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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오후여담>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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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08-10-29 38면  총03면  오피니언·인물    1128자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한국 가곡의 효시로 알려진 ‘봉선화’의 가사 제3절이다. 소프라노 김천애가 공개 무대에서는 처음으로 1942년에 일본 도쿄의 한 신인음악회에서 부른 이래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 공연 때마다 불러 청중의 심금을 울림으로써 널리 알져지기 시작한 ‘봉선화’는 대표적인 ‘국민 가곡’이다. 1995년 76세에 타계한 김천애는 생전에 ‘봉선화’ 가사의 제1~2절은 제3절을 도입하기 위한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폐부를 찌르는 그 시구가 아니었더라면 ‘봉선화’ 선율은 영원히 사장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천애의 말대로 ‘봉선화’가 세월을 뛰어넘은 생명력을 갖게 한 가사의 작사자는 성악가·연주자·교육자 등으로 활동한 김형준이다. 1950년 66세에 별세한 그는 생전에 봉숭아를 좋아해 해마다 울안이 가득할 만큼 많이 키우며 그 꽃의 모양·생태 등을 나라 잃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빗대곤 했다고 한다. 이웃에 살며 서로 가깝게 지내온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에 노랫말을 지어 붙여 가곡 ‘봉선화’로 다시 태어나게 한 배경의 하나도 그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홍난파는 ‘애수’를 1921년에 발간한 자신의 단편소설집 ‘처녀혼’에 수록해 발표한 뒤로 소설 ‘처녀혼’을 각색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면서 그 막이 오르기 전에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곤 했으나, 당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1925년에 가곡화한 지 7년 뒤에 여성 성악가 최명숙이 부른 음반, 또 그로부터 4년 뒤에 소프라노 박경희가 부른 음반 역시 ‘봉선화’를 국민 가곡으로 이끌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봉선화’외에도 ‘성불사의 밤’ ‘사랑’ ‘고향생각’ 등 불후의 가곡들을 남기고 1941년에 43세로 타계한 홍난파의 예술 혼을 기리는 제1회 홍난파추모음악회가 30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홍난파 가옥’에서 열린다. 그 음악회가 해마다 더 발전해가기를 바라는 것은 음악계 안팎이 마찬가지이리라. 김형준·김천애 등이 ‘봉선화’의 국민 가곡화를 뒷받침했듯이, 여러 장르의 음악가들이 홍난파의 음악을 국제적 걸작으로 가꿔나가는 계기로 발돋움하면서.

김종호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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