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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카리스마가 있는 노래 「그리운 금강산」의 40년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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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누구의 주제런가/맑고 고운 산/그리운 만이천봉/말은 없어도/이제야 자유 만민/옷깃 여미며/그 이름 다시 부를/우리 금강산/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더럽힌 지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짓밟힌 자리/흰 구름 솔바람도/무심히 가나/발 아래 산해 만리/보이지 마라/우리 다 맺힌 원한/풀릴 때까지/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더럽힌 지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금강산은 부른다

기괴한 만물상과/묘한 총석정/풀마다 바위마다/변함 없는가/구룡폭 안개비와/명경대물도/장안사 자고향도/예대로인가/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더럽힌 지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閔 庚 燦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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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내용
韓民族의 頌歌
- 1961년 「反共 주제가」로 탄생
- 北, 「북한을 그리워하는 가요」로 역선전
-「더럽힌 지 몇 해」가 「못 가본 지 몇 해」로
- 카리스마가 있는 노래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가장 와 닿는 노래를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그리운 금강산」을 꼽을 것이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분단이라는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아름다운 詩想으로 승화시킨 詩文學(시문학)과 그 詩가 주는 감동으로 빚어진 樂想의 결합으로 결실을 맺었다. 비록 분단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태어난 노래지만, 단순히 가곡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통일 주제가」로, 「국민 가곡」으로 불리고 있으며, 듣는 사람 부르는 사람 모두 경건하게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汎민족적 노래로 사랑을 받고 있다.
거기에는 분단의 고통과 망향의 恨(한)이 서려 있지만, 단지 슬픈 아름다움이 아니라 민족적 서정으로 승화된 건강한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들으면 들을수록 애틋한 悲哀(비애)가 가슴 깊은 곳으로 고여들고, 부르면 부를수록 깊이 간직했던 슬픈 鄕愁(향수)가 스며나고, 민족의 염원에 대한 宗敎(종교)와도 같은 경건한 마음을 자아내고, 통일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歌曲(가곡)이라기보다는 「한민족의 頌歌(송가)」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2000년 8월15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섰다. 회관 광장에 세워진 이 노래비는 너비 6.4m, 높이 3.8m, 무게 30t의 자연석에 악보와 가사를 새긴 것으로 새얼문화재단이 1999년 1월부터 추진해 온 것.

이 노래가 국민가곡으로 자리매김한 데다 작곡가 崔永燮(최영섭·72)씨와 작사가 韓相億(한상억·1992년 작고)씨 모두가 인천 강화 출신이라는 데서 사업이 계획됐다고 한다.

한국가곡 80年史에 있어서 「그리운 금강산」만큼이나 반응을 불러일으킨 화제작은 없을 것이다. 남북 적십자회담,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 예술단 교환 공연 등 남북 행사에 즈음해서 언제나 「통일주제가」로서 민족 화해와 통일의 무드를 조성해 주는 곡이 「그리운 금강산」이며, 聲樂家(성악가)들이 제일 부르고 싶어하는 가곡, 가장 많은 성악가들이 음반으로 취입한 가곡,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 한국 가곡사 최고의 히트작, 저작권료를 가장 많이 받는 가곡 등 각종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곡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다. 또한 4중창, 무드음악, 경음악 등 다양한 형태로 編曲(편곡)되어 국민들에게 친숙해져 있는 곡이며,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어느 음악회에서는 성악가들이 서로 이 곡을 부르려고 해, 할 수 없이 출연자 전원에게 合唱(합창)을 시켰다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리운 금강산」은 통일 주제가라기보다는 「反共(반공) 주제가」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던 것이 자유 통일을 상징하는 노래로 進化하였고, 지금은 한국민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가곡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을 포함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민족의 노래」로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운 금강산」을 사람으로 치면 이미 不惑(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61년, KBS는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제작을 기획했다.
단순히 조국의 산하를 愛讚(애찬)하는 노래가 아니라 6·25 11주년을 맞아, 멀리 중국·러시아·북한 등지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뜻 있는 곡이어야 했다. 당시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KBS 電波(전파)뿐이었다. 그런데 그 노래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곡이어야 했다. KBS는 이에 부응하는 새로운 곡의 창작을 시인 韓相億과 작곡가 崔永燮에게 의뢰했다. 1961년 6월20일경의 일이었다.

먼저 韓相億 시인은, 「아름다운 내 강산」이란 제목 아래 序詩(서시)를 비롯하여, 「동해의 여명」, 간주시, 「정선 아리랑 주제에 의한 환상곡」, 그리고 산·강·바다를 주제로 각각 3장의 詩를 지었다. 의뢰 받은 지 한 달이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詩를 받은 작곡가 최영섭은 칸타타라는 음악 양식으로 그것을 再구성하였다. 총 연주 시간 50분이 소요되는 大作이었지만 , 역시 한 달 만에 완성됐다.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은 모두 11편 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곡 한 곡씩 독자적으로도 연주할 수 있고, 또 한 편의 칸타타로도 연주할 수 있게 구성한 것이다 . 각각의 곡 이름은 「동해의 여명」, 「정 선 아리랑 주제에 의한 환상곡」, 「남산에 올라」, 「그리운 금강산」, 「백두산은 솟아 있다」, 「한강의 노래」, 「낙동강 700리」, 「압록강은 흐른다」, 「고요한 남해의 노래」, 「동해의 노래」, 「서해의 고기잡이 노래」이다. 이 곡은 1961년 9월 7일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녹음되고 곧바 로 라디오로 중국 땅까지 전파를 타고 날아갔다. 음악회에서의 공식적인 初演(초연)은 그 이 듬해인 1962년 10월20일 국립극장에서 이뤄 졌다. 11편의 곡 중에서 청중들로부터 가장 호평을 받은 곡은 다름 아닌 4번째 곡인 「그리운 금강산」이었다.

작곡자 崔永燮씨에 따르면, 「그리운 금강 산」은 구상 1시간을 포함, 하루 만에 멜로 디와 피아노 반주까지 완성했다고 한다.

『詩를 받아든 순간 구절구절 흘러나오는 시대의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졌고, 그 노랫 말이 주는 영감이 樂想(악상)으로 환원되었 습니다. 또 노랫말이 좋으니까 曲(곡)을 붙 이는 것이 저절로 되더군요』 작곡자 崔씨는 명곡 탄생의 功을 작사자 韓相億씨에게 돌렸다.

방송이 되자마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 포들은 방송국으로 『고국에 대한 鄕愁를 느끼고 울었다』는 팬레터를 수없이 보내왔다.

北, 「북한을 그리워하는 가요」로 역선전

한편 음악회를 통해 이 가곡이 알려지게 되자 성악가들이 앞다투어 자기의 레퍼토리로 삼으려 했다. 그 후 많은 성악가들이 음반 으로 취입을 하였고, 한국가곡 연주회에서 는 필수 연주곡목이 되다시피 했으며, 음악 교과서에 수록돼 누구나 즐기는 애창곡이 되었다. 더구나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 에게는 망향의 恨을 달래 주고 통일의 염원 을 되새기게 하는 곡으로서의 역할을 톡톡 히 해냈다.

이러한 범국민적 열기에 힘입어 곡이 발표 된 지 10년이 지난 1972년에 「그리운 금강 산」은 새로운 轉機(전기)를 맞게 됐다. 분 단 이후 최초로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될 때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곡으로 채택돼 방송에서 연일 이 곡을 틀어 준 것 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운 금강산」은 「통일 주제가」라는 명칭과 함께 「국민 가곡」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85년 9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개최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 」의 레퍼토리로 채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주민들은 다른 곡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소프라 노 李揆道(이규도·60·이화여대 음대 교수 )씨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자 全관중 이 기립 박수를 하는 등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다른 곡들에 대해서는 『남 조선 음악은 국적불명의 頹廢的(퇴폐적)인 음악』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그리운 금 강산」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공개적인 찬사 를 보낼 수 없어 묵시적으로나마 동조를 한 것이라는 說에서부터, 공연 당시에는 歌詞 (가사)를 알아 들을 수 없어 무슨 뜻이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분노를 하였다는 說 , 대외적으로는 침묵을 하였지만 대내적으 로는 『그리운 금강산이란 북조선 체제를 그리워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열망을 직접적 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금강산을 빌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逆선전에 이용하였다는 說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운 금강산」의 原가사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민족 화합을 조성하는 데 있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어 왔 다. 「더럽힌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더럽힌 자리」 등의 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한 정권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가지고 금강산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5년 9월에 있었던 「남북이산가 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과 같은 민 족의 화합의 마당을 마련하는 자리에서 북 한을 자극하는 내용의 노래를 선택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작사자 자신도 가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사로 개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 후 가사를 일부 수정했다. 「더럽힌 지 몇 해」가 「 못 가본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이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가 「예대로인가」로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곡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총체 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반면 서사적인 요소와 사실주의적 요소가 약하다는 약점 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운 금강산」 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기조로 하면서 거기 에 서사성을 가미한 「敍事的(서사적)인 抒情(서정)가곡」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게다가 분단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서, 이 시대의 고통과 이 시대의 현실과 이 시대의 정서를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을 直視 (직시)하게 하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사 실주의 가곡의 성격도 가진다. 즉, 하나의 노래를 통해 다양한 음악적 정서를 體得( 체득)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아카데믹한 가곡보다는 旋律美(선율미)가 풍부한 가곡 을 더 좋아하고, 피아노 반주보다는 오케스 트라 반주를 더 좋아한다. 가곡을 오케스트 라 반주로 연주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특수한 현상인데, 오케스트라 반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효과를 줄 뿐 아 니라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고 청중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쉽다.
선율 중심의 가곡인 동시에 악상의 변화가 잦고 音色的인 대비와 극적인 효과를 요구 하는 「그리운 금강산」의 경우, 피아노보 다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해야 그 맛을 효과 적으로 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 의 대중적 음악 기호와 잘 맞아 떨어진 것 으로 볼 수 있다. 즉, 감미로운 선율, 곡 전체를 감도는 서정미, 억압된 감정의 표출 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극적 효과 등 대중 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그 안에 전부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원래 칸타타(cantata ·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 의 한 형식으로 독창·중창·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지는 交聲曲)로 작곡되었으나 지금은 가곡이 되었고, 또 세미 클래식이 발달되지 않은 한국적 음악 상황에서 세미 클래식의 기능과 함께 감상용 경음악, 무 드음악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는 대중적 인기가 「그리운 금강산」으로 하여금 다양한 역할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 다. 작곡자가 아니라 대중들에 의해 그 음 악 양식이 바뀐 것은 아마 「그리운 금강산 」이 유일할 것이다.

카리스마가 있는 노래

성악가들이 「그리운 금강산」 부르기를 좋 아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자기의 음악 적 기량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성악가들은 감정 표출을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주인공과 도 같은 카리스마로 청중을 압도할 수 있다 . 또한 거기에는 예술 가곡을 부르는 것 같 은 섬세함이 있고, 애창곡을 부르는 것 같 은 다정다감한 친근감이 있고, 종교음악을 대하는 것 같은 경건함이 있고, 우리 음악 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한국적 서정이 있다. 「그리운 금강산」이 그토록 빠른 시간 안 에 널리 보급이 된 데에는 전파의 힘이 크 게 작용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가곡 은 음반을 통해 보급이 되거나 음악교과서 에 수록돼 알려지는 데 비해 「그리운 금강 산」은 방송을 통해 제작·보급되었다는 특 징을 가지고 있다. 방송을 통한 가곡의 보 급은 방송의 특성인 同時性(동시성)과 廣播性(광파성) 기능에 의하여 효율적인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 가 「그리운 금강산」이다. 「그리운 금강 산」은 다른 가곡들과는 달리 방송용 가곡 으로서 적합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방송용 가곡은 일부 계층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길어도 안 되고 너무 짧아도 안 되며, 어 려워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쉬워도 안 되고 다양한 형태로 편곡·연주될 수 있어 야 하고, 同시대적 정서에 맞아야 하는 등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조 건에 맞는 곡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다. 한 노래는 작사자와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 지지만, 그 노래의 運命(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과 구성 요소이다. 「 그리운 금강산」은 시인 韓相億과 작곡가 崔永燮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우리 시대의 비극과 고통과 염원을 대변하는 노래로서 기능을 하였고, 同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 들에게 「국민가곡」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금강산은 이제 「갈 수 없는 山」이 아니라 「갈 수 있는 山」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리운 금강산」은 여전히 愛唱( 애창)되고 있고 오히려 더 절실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고 있다. 단순히 금강산을 그 리워하는 노래가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리운 금강산」이 불리는 상태보다 안 불리는 상태를 동경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월간조선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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