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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작곡가 이상근씨, 수묵처럼 담백했던 삶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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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예술혼] <19>작곡가 이상근씨, 수묵처럼 담백했던 삶과 음악

     
▲ 작품을 구상중인 생전의 이상근 선생(1977년).새해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갔다.작곡가 이상근(1922∼2000)선생이 가신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병석에 누워 계시기만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은 선생에겐 너무 잔인한 욕심이었을까.오랜 투병생활로 인한 육신의 고통을 훌훌 떨쳐버리고 지난 11월20일 새벽 선생께선 먼 곳으로 가버리셨다.

그 날은 '향신회'와 다른 곳에서 두 작품을 발표하느라 내겐 무척 분주했던 날이었다.

여름내 작품을 마무리하고 연습에 시간을 보내느라 몇 달간을 찾아 뵙지 못했었는데 11월 들어 찬 바람이 불며 괜시리 마음이 스산하던 터였다.

연주회 도중 위독하단 소식을 듣고는 연주 후 리셉션에는 잠시 얼굴만 비치고 바로 달려갔었으나 이미 선생께선 가쁜 숨만 몰아쉬고 계셨다.그것이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간 몇 번의 위중한 모습을 봐왔지만 '이제는 정녕 떠나가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과 맺은 인연이 이십 수년, 고교 2학년 수영에 있던 옛 집에서 처음 뵈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파이프 담배를 태우며 반백의 머리,사투리가 거의 없는 독특한 음성으로 필요한 질문만 하셨는데 그 첫 인상은 그때까지 내가 봐 왔던 그 누구보다 강한 카리스마로 다가왔다.

그 느낌은 늘 변함이 없었다.선생은 본래 과묵하신데다 불필요한 수식을 싫어하는 담백한 성품이셨다.그것은 작품이나 평소의 언행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곤 했는데,새로운 작품을 써가면 늘 의미없는 기교적인 부분이나 무리한 편성 등을 꼭 지적하셨다.

유학 시절 받은 선생의 답장에는 건강조심, 목표달성,초지일관,이 세 마디만 쓰여 있었다.

귀국해서 대학강의를 앞두고 찾아 뵈었을 때도 '쉬운걸 어렵게 가르치는 선생과 어려운걸 쉽게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그것은 지금도 강의 때마다 늘 상기하는 나의 좌우명이 되어버렸다.

선생은 어렵고 복잡한 말은 거르고 체험에서 나오는 핵심만을 쉽게 풀어 우리를 가르치셨다.

지금도 동문들이 모이면 선생의 강의는 늘 화제가 되곤 한다.학생들의 과제를 초등학생처럼 동그라미의 개수로 등급을 매겨 놓는다거나 초록색 글씨로 짧은 평어 등을 적어놓기 때문에 그 동그라미의 개수나 평이 우리들에겐 큰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 늘 어린애 같은 심정으로 검사된 노트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렇다고 딱딱하거나 엄격한 분은 아니셨다.오히려 그 속은 늘 따뜻한 분이셨다.한번은 출석을 부르다가 어떤 여학생이 대리출석을 했는데 대번에 그 여학생의 목소리가 아님을 가려내셨다.

좋은 귀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학생 하나 하나를 다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집에 갔을 때도 혹 사모님이 안 계시면 꼭 당신께서 손수 차를 내오셨고,봄이라고 연구실에 조그만 화분을 사다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셨다.

언젠가는 손자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 마당을 걷고 계셨는데 사실 그런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겐 충격이기도 했다.

이상근 선생의 음악의 본질은 서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그런 다정다감함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그래서 우리는 학창시절 선생을 '한국의 차이코프스키'라고 불렀다.

선생은 대단한 애연가이셨는데 파이프 담배의 향은 트레이드 마크였다.소반에는 늘 여러 종류의 담배가 있었고 그것을 맛에 따라 이것저것 피우시곤 했다.

그때만 해도 담배수입이 안되던 때라 이건 누가 선물했고 이건 누가 보내줬고 하시며 자랑처럼 흡족해 하셨다.아마 당신의 가장 큰 기호품이자 즐거움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선생이 음악 외에 다른 취미로 소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그런데 그 좋아하는 담배를 병(고혈압)때문에 피지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언젠가 방문했을 때 일부러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을 나오시길래 의아해 했더니 사모님 몰래 담배를 피우려고 일부러 내려오신 거였다.

나에게 계면쩍은 웃음을 보이며 화단 옆에서 담배를 태우시던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웠는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어쩌다 가게에서 새로 나온 담배가 보이면 선생 생각이 난다.

선생은 당신의 모든 가르침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다.가끔씩 내가 과제를 게을리 해 가면 자신은 마흔이 넘어 떠난 미국유학 시절 한번도 출석이나 과제를 빠진 적이 없다시며 자랑아닌 자랑으로 질책하셨다.

나의 독일유학 시절 지도교수가 근로자가 8시간 일하듯 작곡가도 하루 8시간 작곡해야 한다며 그 직업적인 근면성을 강조한 것과 같은 얘기였다.

선생은 완전히 병석에 눕기 전까진 창작의 필을 놓지 않으셨다.병 문안을 가도 음악이 늘 화제가 되었고 그 와중에도 새 작품을 구상중인 걸 알 수가 있었다. 정년퇴임사에서 하신 말씀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다.'일본에서 배운 걸 가지고 20년을 써먹고 이제 밑천이 떨어졌는데 나라에서 미국에 보내 줘 거기에서 배운 걸로 또 20년을 가르쳤다.

그러지 않아도 물러나려 했었다'고 농담처럼 말하셨지만 거기에서 선생의 강직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퇴임 후에도 '아가' '교향곡 6번'등 대작을 잇따라 작곡하셨으니 그 말씀 역시 지나친 겸손이 아니었나 싶다.

슈베르트가 18세에 '마왕'을 작곡하여 당시의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는데 선생의 대표적 가곡 '해곡'도 18세에 작곡되었다.

피아노를 보기도 힘들었던 시절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반주부를 쓸 수 있었을까? 작곡가의 천재성은 선율로 잘 알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선생도 천재에 가깝다.

사람들은 큰 바위 얼굴을 멀리서 찾곤 한다.사실 선생은 윤이상.나운영 선생 등과 함께 그 당시 한국 작곡계의 최일선에 선 진정한 1세대 작곡가중 한사람이었다.

서울의 좋은 자리를 굳이 마다하고 지역에 남으신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홍복이지만 당신 자신은 이래저래 좀은 답답하고 외로우셨을 것이다.

가끔씩 '나야 뭐 그냥 평범한 선생이지'라고 자조적인 말씀을 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지역 음악계의 상대적으로 열악한 풍토가 당신의 음악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재작년 부산대학교 제자들로 팀을 구성해 선생의 대표작 '연가곡 <아가 1,2집>'을 CD로 만들었을 때도 '음악사에 남을 기록 작업이 이루어졌다'며 마치 남의 일인듯 덤덤하게 평가하셨다.이제 이런 작업들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라면서 어릴 적 우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우상의 허구를 깨닫고 허탈해하고 그러면서 그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또 다른 우상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은 변하지 않는 우리의 우상으로,그리고 치열하게 한 길을 살다간 작곡가로 교육자로 전설처럼 길이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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