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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의 신화

鄭宇東 0 1531
역도산의 신화

우리 한국 태생의 일본 레슬러 역도산에게는 이런 전설이 붙어 다닙니다.
일본에서 수신인의 주소가 없이 수신자만 있어도 우편물이 배달되는 것은
天皇뿐인데, 力道山이 인기 절정이었을때 그는 天皇의 다음으로 그런 특권
을 누렸다 해서 "천황 밑에 역도산"이라는 유행어가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또 한 사람의 한국태생의 여자가수로서 일본 엔까界의 여왕이라고 불리운
미조라 히바리의 인기도 대단하여 이에 못지 않은 명성을 누렸습니다.

역도산(力道山, 1924.11.14~1963.12.15)은 함경남도 홍원 신풍리 출생으
로 본명이 金信洛이며 14세 때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1939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 모모타 미쯔히로(百田光浩)로 개명하고,
1940년부터 항우의 力拔山하는 힘에 견주어서 力道山이라는 링별명으로
(일본)씨름 스모(相撲)를 시작하였습니다. 1949년 25세 때 세키와케(關脇 ;
스모界의 랭킹 3위)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그후 한국계이기 때문에 최고
급인 요꼬즈나(橫鋼)에 오를 수 없음을 고민하다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때마침 1951년 세계적 프로 레슬링 선수 B.브란스의 일본 원정을 계기로
헤롤드 사까다의 제의로 레슬링으로 전향하고 이번에는 태평양을 건너 미
국행이었습니다. 역도산은 기초적인 레슬링 기술을 브란스로부터 습득하
고 난뒤 미국 레슬러인 바비 브란스와 10분매치로 무승부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미국에서 본격적인 프로레슬링 수업을 하였고, 일본으로 귀국후에 이
른바 양키 레슬러들과 같이 경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역도산을 이름
같이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역도산과 싸우는 미국 레슬러들은 역도산이 미국에서 레슬러 생활을 할때
자신이 항상 악역을 맡아 지는 모습을 보였던것 처럼, 이들 미국 레슬러들
은 일본에서 역도산과 싸울 때 자신들이 악당역을 하며 역도산을 도왔습니
다. 이 일들은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난 이후 일어난 것으로 당시 패전
국인 일본인들은 미국에 대해 당당히 맞서 일어설 그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
고 있던 상태에서 역도산은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분출구가 되었고 역도산
은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가라데촙으로 강적들을 제압하고, 1958년 세계선수권자인
鐵人 J.S.루테스(Luthes)를 물리치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이후 19회에 걸쳐선수권을 방어하였으며, 1958년 월드리그전(World Lea
gue戰)을 창설, 그뒤 세계의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고
히 하고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모아서 일본 굴지의 부호가 되어 많은 체육관과 흥행장을 설립하였습니다.
1963년 귀국,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다 스포츠센터의 건립을
약속했으나, 그 해에 도쿄(東京)의 나이트클럽에서 일본 야꾸자 단원 무라
다 가쯔시의 등산용 칼에 찔려 수술을 받은후 그 후유증 복막염으로 불의
에 불행히 나이 39세에 아깝게 사망하였습니다.

역도산 그는 자신이 걸출한 레슬링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흥행사업의 척박한 토양에 프로레슬링을 도입 발전시켰습니다.
아울러 새로히 출현한 무미건조하고 빈약한 TV방송에다 프로 레슬링 
프로모터로서 볼거리를 제공하여 TV방송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프로레슬링의 수입과 그의 사업적 수완도 뛰어나서 그의 이름으로 설립한
리끼콘체른은 부동산 사업으로 거대한 富를 축적하여 수 많은 체육시설과
흥행장을 건설한 것은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결과적으로 그에게 가
능한 사회적 공헌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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