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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鄭宇東 0 1560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사람의 특성을 가리키는 학명은
인간(Homo)에다가 에렉투스, 파베르, 아빌리투스, 로퀜스, 사피엔스
루덴스 등 온갖 수식어를 붙여 인간학명의 유형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직립보행으로 한가해진 두 다리인 손을 이용하여 연장으로 필요한 물건들
을 만들고, 재산을 모운 후 수고하는 노동보다는 유희를 즐기는 삶쪽으로
눈을 돌리는 사고전환을 하고 있습니다.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잠재적 언어체계로서의 랑그(langue)와
개개의 현실적 언어행위로서의 파롤(parole)을 구별하고,
양자를 포함하는 언어활동 전체를 랑가주(language)라고 불렀습니다.
'언어'는 여기서 말하는 랑그의 번역어에 해당되는 사정이 있고
또 언어학의 연구대상으로서는 랑그가 우선되어 왔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어쨌든 언어활동 전체입니다. 또한 폭넓게 언어라고 말하면
한편으로는 인공언어,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의 언어 등도 화제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영역의 기초를 이루어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의 자연언어이기 때문에 다른 것과 구별하여 이것을 정확하
게 정의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예전에 인간에게만 고유하다고 믿어
졌던 특성이 연구의 진보와 더불어 밖에서도 발견되는 예가 없지 않기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고유한 의미에서 언어학적이거나 인류학적인 것이
뿐만이 아니라 바로 현상계 전체를 포섭하는 현상학적인 관점과 관심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말(로퀜스: loquens)이
생각의 그릇이고 도구이며 또한 사고가 언어의 틀을 규정한다는 사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붓다는 8만 4천의 법문을 세상 사람들에게 끼쳤었고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려운 진리에의 설득
을 아예 포기하고 침묵하였습니다. 독설가인 그는 궤변으로 말 많은 시대
에 그는 역설적으로 침묵속에서 깨우친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간에서는 흔히 불교에서는 8만 대장경이 있다고 하며
그리고 붓다는 8만 4천의 수 많은 법문을 세상에 끼쳤다고 합니다. 
황벽선사에 따르면 팔만사천의 법문은 곧 팔만사천의 번뇌라는 것입니다.
번뇌가 각양각색이듯 그 번뇌를 다스려 깨달음으로 이끄는 法의 門 역시
하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중생의 번뇌를 다스리는 방편
으로서 다양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설법의 달인이었습니다.

원래 붓다는 왕족 출신으로 당시 인도에는 상류의 지식계급이 사용하는
언어인 베다어가 있었으나 붓다는 인도사회의 위계질서를 고착화하는
베다어를 거부하고 각 지역의 일상 팔리어로 법문을 펼쳤습니다.
苦가 만인의 문제인 이상 해탈 또한 만인의 문제이므로, 해탈로 이끄는
가르침은 중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어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믿음
아래, 그의 가르침에는 경계가 없고, 설법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붓다는 가장 깊은 가르침을 구체적 상황과 살아 있는 비유로 가장 쉽게
표현한, 다른 여러 종교의 창시자들과 같이 언어의 달인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언어의 기능과 역할에서
특히 조폭자의 세계에서는 우두머리 한 사람만 말하고 강제하기 때문에
나머지는 오로지 복종만하는 상하관계의 조폭의 언어게임이 성립되었고
인디언 사회의 추장의 말은 부족민들에게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고, 심지어
부족민들은 추장의 말에 귀기울이지도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추장은 명령하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중재하고 옛 관습을 일깨웁니다.

언어는 인간상호간의 의사소통에 제1차적 목적이 있으며
이들 상호간의 관계맺기에 따라 그 내용이 여러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교주와 신자 ---------------- 신적 권위에 버금가는 사명적 상하의 관계
조폭의 보스와 부하 ------- 무조건적고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의 명분관계
민주적 통치자와 피치자 -- 위임에 의한 자발적 합의의 관계
평등한 개인들간의 소통 --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에 의한 관계 설정
인디언 추장과 부족민 ----- 지배하지 않는 봉사로 위로-지도하는 관계

태초에 하느님은 말(글)로 세상을 창조하여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리하여 세상의 잠재태로서 언어에 현재태와 미래태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 속에 세상의 설계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 언어가
사고의 용기가 되어 우리는 언어로 비로소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사에서 언어가 가지는 비언어적(illocutionary) 또는 수행적
(Performative) 측면에 주목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 오스틴에서 시작
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 공자가 정명론으로 그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언어에는 단순히 객관대상을 지시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시대상으로 하여금 그 이름에 걸맞는 실질을 갖추도록 요구하는
수행적 성격이 있음을 일찌기 간파한 이론이 공자의 정명론입니다.

말도 글도 이름이며 특히 正名은 진실한 이름입니다.
공자의 正名論은 단적으로 "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말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다
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답게 개인적, 사회적 구실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위치에 따른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 따라서 자신에게
맞게 행동하는 것을 정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바르게 실행해 나가면 이 세상이 올바로 조화롭게
되는 大同社會가 이룩될 수 있다는 개인의 직분론이 되고, 사회의 평화론
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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