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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거꾸로 쓰는 나의 이력서

鄭宇東 0 2528
거꾸로 쓰는 나의 이력서

나의 경력과 행적이 하도 한미한 이력이어서 예전 것은 벌써 다 잊어 버렸고
그래서 최근의 일부터 거꾸로 거슬러 더듬어 올라가며 적어보려 합니다.

望七의 나이에 이미 직장생활과 자영사업은 끝났고
그래도 좀 관심을 두었던 우리가곡을 부르고 보급하는 캠페인에 관여하고 있
습니다. 계기는 용산에서 10여년간 운영하던 서점업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정리하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내마음의노래 우리가곡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
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간혹 쓰는 댓글과 주장이 운영자의 관심을 끌었든지 좀
거들어 달라는 제의를 받아 들이면서 수입은 없으면서 책임만 있는 부운영자
란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내 인생의 최고절정 피크를 맞았다고 하겠습니다.
학창시대의 친구와 스승과 군대에서의 동기와 직장생활 20년 동안의 동료와
자영업을 하는 사이에 알게된 모든 사람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리하여 친밀하게 교우하고 혹은 뜻이 잘 맞는 동지의 관계를 맺어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시인 작곡가 성악가 교수 등
으로 자기의 분야에서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니까 시인을 만나면 작곡가냐고
묻고, 작곡가를 만나면 시인이냐고 묻고, 교수들은 나에게 황송하게도 어느
대학에 있느냐고도 물어 주었습니다. 그럴때면 나는 으례 시인도 작곡가도
교수도 아니지만 이런 모두를 아울러서 다 되어 보고 싶었노라고 말하여 그
사람들을 웃겼지만, 이 세상에서 정말 그리 되고 싶었었습니다.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선생님은
살아 생전에 음악회장에서 만나 뵙고 또 금호동의 댁으로도 몇차례 찾아 뵈
웠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선생님을 옆에서 모셔 달라하여 그렇게 하였더니
나중에는 행사시마다 내가 선생님을 모시는 의전담당이다시피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하여 이제 고인이 되신 김동진 선생님은 나에게 푸근한 아저씨
같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작곡가 오동일교수님은 "강이 풀리면"이라는 가곡으로 함자를 안 이래
마산의 시골도시에서 상경한후 처음으로 세광출판사에서 낸 한국가곡 200곡
집을 구입하였는데 거기에 실린 작곡가 사진중 내눈에 가장 준수하게 보였던
분이었습니다. 내마음의 노래에서 펼치는 우리가곡부르기 켐페인을 위하여
매월 가진 모임에 오교수님을 모신 일을 계기로 서로 말과 뜻이 통하여 아주
친근히 지내고 있습니다. 한번은 온양에 계시면서 불러내려 같이 밤을 세웠고,
또 한번은 교하의 별채를 보여 주었습니다. 사모님과 가족들과도 인사를 시켜
주시고 심지어는 대치동에 있는 사위 병원에까지 데려가 오래된 나의 알레루
기성 비염을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두 분외에도 아래와 같은 분들과 인사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작곡가 / 최영섭 김규환 이수인 김동환 이안삼 임긍수 황철익 윤해중 한만섭 
            김원호 강창식 신귀복 정영택 정태준 정덕기 황덕식 김봉천 박이제
            박경규 우동희 김진우 한성훈 전준선
            허방자 오숙자 임준희 김현옥 김광자 김애경 정애련                   
시 - 인 / 정치근 고진숙 오세영 정호성 김용택 김명희 오사라 송문헌 박수진
성악가 / 김신환 박세환 이영화 유승공 함석헌 이연성 우주호 송승민 하만택
피아니스트 /    정혜경 고승희 김민경 송경영 김민정 박주봉 양기훈
교 - 수 / 신영복 이정구 배동인 안재호 조용진 강성위 백승희 조동주
                                     
2009년 이후로 내마음의노래 사이트 이외의 곳으로 자유롭게 폭넓게 드나들며
교제를 맺고 있습니다. 특히 ART HILL 카페에서는 산행에도 같이 다니며 글 올
리기를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대로 내 글을 알아주고 내 글이 먹히고 있
는것 같아 자주 드날고 있습니다. 글을 올리면 매번 스크랩해 가는 루드베키아
가 있을 정도입니다.

* 자영책방 시절
1992년 5월 부터 2002년 3월까지 온누리교회 길 건너편인
용산구 용산동 6가 신동아 아파트 단지앞 신동아쇼핑센터에서 신동아서점 운영
관심두는 분야의 책을 중심으로 1만여권을 소장하기에 萬卷堂이라하고 옛날 서
점원 벤자민 플랭클린처럼, 북경대의 사서 모택동처럼 책읽기에 매진하였습니다.
국회의원, 변호사, 교수, 의사, 목사, 예술가등 점잖은 손님들이 들리면 진열된 책
들을 보고 꼭 자기집 서재에 들어온 친근한 느낌이라고 했는데 단언컨데 그 사람
들의 서재보다야 다양하고 품격 높은 책들을 소장하였다고 자부합니다.
서울대 김윤식교수 가혜정교수 내외, 하영조목사, 시공사 전재국사장 내외
테너 박세원성악가 피아니스트 권경순 내외,
고등학교 동창인 동방그룹 전효일 사장 내외, 연합통신 유홍구 전무 내외,
최귀인-손경수 내외, 오근향약사 내외, 권오선사장 내외, 다혜할머니
 
* 회사 직장시절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에 1970년 3월에 입사하여 1992년에 퇴사하기까지
마산 본사의 업무부 소속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물류 체커로 일하다가
신설 교육훈련과로 옮겨 일하다가 회사가 기업공개를 위하여 사전준비를 하
고 신설된 주식부서로 옮겨 주식사무가 집중적으로 처리되는 서울사무소에
서 근무하게 됩니다. 홍보부서를 잠시 거쳐 카페트 영업부에서 병을 얻어 힘
들게 버티다가 수원공장으로 밀려가 허울좋게 명예퇴직을 하였습니다.

* 군사 병영시절
1966년 2월 창원훈련소로 입소하여 1968년 2월 만기제대
영천 육군부관학교에서 교육받고 709의 행정병과 주특기로
춘천 포병관측대대에서 화천 챠리포병중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
말년에 문서연락병으로 춘천으로 다니는 계제에 춘천도서관에도 출입
마땅히 군인시절에 기르고 닦아야 할 덕목은 사나이다운 기상과 용단이라 하
겠는데 이모 저모로 정면승부를 피하고 문약에 흘러 병영밖에서 중대장의 자
녀를 지도하며 안이하게 군생활을 마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 대학교 시절
1960년부터 1964년까지 국립부산대학교 법학과 수학 졸업
5.16 군사혁명의 여파로 1962년 대학정비령에 의하여
국립경북대학교에서 3학년 1년간을 수학하다가 무슨놈의 혁명조치가 아녀자
의 변덕도 아니고 1년후에 변하여 다시 부산대학으로 돌아가 졸업하였습니다.
대학의 수학과정이 험난하였듯이 그 시작도 어려웠습니다.
입학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등록마감일을 넘기고 농가에서 하늘같이
귀중한 農牛를 팔아 개강하는 날에서야 처음 두시간을 절차를 밟은 후에
1960년에 부산법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정원 80명에 마지막으로 등록한
"6031080 정우동"이라고 나왔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대학공부라 남보다 알차게 하고싶은 의욕으로
문리대 강의실에 들어가 사학과에서 이재호교수의 한문원전을 청강하며
영문과에 가서는 BIBLE ENGLISH를 청강하며, 제2 외국어로는 露語를
문리대 학장 박경일교수한테서 수강하였는데 박교수는 내가 사회주의 진
영의 법을 연구하기 위하여 로어를 공부한다는 뜻에 격려해 주었습니다. 
해군법무관 이진우 선생을 만나 군시절, 검사시절, 변호사시절 근무처나
댁을 찾고 고인이 된 지금도 내 일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대학시절의 학우로  법학과의 김영팔 김태남 고춘화 장중원 김석모 임부웅
김종표 이정부 전복룡 권봉근 차춘길 권두홍 안방남 정만부
행정과에서는  김영조 진상홍 이평성 이동형 허대립 한일웅 김춘식 김영락

* 중고등 시절
마산 서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졸업
이대룡 이환균 배석채 옥영남 이영찬 김영준 김용수 팽영강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 '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시민의
궐기대회의 여파로 4.19 학생의거가 있었고, 이어서 이듬해 '61년 대학 2학
년때에 5.16 군사혁명의 큰 파랑을 또 겪어야 하였습니다.

* 국민교 시절
신마산 월영국민학교 제9회로 졸업
국민학교 3학년때에 6.25 사변이 일어나 부상군인을 수용치료 하기위하여
어린 마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교사를 양보하고 산과 들, 빈집으로
찾아 다니며 공부한다는 것도 태반을 놀았습니다. 그중에 조금 비탈진 잔디
위에서 뿔책바침을 깔고 지치는 썰매가 신나고 그렇게 재미 있었습니다. 
김영일 이수선 윤청일 노익수 이은진 지명철 권동희 박병용 최인국 이춘경
김호일 김철전 이진호 심창일 우석태 심장일 하정식 장장길 박종태
위의 친구들중 동네친구들은 감천(감이 많이 나서 감천이었는지? 물이 달아
감천인지? 혹 요즈음은 신불을 뜻하는 검천은 아닌지? 로 생각이 닿는)으로
감서리따위를 하러 가는데 나는 간이 작아 남의 것에 손댄다는 죄의식으로
한번도 동참하지를 않아서 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 어린이 시절
마산시 월영동 77번지 뽕나무정 샘물 밑 멋진 탱자나무가 울타리로 처지고
큰 단감나무가 서 있던 기왓집 아래채 초가집에서 자랐고 그때의 동네친구
로 김지행 김광수 김팔랑 김성웅 신복순이가 있었고 이때에는 떼바우굴 숨
바꼭질, 제일여고 앞숲이랑 북방숲, 신당절, 봉창이절로 밤서리 등으로 거침
없이 돌아 다니며 놀았습니다.

* 가문과 출생
우리 晉陽(晉州) 鄭씨는 고려 태조를 도와 벽상공신 광록대부를 지낸 호가
栢谷, 諱가 예(藝)이신 할아버지를 始祖로 하고 나의 當世代에 이르기까지
32대를 헤아립니다. 中始祖 芬할아버지는 朝鮮 문종임금의 고명대신으로
단종임금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임금에게 피살된 호가 愛日堂이시고, 뒷날
시호가 충장공(忠莊公)으로 추존 받으신 분입니다.
아버지 함자는 相자 錫자이고, 어머니 안동 權씨 肅姬 두분 사이에서
1942년 6월 27일 일본 나고야(愛知縣 名古屋市 昭和區 瑞穗町 이도다
103번지)에서 태어나 두살때 귀국 馬山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쭈욱 자라고
(마산)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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