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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대중화의 선구자, 엄정행 교수

鄭宇東 0 2030
가곡 대중화의 선구자, 엄정행 교수

테너 엄정행교수는 1943년 2월 12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음악교사였던 그는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시골이지만 그 아버
지의 덕으로 베토벤과 모짜르트등의 위대한 클라식 음악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소년시절의 그는 스포츠 특히 배구경기를 좋아하여 고등학교는 배구 특기생으
로 동래고등학교에 진학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대학진학 문제로 고민하던 그
에게, 아들의 美聲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아버지의 권유로 진로를 바꾸어 벼락
치기로 성악공부를 하여 경희대 성악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진학후에도 스포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에게 홍진표교수는 그의 미성에 대
한 자신감을 환기시키고 격려하여 음악의 길로 확고히 이끌어 준 멘토였습니다.
장일남선생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무명의 강사시절에 생애 처음으로 음
반을 낼 수 있게 주선해 준 멘토이자 고마운 은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히여 출반된 한국가곡 12곡집은 방송가와 애호가들에게 공전의 히트를
하였고 그의 이름 석자를 우리 가곡사에 영원히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성악가들이 외국에 유학하고 이태리 오페라 아리아나 독일의 리트곡
을 부를때, 유학을 못나간 그는 두배 세배로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한국가곡의
애뜻한 정서와 매력을 전하여 주기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한때 TV나
라디오는 그의 노래를 그치지 않고 늘 달고 있을 정도로 가곡의 대중화에 선구적
역할을 한 국민적 성악가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유학하지 않은 국내파의 대표적
인 성공사례의 하나로 오래 오래 남을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교수하는 성악가가 아니라 성악하는 교수로 불리기를 바라서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누구가 부르든 가리지 않고, 개런티의 적고 많음에
관계없이 출연하기로 작심한, 돈을 멀리한 진정한 예술가였습니다.

지금도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흔히 듣는
목련화, 봉선화, 가고파, 선구자, 그 네, 그리운 금강산, 기다리는 마음, 비 목,
떠나가는 배, 청산에 살리라, 고향의 노래, 보리밭, 희망의 나라로 등의 노래에

는 그의 호쾌하게 내뽑는 아름다운 미성이 진하게 묻어 있는 듯한 감이 듭니다.
그의 트래이드 마크인 김동진 선생의 목련화는 경희대의 어느 개교기념 행사를
위하여 김동진 선생이 작곡한 친필 악보를 받아 연습 할때에 선생의 타박도
많이 받았지만 그렇게하여 성악의 진미를 맛보고 비로소 진정으로 성악의 세계
에 진입하게 되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엄교수의 회고담을 하나만 덧붙이면
옛날의 무명시절 아파트에서 노래연습을 하면 이웃들이 시끄럽다고 방빼 나가
라고 아우성을 치며 난리더니 성공하여 잘 나가니 제발 한 곡만 더 불러달라고
애걸하며, 밖에 나가서는 성악가 엄정행과 한 아파트에 산다고 매명하며 자랑
하는게 인심이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엄교수는 경희대학을 정년퇴임후 명예교수로 있으며
고향 양산에 엄정행 음악연구소를 열고 후진을 양성하며, 지방합창단을 운영
하는등 지방 음악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세일 음악문화재단(이사장 정승일)은 2011년 제3회 세일 한국
가곡상 수상자로 엄교수를 선정하고 거금 일천만원의 상금으로 격려하였으며
양산지방의 음악단체는 그의 이름을 오래 기리기 위하여 엄정행 전국성악콩쿨
을 매년 개최하여 장학금을 주어 많은 성악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또 금년 2012년부터 그의 연구소 주최로 국제콩쿨을 개최하여 온지구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우리 한국가곡의 우수성을 알리고 우리가곡의 세계화에 이바지
하려한 그의 희망이 좋은 결심을 맺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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