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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적뒤적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鄭宇東 0 1920
뒤적뒤적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러시아의 역사는 공산주의시대에 철의 장막으로 불렸던 별명 그대로
또 그 수도 모스크바가 원래 강가의 소택지에 목책을 박아가며 건설된 모스크바의
안개처럼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왔기때문에 새삼 어떤 신비감마저 들게합니다.

러시아사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봐이킹족의 일족인 루스족이
원주민 슬라브족의 요청으로 동북슬라브지역에 이동해 온것이 러시아의 시원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들은 차츰 원주 슬라브족 세력에  동화되고 말았지만 이중
루리크는 노보고로트공이 되고, 거의 동시대에 옮긴 올레그는 키예프공국을 건설
하고 블라디미르가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종교문화를 꽃피웠고 야로슬라프 무드
르이가 러시아 최초의 법전 <루스카야 프라우다>를 편찬하였습니다.

이 전성기를 보내고 쇠퇴기에 이르러 모스크바에 진출한 유리 돌고루키세력이
모스크바공국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러시아의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졌으며
세력을 키워 아시아의 몽고세력 타타르를 점차 몰아내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습
니다. 이반 3세는 스스로를 짜르 황제라칭하고 로마노프家러시아제국을 열었습
니다. 뒤를 이어 표뜨르대제는 러시아의 유럽화에 진력하고 선진문화의 도입에 힘
쓴 결과 러시아의 국력이 크게 신장하여 유럽의 열강대열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일 로마노프로 시작되는 로마노프왕조는 니콜라스2세때 폴란드의 침공으로
망하고 이런 사회의 혼란기에 스텐카라진이 주동한 농민반란등이 일어났습니다.
사회를 안정시키고 개혁시키려는 창백한 인텔리겐차들의 미르(농촌공동체)운동과
브 나로드운동이 실패한 후 사상의 선각운동자인 벨린스키, 바쿠닌, 트로츠키등의
치열한 논의와 생명을 건 투쟁을 거쳐 레닌이 사회주의정책을 펴고 소비에트 혁명
으로 봉건사회를 혁파하고 노동자 농민의 이른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천국을 역사
상 최초로 건설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나라이름도 소련이라고 고쳤습니다.

혁명후의 소련체제는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
을 확보하기 위한 맹렬한 노력으로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아 극동아시아에서
블라디보스또끄를 개항하였는데 이 항구도시의 명칭은 동쪽을 차지하려는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라 할수 있습니다.

레닌 다음 스탈린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는 나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독재정치로 인해 나라 살림이 어려워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뒤를 이은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을 폈으나 끝내
소련이 해체되고 다시 러시아연방이 들어서서 공화정책을 펴고 옐친, 푸틴,
메드베데프가 나라를 다스립니다.
 
우리들이 동방정교회하면 본바닥인 그리스에서보다 러시아에서 더 잘 떠올리는
동방정교회의 유산으로 아름다운 교회건축과 성화와 종교적 아이콘을 자랑하면
서 러시아인을 경건한 신앙인으로 여기게 합니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골리키, 투루게네프, 푸쉬킨 등의 문호를 배출하여
전인류에게 최고급 문자문화의 지적 유산을 함께 공유하게 하였으며
글링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콥스키등의 음악가를 배출시키고
위대한 무용수 니진스키와 누리예프를 배출하여 발레와 오페라의 본고장이 되어
볼리쇼이대극장에서 일급오페라와 발레를 공연하는 문화예술의 강국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리 오래된 세월도 아닌 지난날에 인륜과 인정도 눈물도 없는
빨갱이나라로 낙인 찍힌 이 나라의 경직된 붉은 군대에서 유연한 적군합창대가 세
계를 향하여 평화의 노래를 부르며 아름답게 활동하고, 또 적군의 한 상사가  아내
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끝내 자살하는 순애보를 읽었던 것이야말로 러시아의 변신
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징표라 생각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고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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