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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조선데스크] '홍난파'를 보는 눈의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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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2008년10월) 저녁, 서울 종로구 홍파동 언덕배기의 홍난파 옛집에 방문객들이 들어섰다.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붉은 벽돌색 서양식 2층 주택이다. 거실에 놓인 접이식 의자 50여 개는 일찌감치 동났다. 7시 정각, 테너 김진원이 무대에 올랐다. "홍난파 선생이 살던 집에서 '봉숭아'를 노래하려니, 엄숙하고 떨립니다." 그는 "울밑에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제1회 홍난파 추모음악회를 시작했다.

서울시가 이 집을 사들여 작년 개보수를 마친 뒤 처음 열린 추모음악회다. 홍난파는 1935년부터 1941년 타계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소프라노 강혜정이 홍난파의 '사랑'을 부를 땐, 거실 앞쪽 벽난로에서 홍난파가 지핀 불씨가 금세 피어날 듯했다.

'그리운 금강산'으로 1부가 끝나자 작곡가 최영섭(79)씨가 일어섰다. "원래 이 근처에 홍난파 기념공원을 크게 만들려고 했는데, 전(前) 정권에서 홍난파가 1% 친일을 했다고 해서 이완용 같은 매국노로 몰아 무산됐어요. '봉숭아'로 독립을 고취했다고 해서 일제 경찰에 끌려가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데…." 최씨는 '봉숭아'는 3절 가사에 본뜻이 담겼다고 했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그는 "자녀들과 이 근처를 지날 때, '봉숭아'를 지은 분 집이라고, 꼭 알려주세요. 그분은 친일파가 아니라고요"라고 신신당부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4월 '친일(親日)인명사전'에 실을 4776명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홍난파를 포함시켰다. 일제 말기 친일단체에 가입했고, 일본을 찬양하는 노래를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홍난파는 생애 말년 3,4년의 이력 때문에 최근 친일파로 몰려 발길질당했다. 1969년부터 경기도에서 열리고 있는 '난파음악제' 홈페이지에는 "어떻게 친일파의 이름을 딴 음악제를 개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올라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 35년간의 역사는 홍난파를 친일(親日)과 반일(反日)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엔, 너무나 복잡하다. 무엇보다 그를 제외하곤 우리 가곡을 논할 수 없을 만큼 음악사에 남긴 자취가 크다.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사공의 노래' '장안사'….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듣고, 위로받았던 빛나는 가곡들이 그의 품에서 나왔다. '국민동요'처럼 불리는 '고향의 봄'이나 '낮에 나온 반달', '퐁당 퐁당'은 또 어떤가.

음악사에 남긴 공적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의 친일행적까지 두둔할 순 없을 것이다. 홍난파를 '조선 가곡의 선구자' '근대 음악의 선구자'로 기리는 홍난파가옥에도 그의 친일 활동이 전시돼 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잡혀간 뒤 전향 논문을 발표했고, 일본 군가 몇 곡을 썼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흠결 때문에 그의 모든 생애와 예술을 '친일'로 단죄하고 역사에서 지워야 한다는 극단론이다. 이젠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그의 삶 전체를 균형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용량을 우리 사회도 가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중에 태어난 자의 특권으로 앞 세대를 비판하지 말라"는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성찰이 빠진 친일 논쟁은 도덕적 위선이나 진흙탕 개싸움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게 지난 몇 년간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얻은 교훈일 것이다.

조선일보/김기철 문화부차장대우/200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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