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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산유화[김소월 시/김순남 곡]

운영자 2 2984
어린 가슴에 묻은 ‘아버지’
태어나 한번도 뵌적 없는 아버지. 이유도 모른채 쌓이는 그리움.잠결에 들은 아련한 이름. 월북한 ‘산유화’ 작곡가 김순남.'아버지가 공산당이라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연좌제로 모든게 ‘끝장’ 나던 시절. ‘아버지 이름·비밀을 입밖에 내지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그녀의 목소리엔 「품격」이 있다. 첼로조의 낮게 깔리는 음성.지적인 분위기. 절제된 감정으로 결코 들뜨거나 헤픈 법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때로 우수에 젖게 한다

. 김세원(1945~). 64년에 방송을 시작해 33년동안 라디오 음악 방송만을 고집해온 중견DJ. 70년대 들어 「밤의 플랫폼」(동아방송) 「안녕하세요 김세원이에요」(MBC) 「김세원의 영화음악실」(KBS) 등으로 인기를 누렸다. 또 국내에 샹송 칸초네 등 당시로서는 미개척분야인 유럽음악을 보급한 주역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88년 10월에는 방송이 아닌 또다른 이유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었다. 월북한 천재 작곡가 김순남(작고)의 외동딸. 반포동 자택에서 만난 그녀는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속에 묻어둬야만 했던 유년시절의 쓸쓸한 추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편집자>

고희를 넘긴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건만 어머니(문세랑·75)는 요즘도 나와 걸핏하면 싸우신다. 아니 성격이 괴팍한 내가 어머니께 시비를 걸어 스트레스를 푼다는 표현이 옳겠다. 어쨌든 어머니는 그런 내게 역정이 날 때마다 꼭 들고 나오시는 말씀이 있다.『누가 애비 딸 아니랄까봐 어쩌면 성격이 지 아버지랑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았누』

아버지. 어머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았다는 아버지를 그러나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땅」 북한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무거운 한숨소리

내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게 된 것은 두 해가 지났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난 50년, 내가 5살이 됐을 때였다. 할머니 손을 붙잡고 고모님 댁에 놀러갔던 날이었다.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커다란 물건이 하나 있었다. 널찍한 대청마루에 놓여있던 피아노. 내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 보자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 거다. 한번 쳐봐라』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건반을 몇 개 눌러보았지만 어른들의 무거운 한숨소리에 기가 죽어 곧 내려오고 말았다. 그날 할머니는 아버지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꼬박 8시간을 한자리에 앉아 피아노를 치다가 졸도했을 정도로 광적이었단다. 그러나 왜 내곁엔 그 아버지가 없는지 설명해 주시진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 어머니를 따라 피난가던 시절. 아버지란 존재는 어린 내 가슴에 더욱 절실히 와닿았다. 다른 아이들은 건장한 아버지 어깨 위에 목마를 타고 가는데 내게는 목마를 태워줄 아버지가 없었다. 철없이 우는 나를 어머니가 무거운 짐과 함께 등에 업고 그 험난한 피난길을 떠나야만 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 대구와 마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6학년이 되어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나는 학교를 5번이나 옮겨다니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내성적인 성격에 원칙과 규범을 중시하는 분. 어머니는 피난지에서 역시 교사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집불통인 나 때문에 어머니의 피난생활은 더욱 힘들었다. 고모댁에서 본 「아버지의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떨굴 수 없었던 나는 어머니를 한사코 졸라댔다. 피아노를 사내라고.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전쟁통에 피아노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어머니는 정말 내 앞에 피아노를 갖다주셨다. 마분지에 검정색 흰색 건반을 오목조목 그려넣은 피아노. 내 손가락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목소리로 피아노소리를 내주시며 어린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셨다.

잊지못할 아버지의 피아노

아버지가 어떤 분이란 걸, 아버지가 내곁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어느날 저녁 어머니는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외할머니와 아버지 얘기를 주고받으셨다.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말투는 다분히 원망조였다. 잘생긴 얼굴에 뛰어난 피아노 솜씨로 장안의 로맨티스트였던 아버지에게 수많은 여자들이 따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세상물정 모르는 애같은 양반이었다며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불평은 계속됐다.

그러나 엄청난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유명한 가곡 「산유화」가 아버지가 만든 노래라는 사실, 그리고 그 작곡가가 공산주의에 물들어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내 가슴은 쿵쾅거렸다. 아버지가 공산당이라니. 당시는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 좌익활동을 했거나 동조한 사람의 친인척까지 공산당으로 몰려 엄청난 수모를 당하던 시대였다. 친척 중에 납치된 것이 아니라 월북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모든 것이 말 그대로 「끝장나는」 사회. 어린 맘에도 나는 내가 들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입밖에 꺼내서는 안된다고 굳게 다짐했다.

경향신문 96. 8. 20
2 Comments
김종영 2007.01.08 11:38  
  감사합니다.
김원용 2007.04.26 12:29  
  내가 아는 음악하시는 분 중에 작곡하시는 한 분이 생각 납니다.
작곡하는 입장에서 보면 김순남씨의 곡이 좋은 곡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런 아픈 사연이 있군요.
민족의 아픔을 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