을 발휘하였다.

좌우대립이 한창일 때 채동선, 박태준, 윤용하(尹龍河), 박태현(朴泰鉉) 등과 함께 고려음악협회(1945년2월)를 결성하여 '반탁'과 '순수음악'을 주장하며 존립을 향한 저울질을 해본다. 하지만 그 자신은 '반탁'을 통해 미군정의 지배 구도에 들어가게 되고, 미군정의 민족음악 진영에 대한 물리적 진압에 힘입어 친일 청산의 요구가 사라져 감으로써 점차 한국가곡사의 추앙받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1945년10월 이흥렬은 8여 년간 재직한 배재중학을 떠나 풍문여중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시기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우익 진영의 행사에는 좌익 행사와는 달리 악기나 합창단을 동원시키기 어려웠는데 이흥렬은 자신이 재임하고 있는 풍문여중 학생들을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동원시켰음'을 자랑삼고 있다.

다시 경기여고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긴 그는 여기서 훈육주임 보직을 맡는데 당시 훈육주임이란 좌익 학생들을 철저히 단속하는 직책이었다. 이흥렬은 해방과 동시에 이미 반공 인사가 되어 있었다. "적색분자를 하루바삐 소탕하여야 한다"고 독백하면서 '때로는 눈물까지 흘린'그이고 보면 근현대를 지나옴에 있어 반공은 그에게 있어서 버팀목이었음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경성방송국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승리의 노래> 등 군가와 국민가요를 다수 작곡하여 방송하였고, 38선을 넘어 평양 입성 환영식을 가진 이승만 정권의 요청으로 문화공작대로서 윤용하와 함께 군가와 국민가요 보급을 위해 철원, 금화까지 갔다. 수원 미5공군 비행장교회 합창단 지휘자로 임명되어 전쟁중에 '퍽 행복된 생활'을 보내다가 사령부로부터 감사장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한국작곡가협회(1957년)를 조직해서 흐트러진 음악계를 가다듬고 오늘의 예총 전신인 문화총연합회에서 최고위원을 지냄으로써 안정적인 활동의 조직적 토대를 갖게 되었다.

1960년대에 그는 한국방송가요심의위원회 위원장의 직책을 갖고 소위 왜색풍과 불건전한 노래를 가려내는 '가요정화작업'을 매월 정기적으로 벌여왔다. 일찍이 왜색으로 훈련된 후 왜색으로 음색을 내고 그 음색으로 조선 천지를 물들이려 한 자가 왜색풍과 불건전한 음악을 가려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해방 공간에서 음악 영역에 주어진 민족사적 과제를 싸안고 민족음악의 수립에 매진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한 민족음악가들의 작품과 인기있는 대중가요가 전면적으로 이 '가요정화작업'을 통해 사라져 갔다.

이 당시에는 이미 <산유화>, <인민항쟁가(김순남 작)>, <진주라 천리길>, <천리원정(이면상 작)>, <무정천리>, <울며 헤진 부산항>, <황포 돛대(조명암 작)> 등 해방 공간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많은 곡들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금지된 사유는 가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작곡가나 작사자가 월북했기 때문이었다.

친일과 친미에 의한 민족음악 제거 작업이 방송의 영역에서 음악가 이흥렬을 정점으로 지속되고 있었던 바 그의 재임 기간 중 방송금지의 족쇄는 풀어질 리 만무했다. 이제 가곡사에서의 영향력 못지않게 국민 계몽을 위해, 국군의 사기 앙양을 위해, 애교심을 위해 그가 그린 수많은 오선의 선율은 무언의 정서로 계속 전해지고 있다.

음악가로서, 교육가로서 그의 공적을 두고 우리의 현대사는 그에게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1958년 8.15해방을 기념해 그에게 방송문화상이 수여되고 서울시문화상(1961년), 대통령문화훈장(1963년), 교육공로상(1964년), 예술원상(1967년)이 안겨졌다.



 

 ■참고문헌
『예술원보(藝術院報)』,제20호, 1976.
『매일신보』,1941~1945.
『숙음(淑音)』,제5집,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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