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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시와 음악, 그리고 고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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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민족적 저항시는 대부분 1938년에서 1941년 사이에 쓰여졌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중국 동남부를 거의 석권하게 된다. 그들은 1941년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태평양전쟁을 발발, 동남아시아 전역을 그들이 말하는 `해방권`으로 편입시켰다. 이에 이르러 세계 제2차대전은 태평양전역으로 확대되는 동시, 미국의 개입을 불러왔다.

▼이 무렵,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은 바로 극성, 그것이었다. 지식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억압과 회유가 시작됐다. 윤동주 같이 억압을 받는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보다 많은 이들이 일제의 회유를 받아들여 혹은 붓을 꺾고 혹은 일제를 찬양하게 된다.
즉, 반일과 친일의 극명한 대조가 나타났으니 태평양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는 참담하고도 암울했다. 올해는 유난히도 친일논쟁이 드세 친일문학인, 친일예술인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아마도 남북통일 분위기가 무르익을 수록 그 반대편에선 친일한 사람을 가려내는 시비도 덩달아 오를 것 같다.

▼이런 시각에 의해 이미 서정주가 친일문학인으로 낙인찍혀야 했다. 무엇보다 가히 가곡의 왕으로 불린 홍난파·현제명까지도 친일예술인으로 분류되니, 이 무슨 비애인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하던 `고향의 봄`은 홍난파의 작곡이다. 1897년 수원에서 태어난 그는 중일전쟁이 있던 해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 이듬해는 대동민우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이후로는 친일가요 `태평양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등을 작곡해 그의 일생 일대 오명을 남기게 되는데 그가 다름아닌 `봉선화`(1920)의 작곡가 아니던가.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는 `고향생각`(1923)은 현제명의 작품이다. 1902년생의 그는 미국유학 중 고국을 그리워해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1938년 이후로 대동민우회·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등의 친일단체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서정주나 홍난파·현제명 등은 윤동주가 괴로워하던 시기를 괴로워하지 않은 것이다.

경남신문 2002. 9. 24 일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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