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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에 대한 논쟁

鄭宇東 0 2851
라오콘에 대한 논쟁

라오콘 군상(伊어: Gruppo del Laocoonte)은
그리스의 수많은 조각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헬레니즘의 대표 미술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실물 크기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 군상은 다름 아닌 로도스
島 출신의 세 조각가 하게산드로스, 폴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가 함께 제작한
조각작품으로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두 아들이 뱀에 감겨 고통을 받고 있는 장
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트로이의 마지막 신관 라오콘이 그리스군이 트로이성
에 들여보낸 목마의 배를 창으로 찌른 그의 만용이 재앙을 불러와서 두 아들과
함께 여신 아테나가 파견한 바다뱀에 휘감겨 질식하여 죽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원래 로마 도시는 7개의 언덕위에 세워졌습니다.
이 조각상은 이 일곱 언덕중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포도농사를 짓던 로마시민
펠리체 데 프레디스가 1506년에 땅을 파다가 발견하였습니다. 이 유물은 많은
사람을 흥분시켰습니다. 미켈란젤로와 함께 발견현장에 도착한 교황청 건축가
였던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단번에 이 유물의 정체를 "저것은 플리니우스가
박물지에서 (모든 회화와 조각을 통털어 최고의 예술품으로) 언급하였던 바로
그 라오콘 군상이다"고 파악하였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II세는 이 군상을 조각
상 안뜰인 벨베데레의 뜰에 전시하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
군상은 BC 330년에 그리스의 조각가 레오카레스(Leochares)가 제작한 원작
청동 조각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리석을 밀가루 반죽 다루듯 교묘하게 자유자재로 깍고 호려낸 조각술하며
커다란 두 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라오콘과 아들의 격정적인 몸짓, 뒤틀린
근육과 뱀에 물려 부풀어오른 핏줄, 고통을 호소하는 처절한 표정은 인간의
육체적 고통의 극치를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조각상은 오랜 세월 동안
찬탄을 불러왔습니다. 발굴에 참여한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기적"이라고 외
쳤으며, 미술사학자 요한 빙켈만은 "고귀한 단순과 위대한 고요"라 정의 내
리며 고대 예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했습니다. 발굴 당시 잘려나간 상태였던
라오콘의 오른팔은 1905년 로마의 한 석공 작업장에서 발견됐습니다. 처음
엔 라오콘의 팔인지 몰랐으나 뒤늦게 사실이 확인되어 1960년 복원이 이뤄
졌습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은 오직 감미로운 조화와 절제된 숭엄의 형식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라오콘의 격정 형식은 사뭇 생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아프로디테의 감미로운 이념으로부터
라오콘의 절박한 사상으로 건너뛰기란 한강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뛰어넘
기보다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예술에 대한 부단
한 창조적 고뇌와 실천적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라오콘은 왜 비명을 지르지 않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예술사에 있어서 그 유명한 "라오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빙켈만이 라오콘의 군상을 극찬하자 독일의 극작가이며 예술비평가
인고트홀트 레싱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에 자극받아
헤르더가 "비평단상집 Kritisches Wäldchen" 제1부(1769)를 저술
했고 이후에 괴테 또한 "라오콘 Ueber Laokoon"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라오콘 논쟁은 18세기 독일미학사에서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합니다. 논쟁은 사제 라오콘의 벌어진 입술을 두고 유명한
`라오콘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예컨대 로마의 건국시인 베르길리우
스는 사제의 입술에서 하늘을 찌르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썼습니
다. 하지만 빙켈만은 조각상에 나타나는 표정들은 아무리 열정적이라 하
더라도 위대하고 신중한 영혼을 조형적 아름다움으로 드러낸다 하였으며
한편으로 렛싱은 라오콘의 입술모양을 관찰한 뒤에 무거운 비명이 아니
라 문학적 감흥을 유발할 가벼운 탄식이었다고 반박합니다.

게르만의 야만적 덕목이 고통을 감추고 기쁨을 인내한다면,
그리스인의 자연스러운 솔직함은 장작더미 위의 헤라클레스처럼 울부
짖어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라오콘의 경우, 육체적 고통의 생생한 표현
보다는 격렬한 파도 아래 고요한 정적이 머물고 있듯이 격정의 바다 깊
숙한 심연에서 피어난 고요하고 고귀한 탄식이 어울린다는 논리를 전개
하였습니다. 문학에서야 아무리 처절한 장면이라도 국면전환이 빨라 그
것이 순간적 인상에 그치지만 회화나 조각작품은 표현된 한순간이 영원
한 심미적 침전물이 되어 영원한 인상으로 고착되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교황청은 미술-조각품의 보물창고였습니다.
종교적 최고권위에서 주어진 세속적 권력과 막강한 재력으로 예술과
문화의 파트론이 되었습니다. 이 라오콘 군상도 발견시점에서부터 교황
청의 벨베데레 뜰에 전시되다가 1798년 나폴레옹의 로마 점령과 함께
자신의 파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고 싶어한 나폴레옹
의 욕심에 의한 강탈로 잠시 이곳을 떠나 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후 로
마로 다시 복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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