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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과 종교관

鄭宇東 0 1472
나의 믿음과 종교관

세상의 종교는 다양하여 하나로 찝어 말할 수가 없지만
내가 믿는 바의 신앙은 대체적으로 이러 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여, 이 세상에는 이른바 구세주인 신이 너무 많아서
작정하고 내 마음에 모셔서 섬겨야 하는 신을 선택하는데 혼란을 느낍니다.
신들 저마다 내가 아니면 안 되고, 나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배타적으로 외
치고 있습니다. 또 때로는 신들이 수양이 된 사람보다 못하게 꺼떡하면 성내
고 욕하고 저주하고 벌주는 신에게는 제대로 존경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중에도 힌두교의 비쉬누신은 다른 신들에게의 예배행위도 종국에는
자기에게로 귀일된다는 포용성을 보이고 있는 점이 우선 내 마음에 듭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글자 그대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또한 우리 인류가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꿈이기도 합니다. 유토피아에 소개된 "미트라신(Mithra)"은
원래 고대 아리안족의 신으로서 세상의 여늬 신들에게서 모자란 신격을 완
벽하게 구비한 理性神입니다. 용서와 관용의 신이요, 성장과 발전을 격려하
고, 선행으로 인도하는 신이요, 위로와 행복을 제공하는 평화의 신이요,
자신만의 고유한 예배의식을 고집하지 않으며 한 예배당에서 다른 이교의
신앙행위까지 허용하는 자신만만 여유있는 행태와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내
마음에 쏙 듭니다. 우리의 彌勒信仰도 고대 아리안족의 신앙에서 인도의
베다문헌을 거친 미트라(Mithra)신앙이 미륵(Maitreya)보살신앙으로 전해
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미트라 <=> 마이트레야 사이의 발음의 유사성)

T. 모어의 유토피아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논자에 따라서는 옛 페르시아의 미트라교의 전파가 유태교와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쳐, 특히 초기기독교회의 바울은 그의 이전 신앙인 미트라교의
교리를 따다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현재의 종교비밀결
사의 일파인 프리메이슨(Freemason)결사나 일루미나티(Illuminati :光明
會)단체들은 각국의 정부나 세계조직의 그늘에 숨어서 그들의 세계개조
프로그램에 따라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세계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기를
쉬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을 믿을 것인가? 말것인가를 놓고
빵세의 저자 빠스깔은 유명한 도박이론을 전개하여 신이 있다는 쪽에다
승부를 거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유리하다고 하였습니다.
유신론자가 신을 믿고 계율을 지켜 착한 심성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
은 무신론자가 계율없이 자의적으로 사는 것에 비할 바 없이 유익합니다.
즉 유신론에 승부를 걸면 최소한도 선한 노력으로 지옥의 화를 면하고
상벌을 가리는 신이 없다 하더라도 아무런 손해볼 일도 없기때문입니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안 그런가 하는 문제를 놓고
임마누엘 칸트는 신앙은 신의 유무를 사실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사실문제
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데 반드시 요청되는 권리
문제로서 다루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신을 논증하는 存在論的 有神論을
떠나서 인간만의 특권이랄수도 있는 要請的 有神論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큰 미덕인 眞, 善, 美, 聖德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아 갑니다.
이런 차원 높은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 불가결로 요청되는 한 분야가 바로
신앙의 문제이며 신의 유무가 행-불행을 가르는 분수령이 됩니다.

교부철학자 테르툴리아누스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60~220)는
"불합리함으로 믿는다"는 유명한 최고의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신앙은 증명을 필요로 하는 합리적 이론 검증의 문제도 아니고
또 사리로 따져서 설득할 수 있는 조리의 적부의 문제도 아니므로
선의에서 자신의 전 인생을 무조건적으로 배팅하고 하는 도박이며
스스로를 속여서라도 믿어 주는 것에 신앙의 요체가 있다 하겠습니다.
세상을 착하게 살아야 할 우리 인간에게 요청되는 도덕적 지표입니다.
 
나는 이런 믿음과 회의론적 견해때문에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더 많이 경도되어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는 기독교나 다른 종교들의 관심사인 신과 미래의
삶과 같은 것들에 있어서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나는 불가지론의 입장보다 더 회의적이어서 결단의 순간과 긴장을
무서워하여 판단중지(判斷中止 ; epoche)또는 유보하는 노선을 따르고 있
다고 하여도 무방합니다. 이는 어떤 현안 사안에 대한 진위나 행동 여부를
자칫 섯불고 미숙한 판단 결정에 의하여 영혼의 파멸을 초래하는 화(禍)를
당하기 보다야 이 길이 나은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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