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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시와 음악, 그리고 고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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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고 노래한 윤동주는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였다. 그러나 이 죽음으로 그는 이 땅의 영원한 청년시인으로 남게 됐다. 이 시는 그의 옥사 후 3년 뒤에 나온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서시(序詩)`란 제목으로 수록돼 있는데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이를 계기로 해서였다.

▼그 무엇이 그에게도 괴로움을 줬을까. 그 무엇으로 그는 괴로워했을까. 아니, 그처럼 안팎으로 한결같은 순수 애국청년에게도 괴로워해야 할 그 무엇이라도 있었더란 말인가. 앞의 시에 바로 이어지는 다음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함을 볼 때 그에게 괴로운 게 있었던 모양이나 그는 끝내 이를 밝히지 않고 다만 이겨냈다고 한다.

▼어느 평자는 이에 대해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성으로 이끌어 올렸다”고 하는데 `존재론적 고뇌`란 무엇일까. `존재`란 살아 있음이요, 만약 그 `고뇌`라면 이는 그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뇌, 즉 괴롭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사실 그에게는 일제의 피식민지 시대에 살고 있는 삶 자체가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죽거나 아니면 조국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의 해방이게 된다.

▼여기서 그는 결국 죽음을 재촉하니 그의 `또 다른 고향`이란 시가 이를 명증해 준다. “고향에 돌아 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고 했다. 그의 고향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육신, 즉 `백골`의 고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국의 광복이 펼쳐진 그의 이상향의 `또 다른 고향`이었다. 며칠 후 추석에는 모처럼 뜰에 나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되자. 하여, 각자의 마음에 새긴 고향을 바라봤으면.

경남신문 2002. 9. 17 일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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