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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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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동양음악학교 졸업, 19세때 도일, 첼로 및 작곡 수업
- 귀국 후 신사참배거부로 5개월간 옥살이, 석방
- 1947 부산, 충무 등지에서 고아원 원장, 고교교사
- 1953 덕성여대 음악강사, 현악4중주곡과 피아노3중주곡 작곡
- 1956 파리유학, 프랑스 파리음악학원 졸업
- 1959 7기악을위한 연주곡으로 독일 다름시타트
- 베토벤국제음악제에서 피아노곡 입선
- 베를린국립음악대학교 학사
- 튀빙겐하드카를대학교 명예박사
- 통영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
-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
- 1967 동백림 간첩단사건으로 연루, 서울송환 2년간 옥고
- 1970∼1985 베를린음대 작곡과 교수
- 1971 독일로 귀화
- 1973 베를린예술원 종신회원
- 1985 독일튀빙겐에베르하드카를대학교 명예철학박사
- 독일베를린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 1988 남북음악축전제안
- 1990 평양방문, 범민족통일음악회 주도
- 1992 일본에서 탄생75주년기념 강연, 연주회
- 1995. 11. 4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 베를린 가토우지역 공동묘지 특별구역에 안장

* 작품

- 18세때 동요곡집 '목동의 노래' 출판
- 상처입은 용
- 목동의 노래
- 오페라 유동의 꿈, 나비의 꿈, 심청
- 관현악곡, 교향곡, 독주곡 등 100여 작품

‘교향곡 1번’은 1983년 베를린필하모닉 창립 100주년 기념음악제때 위촉받아 만든 곡으로, 1악장은 핵전쟁에 의해 파괴될 인간사회의 참절한 모습, 2악장은 인류역사가 이룩한 미와 선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 3악장은 땅속 악마들의 괴이한 춤, 4악장은 인류를 향한 경고를 담았다.

-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펠로그
- 교향시 ' 광주여 영원히', 정중동’, ‘대우주와 소우주간 관계’,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

‘광주여 영원히’는 쾰른방송교향악단 위촉으로 1981년 5월에 작곡한 교향시로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이 1983년 평양에서 김병화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 저서: 나의 길, 나의 이상, 나의 음악

* 상훈

- 서울시 문화상
- 서독 킬시 문화상
- 1985 코세비츠키상
- 서독 뮌헨 글라트바흐시 문화상
- 1995 독일문화원 주최 괴테메달
- 1995. 12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선정 '올해 최우수예술인'(공로부문)
- 1999. 11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 기인열전 - 현대 음악가 윤이상 -----------------------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의 기억과 경험의 총체, 그리고 인류공동체를 위해 이룬 일로 결정된다. 이 생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것은 우선 살기 위해,그리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의 성취를 위해 우리가 가진 일체의 생명의 가능성을 작동시켜 일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앎,근육의 힘,영적 직관력,감성,이상,도덕성,인내와 성실성…… 들이 바로 우리가 이 삶을 위해 써야 하는 생명의 가능성들에 속하는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삶은 「기회와 함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능성의 그물망」(헬렌 니어링)이다. 그러나,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그 어느 곳에 속박되지 않은 천부의 자유의지를 지닌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다.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현대음악가이다. 그의 음악은 세계적인 교향악단에 의해 연주되고,그의 음악에 대한 연구서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음악세계는 이 땅에 소수의 전문가들 말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거시적으로 보면 서세동점의 20세기 초엽인 1917년 9월17일,동아시아의 작은 항구도시 통영의 부근 산청에서 그가 태어났을 때 이 땅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것은 그가 감당해내야 하는 그의 운명이었다. 그의 부친 윤기현은 시인이었고,모친은 농촌 출신이었다.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시위연대 군악대 출신의 한 음악가로부터 화성학 교육을 받으며 현대음악에 눈을 떴다. 1933년에서 36년까지 일본 오사카음악학원에 입학해 작곡과 음악이론,첼로를 수학한다. 불과 18세의 나이로 피아노 반주의 민요곡집을 펴내기도 했던 그는 통영에서 약 3년간 초등학교 과정인 화양학교 교사로 지낸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작곡가 토모이로 이케오우치에게 작곡을 사사받다가 1941년 세계지배의 야욕으로 불타 오르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반일활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두달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서울에서 해방을 맞은 윤이상은 통영여자고등학교,부산사범학교 등의 음악교사로 재직하다가 한국전쟁을 맞는다. 당시 부산교육대학에서 서양음악사를 가르치던 그는 전시작곡가 협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한편 부산에서 「고풍의상」「달무리」「그네」「편지」「나그네」 등이 수록된 「달무리」라는 가곡집을 출판한다.
윤이상이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1956년이다. 처음에 그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 오벵에게서 작곡을,피에르 르벨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웠다. 이듬해 8월 서베를린으로 가서 그곳의 음악대학에서 슈바르츠 쉴링에게서 음악이론을,요셉 루퍼에게 12음기법을,보리스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59년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학업을 마칠 때까지 그는 서양음악의 정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다.

동아시아적 정서와,도교와 불교의 신비주의 철학이 구현된 몸을 가진 한 동양음악도에게 전통적 서양음악과 당시 유럽을 휩쓸던 아방가르드의 경향이 접속되면서 「현대음악」은 어떤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을까. 그것은 그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교착적 음향」(1961),실내앙상블을 위한 「낙양」(1962/64),관현악을 위한 유동「(1964),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차원」(1971),그리고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오페라 「류퉁의 꿈」(1965),하랄드 쿤츠가 중국 단편소설을 각색한 것을 대본으로 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68),오페라 「유령의 사랑」(1969/70),오페라 「심청」(1971/72),무속의식을 형상화한 「나무」(남무,Namu,1971). 그는 서양음악의 기교와 스타일과 한국의 궁중제례음악 등을 통해 만들어낸 자신의 고유의 음을 융합시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의 작곡기법에는 도교의 음양,즉 음의 밤,달,땅,공간,자연과 양의 낮,해,하늘,시간,정신이 구현되고,그 음양은 더나아가 높고­낮고, 길고­짧고,단단하고­부드럽고,무겁고­가볍고,불협화­협화 등 작품의 조직,구성 등 모든 차원에 적용된다. 그것은 유물론적 분석기법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세계이다. 부분 속에 전체를,변화 속에서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그의 음악에 비평가들은 「도의 정신세계로부터 나온 음악」 「단원적 음향흐름」의 세계라고 평한다.

『나는 예술세계에는 고정된 요소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고,무엇이 되풀이된다든지,고정된다든지 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구체적으로는 도교에서 발견됩니다』라고 윤이상은 말한다. 윤이상의 음악세계를 동양사상에 서양기법을 결합시켰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 관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다. 그는 서양적인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과 융합하여 이제까지 없던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 것이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동시적 현존의 철학인 동양사상에 뿌리를 둔 윤이상의 음악세계는 서구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1966년 여름 처음으로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그해 10월 독일 도나우에싱엔에서 관현악곡 「예악」이 초연되면서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그는 유럽의 현대음악계의 거장으로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1967년 6월17일,윤이상은 몇 명의 한국 중앙정보부원에 의해 베를린에서 강제 납치되어 서울로 이송된다. 윤이상은 1963년 북한을 여행하고 돌아왔고,그 이후 몇 번의 진보적 정치발언을 한 것이 북한을 위한 간첩활동이라고 기소된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의 전모이다.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은 끝에 부인과 함께 기소되어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부인 이수자는 7년형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윤이상은 1968년 3월13일 제2심에서 15년형으로 감형처분을 받고 다시 1969년 1월 제3심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된다. 감옥에 수감되었던 그는 국제적인 항의로 인해 1969년 풀려난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로부터 민족분단의 고통이 지속되는 오늘까지 우리 민족의 고통과 희망은 나의 예술을 지배해 왔습니다. 특히 1967년 소위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조작 때문에 정치인도 아닌 내가 죽음의 문턱 앞까지 선 적이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이러한 나 개인의 고통도 민족분단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땅과 민족에 대한 애착을 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우리 땅과 민족에 대한 사랑은 물론 나의 음악세계가 갖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에 바탕하고 있습니다』라고 윤이상은 말한다.
그를 친북한적인 공산주의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에게 윤이상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예술은 동양의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애를 끝없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도 우리 민족이 분단으로 당하는 고통을 나의 철학과 예술이 결코 지나칠 수 없습니다. 나는 갈라진 조국의 남도 북도 하나의 조국이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민족이 고통을 당하는데 사상이나 제도만으로 이야기하면 무얼합니까? 제가 공산주의자라면 보수집권당인 기민당 출신의 서독 대통령 바이채커씨가 서독의 대공로십자훈장을 내게 수여했겠습니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훈장수여 전에 모든 경로를 통해 철저히 뒷조사를 한다는군요』

1980년,베를린 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광주민중항쟁의 소식을 듣는다. 그는 열흘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만든다. 80년 가을에 끝난 이 작품은 1981년 5월 쾰른에서 서부독일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된 이래,캐나다 미국 유럽 각국에서,그리고 일본에서 빈번하게 연주되고 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서 풀려나 독일로 돌아가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했던 윤이상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땅에서 눈을 감았다. 저명한 독일작가인 루이저 린저는 윤이상에 대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고,감옥에서도 자유롭고,죽음 앞에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쓰고,불타는 난로 속에서도 노래를 부른다』고 썼다.<장석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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