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가곡이야기 > 기사와문헌
가곡이야기

정지용 탄생 100주년에 부쳐…“20세기 한국어 발명한 최초 전문시인”

운영자 0 2623
올해는 시인 정지용과 김소월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두 시인이 동갑임을 알고 놀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생물학적 연령이야 어쨌든 두 시인의 시세계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의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최초의 모더니스트란 호칭을 받아왔다.
그렇지만 시란 언어로 빚어진다는 사실을 열렬히 자각하고 실천한 그를 20세기 최초의 전문적 시인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린다.
만해와 소월도 현대의 고전이 된 시집을 선보인 훌륭한 시인으로 남아 있기를 지향하는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만해에게 시는 여기(餘技)였고, 소월은 25세가 넘어서도 시인으로 남아 있기를 지향하는 시인은 아니었다.

25세 전에 ‘진달래꽃’을 낸 소월은 그후 이렇다할 작품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지용에게 시는 사춘기 감정을 무절제하게 토로하거나 축축한 감상(感傷)주의에 탐닉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엄격한 기율을 스스로에게 과하여 적정하고 경제적인 언어 구사를 통해 개개 시편의 완벽성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의 시가 가지고 있는 정형적 요소와 옛 가락은 정지용에 와서 일단 극복된다.
고전주의의 전통이 결락되어 있는 우리 시에 고전주의적 엄격성의 본을 보여준 것이다.
시의 일반적 수준이 정지용 이후 한수 높아지게 된다.
특히 토박이말의 발굴과 활용에서 보여준 그의 선구적 기여는 우리 시의 성숙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가 구사한 언어는 발명이란 이름에 값할 만큼 창의적이고 개성적이다.
그 영향력은 압도적이어서 윤동주·청록파·김춘수의 시는 그의 선구적 시범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정주·유치환·오장환·이용악 등에게도 그는 극복해야 할 반면(反面)교사였다.
초기의 바다 시편에 잘 드러나는 감각적 성향은 후기의 산(山)시편에서 정신적인 깊이로 성숙한다.
시집 ‘백록담’의 고요와 무심(無心)의 경지를 통해 그는 동양 전통으로 회귀한다.
그것은 일제 말기를 대과없이 보내게 한 구심력이 되었으나 광복 이후 정치적 격동기에는 시에서 멀어지는 원심력이 되었다.
이 때의 정치적 행보 때문에 오랫동안 그는 금지의 시인으로 남아 있었다.
해괴하고 애석한 일이다.

해금과 함께 그는 채동선 가곡 ‘고향’ 및 박인수 애창 ‘향수’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오늘 정지용의 시는 다소 퇴색해 보인다.
반세기 동안에 축적된 새 업적이 휘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것의 과거성과 역사성도 작품 가치의 일부를 이룬다.
정지용에게는 은은한 옛 내음이 있고 그것은 심미성의 한 부분이 된다.
이른바 세계화나 지구화의 회오리 앞에서 오늘 민족과 민족어도 시련에 직면해 있다.

인터넷의 폭력적 은어와 비속어는 우리말을 덧내고 훼손시키고 있다.
폭력적 언어는 물리적 폭력의 징조이자 예고이다.
사태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하나의 원리가 폭력이라 할 때 선동적 폭력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고 일제 암흑기에 적었던 정지용은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언어에 대한 기율은 동시에 자기자신에 대한 기율이다.

대중적 영합에 일관되게 저항하고 의연했던 정지용은 문학의 지평을 넘어서 사회적 전범으로까지 되어 있다.
시가 분수 모르는 산문으로 전락해 가고 기율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정지용은 우리가 되풀어 뒤돌아 보아야 할 역사적 선례이다.
문학행위는 선인에 대한 빚갚기이다.
엄격성과 기율을 통해 민족어의 탄력성과 유연성 조성에 기여하는 것이 당대 문학인의 빚갚기일 것이다.
정지용은 여전히 오늘의 시인으로 남아있다.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
[조선일보] 2002-05-07 (문화)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