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신요칼럼
신요칼럼
 

집현전과 그 학사들

鄭宇東 0 1693
집현전과 그 학사들

집현전은 고려 이래 조선 초기에 걸쳐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으로 1392년(조선 태조 1년) 7월에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수문전(修文殿)·집현전(集賢殿)
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世宗)이 1420년에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집현전 제도는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서 한(漢)나라 이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도가 정비된 시기는 당나라 현종 때로서, 학사(學士)를 두고 시강
(侍講: 강의)·장서(藏書: 책의 보관)·사서(寫書)·수서(修書)·지제고(知制誥:
왕의 교서등을 지음) 등을 담당하게 한것을 우리나라에서 도입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하여는
종래에는 세종의 지휘 아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창제 했다는 것이
통설이었습니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하나같이 상찬하는 한글과 같은 과
학적인 문자가 세종대왕 단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의심했던 것
입니다만 지금에 와서는 세종대왕과 그 가속 일단이 외로히 고군분투하여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의 창제 모델과 그 기원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창제의 모델로서 제시한 "자방고전(字倣古篆)"했다는
그 고전(古篆)이 무엇이냐? 에 있다 하겠습니다.
학자들은 글자 그대로 중국 한자의 옛 전서(篆書) 기원설과
인도의 산스크리트문자, 중국 유대인의 가림토문자(히브리어 기원설)
원나라 세조가 창제한 파스파 문자설, 고대 일본의 아히루 神代文字설 등
등을 들고 있는데 이런 여러 설중에서 범어(梵語)기원설이 유력합니다.

일찌기 조선 성종 때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초종성 8자, 초성 8자, 중성
12자의 글자 모양은 범자에 기대어 만들었다며 "범자기원설"을 처음으
로 제기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 백과사전학파라 할 수 있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우리나라 언문글자의 모양은 모두 범자를 본받았다"
는 구절이 나옵니다. 또 이 설과 함께 당시 범어(실담어)를 유일하게 알
면서 세종의 사랑을 받은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의 기여가 매
우 컸다는 사실도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련된 문헌들을 살펴보면
세종실록에 1443년(세종25년) 12월 30일에 창제하고 1446년(세종28년)
9월 10일(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에 반포하였습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
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
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훈민정음이 등장하는 첫번째 기록입니다. 이 기록 이전에는 사사로운 글로
도 세종이 문자를 만들고 있다는 단서나, 언급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
에서 뚝 떨어진 듯 등장한 것이 한글입니다.
그리고 그 서두에서 세종이 친히 지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3년 뒤인 1446년(세종28년) 9월 29일
예조판서 정인지의 세종 어제 훈민정음 서문에 언급하기를
[전략...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
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
였다. ...중략...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하라고 명
하시니, 이에 신(臣:정인지)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
(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
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
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
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후략]

이때에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례본(해설서)가 나온 것인데
그 편찬을 집현전 학자들이 했다는 내용입니다. 즉, 만들기는 세종이 만들
고 세종의 지시하에 해설서를 집현전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訓民正音 原本은 한문으로 저술된 訓民正音 解例本을 말하며
뒷날 이 해례본을 訓民正音으로 諺解飜譯한 것이 訓民正音 諺解本입니다.
그리고 訓民正音 例義本은 1940년 안동에서 완전무결한 결정판이 나오기
전 서문과 예의해설을 실은 여러 異本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위와같이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지 못했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유명한 '최만리의 상소' 입니다.
1444년(세종26)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첫째, 사대에 어긋나고
둘째, 오랑캐 만이 고유의 문자를 가지며
셋째, 이두를 이미 사용하고 있으니
넷째, 그저 기예일 뿐
이라고 한글 창제를 폄하한 내용입니다.
 
이를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가 상소 했다는 것은 집현전이 한글 창제에
전혀 관여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직언하기로 유명한 중견 학자로 오랫동안 집현전에서 근무 하였고,
당시 지위는 부제학인 정3품 당상관으로 상시 근무자로서는 가장 품계가
높은 인물입니다. 즉,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최만리가 이전에는 한마디 언급도 안하고 있다가 반포 된 후 상소로
서 항거했다는 것은 한글에 대해 집현전은 발표전까진 전혀 몰랐다는 증
거입니다. 물론 골수 유학자들을 제외한 실학파 집현전 소장학사들이 몰
래 세종과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
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 공로
를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앞선 두 차례의 기록에서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것을 못 박았습니
다. 예를 들어 공로자를 언급한 성삼문의 해동잡기(세종과 문종이 창제했다),
죽산 안씨 족보(죽산 안문에 시집간 세종 적2녀 정의공주가 창제를 도왔다)
등 처럼 언급된 기록이 있다면 알려졌겠지만, 이 외의 다른 어떤 기록에서도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여기서 가능성이 있는 蛇足을 하나 덧붙입니다.
한글창제의 주역이면서 이제까지 베일속에 가려져 있던 
세종-문종년간 문신이며 학자였던 金守溫의 형 信眉大師(속명 守省)가 주
도적으로 훈민정음을 만들 때 범어의 틀을 그대로 적용하였다고 말합니다.
범어에는 50개의 자모음(子母音)이 있는데, 信眉는 이 가운데서 28개자를
선별하였습니다. 한글에는 5가지 발음체계가 있는데 어금니에서 발음이
되는 아음(牙音:ㄱ, ㅋ 등), 혓바닥에서의 설음(舌音:ㄷ, ㅌ), 입술에서의
순음(脣音:ㅂ, ㅍ), 이빨 사이에서의 치음(齒音:ㅈ, ㅊ), 목구멍에서의 후음
(喉音:ㅎ, ㅇ)인 5단계 발음체계입니다. 자음과 모음은 음(陰)과 양(陽),
그리고 이 5단계 발음체계는 오행(五行)에 각각 배당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체계는 범어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 한글과 범어의 상
관 관계를 오래동안 연구해 온 학자 강상원 박사의 주장입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