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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시인 김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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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눌지왕 때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일본에 왕자를 파견해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일본과 고구려는 이들을 인질로 감금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이때 충신 박제상은 볼모로 잡혀있는 왕자를 구하러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신라에서 도망쳐 왔다고 속여 일본 왕의 신임을 얻은 뒤 왕자를 탈출시킨다. 그러나 뒤에 탄로나 고문을 당한다. 그때 일본 왕은 조국을 위한 충정에 탄복해 일본에 귀화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 결국 그는 발바닥의 껍질이 벗겨진 채 화형을 당한다.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지쳐서 망부석이 된다.  //##

김민부 작사 장일남 곡 '기다리는 마음'의 모티프가 된 설화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이 가사는 고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인 김민부는 어릴 적부터 시에 대한 천부적 기질을 타고나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1941년 부산 수정동 태생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로 입선하고 같은 해 시집 '항아리'를 내 주목받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돼 등단한다. 1962년 서라벌예대를 거쳐 동국대 졸업과 동시에 MBC에 입사한다. 개편된 '자갈치 아지매' 등 많은 인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머리 빠르고 손빠른 스크립터로서 명성을 얻기에 족했다.

1965년 결혼한 다음 해엔 부산을 떠나 서울로 진출한다. MBC TBC DBC 등에서 방송작가로 두각을 드러낸다. 어쩌다 다른 프로그램 담당자가 준비가 덜 된 사정을 알고는 즉석에서 상당량의 원고를 메워주기도 했다.

당시 그가 맡은 '후추부인'이란 프로그램은 유머 감각이 뛰어난 데다 재치가 잘 조화된 작품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주위에선 너무 일찍 꽃이 피면 빨리 시들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니 그의 재능을 짐작할 만하다. 그가 하루에 쓰는 원고는 200장이나 되었다. 얼른 상상이 가지않는 숨가쁜 나날이었다.

더구나 서울에서의 생활은 아내의 친정 식구에 대한 생활비까지 담당, 경제적 부담과 아울러 정신적 부담까지 안아야 했다. 방송작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히고 있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마음 한구석은 텅 빈 공동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가 종내 바라는 바는 순수시를, 그의 영혼이 젖어 흐르는 참 문학을 제대로 성취할 겨를이 없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방송의 상업주의적 유혹에 빠지면서 순수문학을 향한 갈구는 더욱 강박관념의 늪 속으로 함몰되어 갔다. 그렇듯 분주한 집필 스케줄에도 1968년에 기어이 제2시집 '나무와 새'를 출간한다. 1970년에는 오페라 대본 '원효대사'를 쓴다. 작곡가 장일남의 작곡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자경 오페라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시집 후기에서 "그동안 너무나 적은 양의 시를 발표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을이 올 때마다 나는 내 목숨을 줄이더라도 몇 편의 시를 쓰고픈 충동에 몸을 떤다"고까지 고백하고 있다.

김민부는 이러한 정신적 황폐감 속에서 당시 동아방송의 인기 프로그램인 '밤의 플랫폼'의 크리스마스 특집을 집필해야만 했다. 집필 분량이 무려 3000장이라면 그 누구인들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지 않으랴. 그럴 즈음 아내와 저녁상을 함께 하고 얼마간의 언쟁 끝인지라 아내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안방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그의 온 몸에는 석유난로의 불길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엉겁결에 가슴으로 불꽃을 덮쳤지만 불길은 아내에게도 번졌다. 두 사람은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1972년 10월 23일, 90%화상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가 숨을 거두면서 "물 한 사발 먹고 유치원에서 균한(아들)이 데려오고 영수(아내) 한번 보고 자야지"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의 나이 만31세였다.

지금도 그의 절친했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 황규정(변호사)은 김민부가 죽던 날 저녁 자기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 약속을 미룬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황규정은 그의 딸을 사무실에 직원으로 오랫동안 근무케 함으로써 친구에 대한 마음의 보답으로 삼고자 했다.

그의 자살설에 대해 친구였던 시인 박응석은 "그에겐 시가 잘 안된다는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당시 7세, 3세 나이의 귀여운 자식들과 소중한 아내, 부모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뤄 자신을 내던질 만한 정신적 충격이 있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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