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가곡이야기 > 기사와문헌
가곡이야기

베이스바리톤 황병덕의 음악인생60년

운영자 0 2929
1998년 4월 18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한국오페라 50년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이날 출연한 70여명의 오페라 가수들 가운데는 78세의 노장 황병덕선생님도 함께 하고 있었다.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무대인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한 이래 언제나 한국 오페라계의 중심에서 가수로서 또는 오페라단장으로 오페라 발전에 정열을 바친 황병덕 선생님이 만감에 서린 모습으로 '프로벤자 내고향으로'를 열창하자 객석은 감동의 도가니로 변했고 이를 지켜보는 후배 성악가들도 할 말을 잊은 듯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음악인생 60년을 기념하는 무대를 마련하고 다시 무대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니 식을 줄 모르는 음악 열정에 머리가 숙여진다.
고희 기념으로 출반한 3장의 음반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고백과 아울러 지나온 삶의 연륜이 추억 속에 묻어나는 참으로 인간적인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왔거니와 8순의 나이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정돈된 모습으로 제자들의 연주회와 각종 모임에 참석해서 후학들을 격려하는 선각자적 정신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1936년,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지휘한 국제음악제 개막 공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 바리톤 독창자로 나선 황병덕선생님의 힘있는 열창은 잊을 수 없는 여운으로 남거니와 한국 오페라 부동의 바리톤으로 그가 관여하지 않은 오페라가 없을 정도로 그의 인생은 무대와 더불어 이어졌던 것이다.

1920년 평양에서 태어난 황병덕선생님은 이미 어릴 때부터 음악에 쉼취 했지만 부친의 반대로 처음엔 음악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부모 몰래 동경음대 성악과에 입학했고 마이니찌 신문사를 비롯한 콩쿨에 계속 입상하자 집안에서도 음악의 길을 반대하지 않아 동경음대를 졸업하게 되었다.
후지하라 오페라단에 입단, 본격적인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하려 했으나 조국에 광복이 찾아오자 평양으로 돌아와 친우들과 함께 예술대를 조직, 평안도 일대를 순회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세력이 마각을 들어냄에 따라 자유를 찾아 1947년 월남하기에 이르렀다. 서울로 온 이듬해 한국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한 것을 필두로 황병덕선생님의 성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연세대학교수로 1985년 정년, 은퇴 할 때까지 음대 학장직을 거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선생님은 1985년 11월 12일 정년 기념 독창회에서 아들 황성엽 교수의 반주로 홍난파의 봉선화에서부터 지난 세월 즐겨 불렀던 우리 가곡을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노래했고 이영조의 창작가곡 초연과 더불어 마지막 무대에서는 제자 합창단이 출연 스승과 함께 있는 뿌듯함을 안겨 주었다.

이제 그로부터 십 수년의 세월이 흘러 음악인생 60년의 기념 무대에서 다시 제자들과 함께 하는 황병덕선생님의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니 감격을 금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오페라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폭넓은 오페라 운동을 위해 한국 오페라단을 창단, 토스카, 파우스트, 오텔로, 등 많은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그는 스스로 맡았던 오레라의 주요 배역도 스칼피아, 이야고, 돈 조반니, 리골렛토, 제르몽, 순교자의 신목사동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역할을 소화해 내었다. 정년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선생님의 호 청운을 딴 청운 성악회를 만들어 활발한 무대를 만들어 오고 있다.

북한산 기슭 평창동의 자택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면서 음악 이외의 어떤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선생님은 언제나 단정한 모습으로 삶의 연륜을 만들어 가고 있거니와 북한산을 오르면 세 속의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 맑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해가는 황병덕선생님의 열정에 찬 삶은 후학들에게 깊은 교훈으로 남는다.

클래식아트 2001년 3월호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