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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우리 가곡음악사의 한 이면

鄭宇東 0 1532
우리 가곡음악사의 한 이면
 
우리나라의 음악은
우리나라의 제식과 의례에 연주된 궁정정악과 
우리민족의 민속문화 고유의 전통 민속향악과
중국의 당나라때까지에서 받아 들여 온 외래 당악과
중국의 송나라에서 받아 들여 온 외래 아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악을 중심으로 한 궁중의 정악아악과
가사가곡 시조창 판소리 등을 포함하는 민속향악과
중국등 외국에서 받아들여 온 당래외악으로 대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음악의 여러 갈래중 정통향악가곡에 서양리트가곡을 받아
들여서 탄생한 현대한국가곡에 얽힌 일면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면하여 풀어내야 하는 온갖 문제들은
범주의 크기 넓이 깊이는 크든 작든 유사한 문제이고 사안임을 자주
봅니다. 우리는 역사계에서도 그렇지만 우리 음악계에서도 그런 사례
를 봅니다. 제대로 순순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짓눌린 억울함으로
한 많은 세상을 등진 음악인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이들중 피눈물
을 삼키며 어느 해 지는 뒷골목에서 소주로 세상을 탓하며 술잔을 기
울인 회한과 좌절의 삶을 살다 죽어간 경주의 토호 바이올린 음악가
이의성이 바로 그러한 한 사람입니다. 이왕 말이 난김에, 채동선 정성
율 윤이상 제씨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봅니다.


ㅡ 한복차림의 샌님 채동선(蔡東鮮, 1901~1953)

채동선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독일 베를린
슈테른쉔음악학원에 입학,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전공한 뒤 1929년에 귀국
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악리(樂理)와 실기를 가르쳤습니다.
1924∼1939년에 4회에 걸친 독주회를 가진 바 있으며, 광복 후에는 작곡에
전념하였습니다. 고려음악협회장·작곡가협회장·국립국악원 이사·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는 등, 음악관련 활동을 하면서 작곡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독창곡을 지어냈습니다. 특히, 성악곡 가운데에 <조국>과 <한강>의 교성곡
이있고, <현악4중주곡 제 1번>과 바이올린독주곡도 있으며, 우리 민요도
채보(採譜)한 바 있습니다. 노래집으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곡으로 엮어졌었는데 1980년에 다시 출판된
<채동선작곡집> 속에 있는 '망향'이 가장 애창되는 가곡입니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나의 애창곡도 망향입니다. 나는 4월만 되면 망향이 부르고 싶습니다.
채동선이 처음 작곡할때는 정지용의 시"고향"에다가 곡을 붙혔는데 시인의
월북으로 이 가사가 금지되는 바람에 박화목의 "망향"과 이은상의 "그리워"
로 개사되어 불려졌습니다. 채동선이 작곡한 우리가곡은 12곡이라 들었는
데 그중에 8곡이 모두 정지용시인의 가사였기때문에 사장되다싶이 되었는
데 이제 우리양악 100년을 읽으면서 고향(망향)외의 7곡도 메모해 둡니다.
1) 고  향 -------  망  향(박화목 시), 그리워(이은상 시)
2) 향  수 -------  추  억(이은상 시)
3) 압  천  ------  동백꽃(이은상 시)
4) 다른 하늘 --- 그 창가에(모윤숙 시)
5) 또 하나 다른 태양 ---- 또 하나 다른 세계(이은상 시)
6) 바  다 -------  갈매기(이은상 시)
7) 몽랑풍 ------- 동  해(이은상 시)
8) 산엣색시 들녘사내

 
ㅡ 경주 터줏대감 이의성(李義星, 1909.12.3~1976.2.25)

신라고도의 음악 터줏대감 이의성은 1909년 만석꾼 부자 이인범의 차남으로
경주면 서악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때 본명은 팔성이라 하였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경주보통학교를 나와 서울로 진학하여 1927년
학창시절에 신차봉과 결혼하고 음악공부를 위하여 일본으로 유학하였습니다.
유학중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동맹의 산하조직 음악가동맹에 가입하여 이쪽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족음악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동경유학후 가정사정으로
체코행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였습니다.
바이얼리니스트로서 강점 일제치하의 질곡과 음악집념에의 무산으로 오랫동
안 좌절하다가 일심당 악기점을 운영하며 음악관련 활동을 펼치면서
그가 일찌기 꿈꾸던 ㅡ 풍부한 문화전통을 간직한 경주를 신문화예술도시로
발전시킬 ㅡ 꿈의 경주예술학원을 설립해 한반도에서 민간 예술종합학교를
선도한 음악인이었으며 이땅에 지방화와 세계화를 앞당긴 선구자로서 민족
문화 건설을 온몸으로 실행하다가 동생 이칠성의 월북으로 연고제와 분단체
제의 이념갈등으로 희생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53년부터 76년 대구에
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승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ㅡ 중공 혁명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8.13~1976.12.7) 

정성율은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고, 초명은 부은입니다.
광주숭일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
로 건너가 난징(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크리누아에게 작곡
과 성악을 배웠습니다. 1937년 옌안(延安)의 루쉰(魯迅)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옌안송> <팔로군대합창> 등을 작곡
발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팔로군대합창> 중의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려 오다가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에서 정식 군가로 비준을 받았습니다. 한때 문화대혁명에 협력하지
않은 죄로 시련을 겪었으나 다시 작곡활동을 개시하여 가곡·가극·영화음악분
야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부인 정설송(丁雪松) 여사는 주은래수상의
수양딸이며 비서로서 중국의 재외 대사급 외교관을 지냈습니다.


ㅡ 독일 현대작곡가 윤이상(尹伊桑,1917.9.17~1995.11.3)

작곡가 윤이상은 경남 산청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에
입학, 1937년 귀국하였습니다.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56
년 프랑스로 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
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
다.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2년간의 옥고
를 치뤄야만 했으나,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을 힘입어 풀려났습니다.

71년 독일에 귀화하고, 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의 <심청>
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81)>,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
의 민족이여(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 범민족통일음악회 '의
산파(産婆) 역할도 하였습니다.

음악계의 일부 인사들은 윤이상은 우리나라의 음악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작품과 예술은, 현대음악계에서 세계 5대 음악가로 손꼽혀지고 있는데
그가 독일로 귀화하였기에 독일음악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귀화는
이기적 동기나 자발적 모의에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 처지에서 강요된 선택
이었음을 감안하였을때 관용과 재평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부가 그를 구속하고, 그후에도 입국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예우하
고 손을 내미는데 그곳에 체류하고 음악 예술활동을 펼쳤다 해서 백안시하는
것은 상황의 산물인 인간을 흠없는 완전한 신(격)으로 평하는 처사입니다.
그의 태생이 한국인이고, 그의 예술의 내용이 어김없이 한국적이라는 평가에
따르더라도, 윤이상은 한국의 음악가로 대접해야 합니다.


ㅡ고향 그리워의 작사자 만향은?

이흥렬 작곡의 고향 그리워의 작사자는 만향으로 음악책에 나와 있는데
책에 따라서는 작사자를 이흥렬로 표기하고 있어서 만향을 이흥렬의 호로
알고 있을 정도여서 이런 혼동사태가 벌어 지고 있습니다.
별난데 관심이 많은 나는 묻는데까지 물어보고 해답이 안나와서 아드님
이영조교수께 물어 만향은 결단코 아버지의 호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만향은 누구란 말입니까?
또 바우고개의 작사자는 누구일까요?
음악책들에는 작곡자 이흥렬이 작사했다고 하는데 어느 음악강연회에서는
이호섭 작곡가의 형님 극작가 李曙鄕이라고 들었는데 확인하고 싶습니다.
1948년에 그가 고향 원산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지워졌지 않나 싶습니다.

나운영 작곡의 <아! 가을인가>는 나운영 작사로 나온 데도 있고
작사자가 김수경으로 나온 데도 있는데 이것은 월북 작가 윤복진의 필명인
김수향(金水鄕)을 한자를 잘못 읽어 김水卿으로 된 것인데, 월북 작사가의
노래가 금지곡이 된 상황에서도 다행스럽게도 살아 남는 계기가 되었습니
다. 이야기인 즉슨 김수향은, 김해경이 李箱의 별명을 가졌듯, 월북 작사가
윤복진의 필명었는데도 월북작품의 금제조치때 사전 조사에서 김수향이었
더라면 끝나고 말았을 것을 김수경이었기때문에 검열에서 벗어 날 수 있었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친숙히 불러온 이 노래는, 이
런 사실말고도 작곡자가 박태준이라고 하는 문제도 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집) 중에서 가장 많이 예술가곡의 노랫말로 작곡된 시는
소월의 김소월의 시집입니다. 시인의 가족이 한미하여, 상속자가 저작권
을 양도하였기 때문에 작곡을 하려면, 가족이나 연고권도 없는 제3자인
서영은(서영춘의 형)에게 구차하게 승락을 받아야 하는 고충을 말하였습
니다. 오랜 세월 이익을 누렸으면 그만 가족이나 연고자에게 반환하든가
아니면 국가가 사들여서 국민들의 몫으로 만들어 주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 대중가요의 경우에도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
눈물의 여왕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본명/송규)은 우리나라 예술 프로모터
의 선구자로 일하다 북으로 월북하였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 선창, 은방울 금방울 등은 그의 처남 이름(이봉룡?)으로 발표되었고,
월북 작사가 조명암(본명/조영출)은 유명대중가요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
강, 바다의 교향시, 신라의 달밤, 진주라 천리길, 목포는 항구다 등 33곡의
가사를 썼지만 그의 가사를 쓴 많은 노래들은 작사자를 제3자로 하여 발표
되거나 안그러면 살아 있는 작곡자의 의사에 반하여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 more information
노동은의 두번째 음악상자 // 노동은 / 한국학술정보 / 서울 , 2001년
우리 양악100년 // 이강숙-김춘미-민경환 / 현암사 / 서울 ,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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