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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보리피리[한하운 시/조념 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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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우리 민족의 시는 곧 「시가」를 의미했다. 그만큼 시와 노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모든 노래는 시였고,시가 아닌 노래 또한 없었다. 그러나 서양에서 새로운 현대시의 전통이 유입되면서 우리의 시는 삶의 언어와 유리된 채 일부 전문가들끼리의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암호 주고받기로 변질된 것들도 많다. 아직도 여전히 좋은 시란,진정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시란 노래와 자연스레 결합된다.「노래가 될 수 없는 시란 향기를 간직하지 못한 꽃처럼 이미 시들어버린 언어의 시체」라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중략)/
/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 가는 길…… /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 으면 /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 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한하운, 「전나도길­소녹도로 가는 길에」전문)


소록도로 간다. 반도의 남쪽 끄트머리 고흥반도를 지나 녹동항까지,다시 그곳에서 지척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 소록도로 들어갈 것이다. 장마전선이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라디오 일기예보다. 서울에서 순천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햇빛과 비가 교차하는 불순한 일기의 터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남도길,황토길을 한하운(본명 태영,1919-1975)은 울면서 갔다. 인간사의 거리가 그리워 「보리피리 필리리」 불며 서럽게 걸었다.

나병을 짊어지고 인간들에게서 추방돼 살아 있긴 하되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비록 그 인간들의 거리가 오욕칠정으로 또 다른 고통 속에 흘러가는 이전투구의 거리일망정,그리웠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하나 없어지고,또 자고 일어나면 발가락 하나 없어지는 서러운 남도행 천리길을 시인은 걸었다.

한하운은 함경남도 함주에서 그 지방 명문가의 2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뛰어난 머리와 예체능쪽의 소질이 돋보였던 그는 보통학교를 마치고 부친의 뜻을 좇아 이리농림학교로 유학을 온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고 유난히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고향 여학생과 더불어 로맨틱한 학창시절을 보내다 5학년 때 청천벽력 같은「꽃소식」에 접한다. 온몸에 부스럼이 나기 시작하고 살이 썩어들어가는 증세를 발견한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을 알린다. 사랑하는 여인은 헌신적으로 그의 상처를 닦아주고 갖은 고생을 마다 않고 약을 구해다 주지만 그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다 끝내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간다. 그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이던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었지만 맏상주인 그는 문상객들 때문에 바깥에 나가지도 못한 채 골방에서 숨죽여 울었다. 해방후 3.8선이 갈라지고 소련군이 진주한 상황에서 그는 약을 구하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월남을 한다.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피던 배꽃같은 여인과도 이별이었다.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
/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
/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
/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짖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 /
/(중략)/
/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
/ 쩔룸 쩔룸 다섯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
/(중략)/
/ 지나는 거리 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
/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자화상」중에서)


지금은 약도 많고 초기에 치료만 하면 완치되는 게 이른바 「한센병」이지만 예전에는 나라 전체가 가난하고 힘들어서 나환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떼를 지어 거리를 방황하고 구걸행각으로 연명해야만 했다. 그들이 가족과 인간사와 격리돼 한많은 삶을 살아야 했던 곳이 이곳 소록도. 병원 직원들 거주지역과 환자 거주지역으로 분리된 섬 전체를 국립소록도병원의 협조를 얻어 일주한다. 한때 6천명까지 수용됐던 이곳에 지금은 평균연령 69세의 노령 환자들 1천여명만 남아 있어 폐쇄된 마을이 많다. 생활능력이 있는 환자들은 전국 96개 정착촌에서 정상인들 못지 않게 행복하게 살아간다. 환자들의 마을 위편 도로로 새소리를 음악 삼아 천천히 달리는 데 멀리 흡사 이슬람 사원을 연상시키는 돔 형태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화장시켜 유골을 보관하는 「만령당」이다. 한하운은 이곳 병원에 입원한 적은 없지만 약을 구하기 위해 몇차례 다녀간 기록을 남겼다. 한하운은 1949년 당시 카프계열의 시인이었던 이병철의 추천으로「신천지」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일찍이 한국 현대시에서 지극한 고통의 상징어로 등장한 나환자는 김동리가 「바위」에서,미당 서정주가 화사집 시대에 발표한 시들에서 중요한 시적 소재로 처음 등장한다. 그 소재가 이제 한센병에 걸린 당사자에 의해 새로운 차원에서 시로 승화되는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명동성당 방공호에서 시편을 정리해 세상에 첫선을 보인 한하운 시초」(1949)는 그 뒷세대의 기라성같은 시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잘 알려진 일화지만 시인 고은은 중학교시절 길거리에서 「한하운 시초」를 주운 뒤 운명적으로 시인이 되기를 작심했다. 뒷날 신경림의 시편에서,그리고 김지하의 시편에서도 한하운의 자취는 발견된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씨는 『한하운의 시는 나병환자에 대한 외재적인 시선을 바꾸어놓았고 고통에 짖눌린 그들의 눈으로 본 세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우리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라며 『정상적인 엘리트였다가 일종의 민중적 체험을 하는 추락의 과정에서 토해낸 시편들에는 병든 이의 내적 고통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에 대한 정치적 함의도 발견돼 매우 흥미롭다』고 말한다.

한하운의 시중에서도 「보리피리」는 일반에 가장 널리 알려진 시편이다. 이 시가 다른 뛰어난 시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노래 때문이었다.1957년 작곡가 조념씨(74)가 당시 서울방송라디오(현재 KBS)의 청탁으로「금주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 이 곡을 발표,대단한 호응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서정적인 토속정서가 깃든 시편을 가곡으로 만든 예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곡 자체도 「보리피리」의 정서를 잘 반영하며 신명 속에서 서러움을 불러내는 명곡이었던 것이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필­?니리. /
/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피­?니리. /
/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니리 /
/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 /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니리』(「보리피리」 전문)


일제시대 악독한 일인 병원장이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환자들의 피땀 얼룩진 노동력으로 만들어놓은 소록도의 중앙공원은 각종 열대 수종과 화려한 조경으로 찾는 이들을 놀라게 만든다. 올해로 개원80주년을 맞은 국립소록도병원의 개원사십주년 기념탑 아래로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넓고 평평한 돌에 새겨져 있다. 한참 그 시비를 들여다보는 나그네의 귀에 문득 흥타령 한가락이 들려온다.웃고 살아도 괴로운 세상,울기까지야 왜 허리,인생은 고해라더니 설움없는 이 뉘 있으리… 놀라서 돌아보니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하얀 팻말 하나를 지나쳐서 공원 남단의 꽃그늘 속으로 느리게 사라진다. 인간사의 거리를 갈라놓는 하얀 팻말 위의 투박한 경고문 한구절­. 「이곳은 우리 병원 환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오니 병원장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세계일보 960713
1 Comments
지네 2010.03.29 19:27  
조금달라요...제가 아는 내용고ㅏ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