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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鄭宇東 0 1634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山水가 문학과 그림의 주제로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전후경으로 노장적(老莊的) 자연관의 부각과 함께 산수가 양신(養
身)과 낙도(樂道)의 이념적·심미적 장소로 인식되면서부터입니다. 그리고
동양 회화사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수묵화 (水墨畵)의 발달과 더불어
산수화(山水畵)가 우주적 조화의 체험과 심리적 가치를 통일적으로 향유
할 수 있는 와유지자(臥遊之資)로 심화된 10세기입니다.

이후의 화풍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명대(明代) 말기부터 화가의 신분에 따라 文人이 그린 남종화(南宗畵)와
궁정 畵員이 그린 북종화(北宗畵)로 분류되었습니다. 소재와 내용에 따라
춘경·하경·추경·동경·산거(山居)·강산·호산(湖山)·운산(雲山)·풍우(風雨)·
폭포·수석(樹石)·궁실(宮室)·명승·고적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정형화된 이
상산수(理想山水)와 실제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로 크게 구분하
기도 합니다. 이제까지의 동양화의 색채는 水墨 일변도였으나 후대로 갈수
록 수묵담채에서 채색화로 진행하는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조선조 인조때의 이징(虛舟 李澄, 1595~ ? )은
검은 비단위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를 그린 화원화
가입니다. 왕실에서 활동하며 산수화 거작을 많이 남겼으며, 그 당시 최고
의 산수화가로 이름을 얻었기에 허균은 그를 일러 "우리나라 일등 솜씨"라
고 치켜세우며 그 기량을 칭송하였습니다.

이금(泥金)의 기법은 금가루를 아교물에 개어 물감으로 삼아 검은 비단에
그리는 수법입니다. 보기에도 화려하지만 실제 비용도 많이 드는 기법이기
에 고려의 귀족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
는 불경을 옮겨 적거나 그림을 그릴때 이 기법을 이용하였습니다. 당시에도
금은 워낙 고가여서 금니가 아닌 송화(松花)로 금과 같은 노란색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내세운 유교문화는 검소함을 중시하였기에
이같이 눈부신 화법은 좀처럼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징이 모신 인조왕은 임진왜란 중에 태어나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르고
왕위수호와 거듭된 전쟁뒤 오랑캐 병자호란까지 맞아 삼전도에서 청황제
에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굴욕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수난 인조의 심정
이 어떠했겠습니까 마는 그런 와중에서도 인조는 그림을 몹시 좋아하여
폐허가 된 현실속에서 찬란했던 옛 왕조의 화려한 시각문화로 왕실의 권
위를 되살려 보고자 이징에게 금으로 "이금산수화"를 그리게 하였습니다.

이징의 이금산수도는 도덕적 낭만을 즐기던 조선 중기 문인들의 소탈한듯
보이던 산수화 문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금빛 화면이 전란 후 허전
한 마음을 달라 주었다고 이해해야 할까,  허망한 그림문화를 탓해야 할까
이금의 수법은 전란 후 한때를 머무르며 산수화외의 다른 장르의 그림에까
지 잠시 유행했다가 급격하게 사라졌습니다.

유명한 泥金圖로는 이징의 이금산수도 외에도
조선 중기 문인화의 백미로 평가되는 세종의 현손 탄은 이정의 이금(泥金)
을 활용한 대나무 그림(泥金細竹畵)들이 삼청첩(三淸帖)에 실려 있습니다.
그의 '고죽(枯竹)'과 '우죽(雨竹)'은 댓잎이 위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과 비를
맞은 대나무를 리얼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능숙한 운필이 잘 살아 있습니다.
17세기에 또 이징과 더불어 활동이 두드러진 화원이었던 김명국(金明國,
1600~1663년 이후)의 이금산수인 "사시팔경도첩"도 1662년에 그렸다는
관지가 있으며, 이명욱(李明郁)의 "어촌한유(漁村閒遊)" 그리고 필자미상
의 화첩이 몇 점이 전합니다. 이들은 모두 17세기에 제작된 작품들입니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금니나 금박이 사용된 그림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부분적으로 쓴 것이기는 하지만 1447년에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
桃源圖)", 1550년 이자실(李自實)이 그려 현재 일본 교토 지온인(知恩院)에
소장돼 있는 "도갑사관세음보살 32응탱(道岬寺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 궁중 장식화와 청록산수(靑綠山水)에 몇 점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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