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인명록 > 성악
인명록

초기의 명테너 안기영(1900-1985)

운영자 0 2846
안기영(1900∼1985)은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공주영명학교를 졸업한후, 서울로 상경해서는 우리나라 초창기 음악가인 정사인(1881∼1958), 김인식(1885∼1962)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안기영 선생은 청년시절 기독교 계통인 서울 아현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찬양대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결혼후에는 정동제일감리교회를 다녔다.
그 당시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있었다. 그때는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는 기독교 계통 교회나 학교에서였고 그곳이 유일하게 서양음악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안기영 선생이 다니는 감리교회는 신문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활발한 전교 활동을하는 기독교계통의 교회였다.
청년 안기영은 그곳에서 많은 음악적 소양을 얻었다.
부활절 행사시 선교사를 모시고 예배를 보았을 때 안기영의 목소리를 들은 선교사가 그의 음성에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안기영 선생을 불러서 "너는 영문학을 할 것이 아니라 희귀하게 아름다운 미성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으니 내가 장학금과 미국 유학을 주선 할 터이니 음악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마침 그렇지 않아도 안기영은 성악공부와 작곡공부를 하고 싶은 꿈으로 이태리를 늘 한번 가보기로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는 "내가 미국대학을 잘 아니 그곳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였다.

안기영 선생은 그때 자기보다 5살 위인 국민학교 여교사인 아내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고 있었다. 안기영의 아내는, 그 당시로는 힘든 미국길 이었으므로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하는 그의 유학을 여교사로 번 돈으로 뒷바라지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기영의 집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고 선교사의 유학 보조비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는 그의 유학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졸업한 후 그의 나이 26세때인 1926년 미국 오레곤즈 포틀렌드시에 있는 엘리스 화이트 음악학교에서 성악전공과 음악일반이론을 공부하였다. 안기영은 유학당시 성악공부 뿐만 아니라 작곡 공부에도 관심을 가지고 서양음악의 장점을 살려 우리 민요와 접목시키는 방법에 관한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그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인기가수로 활약하던 미성의 존 매코맥(1884∼1945)의 창법과 목소리에 도취되어 그의 예술적 자질까지 흠모하였다.

안기영선생은 1928년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28세때인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으면서 성악, 음악이론, 지휘법, 음악사등을 가르쳤다. 안기영 선생은 그 당시 미성의 음성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의 음성을 들어보면 너무나 여린 부드러운 미성으로 여운을 남기면서 금방 그의 소리에 도취된다고 하였다. 특히 안기영은 교회 장래 예배 때 그가 잘부르는 찬송가 '하늘가는 밝은길이 내앞에 있으니...' 로 이어지는 노래를 하면 유족은 물론 모두를 눈물 흘리게 하였다.

그의 미세한 미성의 목소리는 강열한 테너음성보다 호소력이 컸다고 한다. 당시 추기음악의 선구자의 한사람인 선배음악가 김인식의 소개로 일본 축음기상회에서 찬송가 및 서양곡을 취입하였다. 그때 취입해서 처음으로 발매한 음반 내용을 보면 아펜셀라가 피아노 반주를 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한채...'로 시작되는 '내사랑아'와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로 시작되는 '메기의 추억'을 소제목으로 표시한 곡 '망향가' '제비들은 강남에' 들과 조영숙이 피아노반주를 맡은 찬송가 등이 실려있다. 그리고 안기영, 최동준, 김인식, 정승채등이 남성4부합창으로 부른 '순산을 향해 갑시다'라는 찬송가를 아펜셀라가 피아노반주를 해서 취입하였다.

1925년 11월 16일 안기영은 종로 청년회관에서 홍난파, 김형준, 백명곤, 최동준 등과 함께 음악회를 발표하였다. 1928년 귀국후 동년 10월 15일 이화. 연희. 숭실. 세브란스. 의전등이 주최한 제1회 사전문교(四專門校)연합 대 음악회가 장곡천정에 있는 경성 공회당(지금의 조선호텔앞)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안기영 선생은 홍재유, 이인선, 아펜셀라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29년 2월 21일 인천에 있는 화도 유치원을 위한 음악회가 경성공회당에서 있었을 때 '뿌쓰' 부인과 함께 출연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동년 8월 23∼24일 양일간 신의주 음악대회가 신의주 청년회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렸을 때 홍영후(홍난파), 독고선 등과 함께 출연하여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1931년 안기영선생은 동광잡지 제21호에 이런글을 발표하였다.
'여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양산도와 방아타령을 하게되니 처음에 점잖은 노인들께서도 여학생들이 기생들처럼 소리를 하다니 학교에 보낼수 없군, 또 험구들은 그저 욕만 잘하면 잘난 줄 아는지 '이화권번'(이화기생학교라는 의미)이란 새 이름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데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래도 많은 인사들이 격려하고 찬송하는 말을 들을 때는 퍽 감사하였다....'

안기영 선생은 1930년 겨울방학동안에 이화여전학생 14인으로 합창대를 조직하여 지방에까지 조선민요의 음악적 가치가 고귀함을 알리기 위하여 순회음악 연주회를 열게 되었는데 그 결과 이들 음악회가 그 당시 여론에는 찬반사가 들끓었던 과도기이기도 했었다.
1931년 6월 20일 성우회에서 안기영 선생이 저작겸 발행으로 안기영 작곡집 제 1집을 30면으로 출간하였는데 춘원 이광수가 作歌한 '새나라로', 김안서 作歌의 '꽃밭', 이은상의 '마의테자'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안기영 선생은 특히 민족주의 음악운동의 일환으로 우리민요를 서양 작곡기법을 이용하여 현대적으로 편곡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실정과 감정에 맞는 향토가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안기영선생은 마음이 여리고 성질이 다혈질이지 못했는데 한때 그의 愛제자인 김현순과의 사랑으로 인해 당시 많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안기영 선생은 음악건설 본부 성악분과 위원장과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및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동란속에 그는 집필중인 몇 개의 향토가곡 원고와 책을 가방 속에 넣고 이태리나 오스트리아로 가서 성악과 작곡공부를 하겠다고 인천을 향해 간 후 1985년까지 북한에서 생존한 음악가가 되어 이후 그의 작품이 연주금지 되었으나 1988년 10월 27일 단행된 월북 음악가 작품 해제 조치로 인해 해금되었다.

안기영선생은 양악인으로는 최초로 민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편곡하였으며 민족주의 음악운동을 제창하였고 오늘날 민족음악 운동을 펼친 노력은 재평가 받고 있는 음악인이다. 안기영선생의 대표작에는 <마의태자>, <그리운강남>, <추억> 등이 있고 <콩쥐팥쥐>, <견우직녀>, <은하수>, <에밀레종> 등의 향토가극이 있다.
그가 향토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형식을 초기에 개척한 공로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글 : 이중훈(영남대 교수) -
안기영과 현제명의 생애와 음악 중 발췌.요약정리.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