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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동요작곡 버스기사 이중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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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버스기사 부산 동성여객 버스기사 이중화씨(51). 그가 핸들을 잡는 86번 버스에서는 늘 음악이 흐른다. 연산동을 출발해 남포동을 지나 민주공원으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장년 취향의 트로트가 아니라 맑은 어린이들의 노래가, 웅장한 교향곡이, 때로는 청아한 소프라노의 가곡이 흘러나온다. 21년간 한결같이 그러한 까닭에 그를 기억하는 부산 시민들이 많다.

언뜻 보기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저씨 같지만 이씨에게는 또다른 직함이 있다. 바로 동요작곡가. 부산 지역에서는 이름깨나 알려진 동요작곡가로, 그에게 곡을 달라고 청하는 이들도 꽤 많다. 버스 운전에 동요 작곡이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그 묘한 조합이 바로 오늘 이씨가 즐겁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힘이다.

작곡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요, 집안이 풍족해 음악을 듣고 자란 것도 아니다. 이씨의 어린 시절은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절, 한국전쟁의 와중에 경남 거창에서 6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미처 마치지 못한 채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일손이 아쉬운 가난한 농민의 아들. 10대와 20대 초반까지 그는 흙을 밟으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나던 1970년대 중반, 그도 결심을 했다. '이렇게 농사만 짓고 있을 게 아니라 나도 도시로 떠나서 앞날을 꾸려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는 스물넷에 부산으로 향했다.

물설고 낯선 땅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운전을 배워 용달차도 부리고 택시도 운전하다가 버스기사로 나선 것은 80년대 초반. 동성여객에 입사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20여년간 버스 핸들을 놓은 적이 없다. 그것도 86번 버스만.

#고운 노래 만들기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삶. 음악은 어느날 그에게 다가왔다. 20여년 전, 격일 근무를 하던 이씨는 비번인 날 무료함을 달래고자 홀로 기타를 배워 포크송을 부르곤 했다. "그 당시 느낌에는 가사가 직설적이고 유치하게 들리데요. 그래서 내가 한번 만들어보자 마음 먹었지예"

작곡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지만 서점으로 달려가 화성악, 대위법, 작곡법 등 작곡전공생들이 보는 전문서적을 탐독했다. 악보를 볼 줄도 몰랐지만 끈기있게 책을 보면서 하나하나 음악이론의 기초를 익히며 가요를 습작했다. 결혼 후에도 그의 유일한 취미인 작곡은 계속 이어졌고, 음악에 대한 욕심은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어졌다. 동요 작곡을 시작하게 된 데는 딸아이의 공이 컸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동요곡을 연습하는 것을 듣고는 단순하면서도 맑은 멜로디에 반해 가요가 아니라 동요를 한번 써보자고 마음 먹었다.

"동요를 처음 만들려고 하니 어렵습디다. 동시를 쓰던 사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시도 잘 쓸 수 있지만, 시만 쓰던 이들은 동시를 잘 쓰지 못합니더. 동요도 그것과 마찬가지라예. 동요는 심성이 맑고 깨끗해야 하는 데다, 아이들이 음폭이 좁지 않습니꺼. 그걸 다 일일이 생각을 해서 써야 하는 기라"

연필로 또박또박 오선지에 곡을 써내려가던 90년대 초반, 부산 동요사랑회에서 창작동요제를 연다는 소식이 들렸다. 본격적으로 동요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각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창작동요제는 물론이고 각종 동요제에 곡을 내놓았지만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97년부터. 그 뒤 상복이 줄줄 이어졌다. '매엠∼ 맴맴맴맴'으로 시작하는 배경음이 인상적인 '노래숲의 아이들'은 MBC 창작동요제에서 인기상을 받았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소재로 한 '이제서야 만났구나', 자신의 경험을 담아 직접 작사.작곡한 '모범운전사 우리 아빠' 등 맑고 고운 노래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노랫말을 주는 이도 드물어 곡을 쓰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곡을 붙여달라고 동시집이 날아든단다. 노랫말만 좋으면 금세 악상이 떠올라 곡을 만들고, 반주를 붙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2∼3시간. 지금까지 쓴 곡은 170곡. 가곡도 30여곡 정도 만들었다.

#마음 목욕하기
이씨는 흔히 떠올리는 거친 버스기사들과는 거리가 멀다. 21년째 동일한 노선을 오가는 지루하고 고된 일이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는지라 꼬마승객만 보면 반갑다. 동요를 흥얼거리며 운전을 하는 그를 승객들은 좋아한다. 길가다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를 하며 동요는 잘 쓰고 있느냐며 격려한다.

"아이들의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맑고 순수하지 않습니까. 어린이의 마음이 곧 천국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자꾸 동요를 쓰게 되지예. 동심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참 쉬운 일이 아니잖아예. 그래서 지는 노래로 마음 목욕을 합니더"
그는 마음을 닦는 일을 마음 목욕이라 했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병원을 찾고 온갖 비방을 찾아 몸을 다스리면서, 정작 마음이 아프고 병든 것은 고칠 생각조차 못하는 이들이 안돼 보인다고 했다. "우리사회에 음악이 없으면 사회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어린 시절부터 동요를 많이 듣고 자란 아이들과 아닌 아이들이 크면 성격차가 납니더. 저도 이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어찌 살았을까 싶어요"

이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박봉의 월급, 음악에 빠진 이씨를 아내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곁에는 아내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과 애정을 물려받아 부산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딸과, 지금은 머리가 컸다고 딴청을 피우지만 어린 시절에는 동요대회에 나가 아버지가 부른 동요를 자랑스레 불렀던 아들이 있다. 그리고 음악이 있다.
오늘도 이씨는 핸들을 잡고 도로를 달린다. 노래숲에 아이들과 어른들을 가득 태우고 콧노래를 부르며 말이다.

[경향신문] 200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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