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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조두남(趙斗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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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82)
1912년 10월9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조병욱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두남(斗南), 호는 석호(夕湖)였는데 그는 가톨릭 집안으로 태어나자마자 야곱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평양여고(그후 서문여고)를 졸업하고 연습과(그후 사법과)를 다니던 누나가 오르간 한대를 사와 그에게 조금씩 가르쳐 주다가 가톨릭 집안이어서 평양에 와 있던 선교사 조셉 캐논스(Josep Cannons) 신부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면서 그의 음악공부가 시작되었다.
9세때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여러 교회에서 출연청탁할 정도로 주변에서 꼬마 음악가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취미는 장기였는데 어느날 평양택시 사장 위이억 노인과 2~3차례의 장기를 두어 연이어 이겼다. 신바람이 나 [장기야! 장운이 받자!]라고 하자 버릇없다 하여 따귀를 맞았다고 한다.  그 후 박보장기를 좋아하여 늦은 시간까지 박보를 만들어 당시 중외일보에 투고, 당선하여 중외일보를 줄곧 무료로 구독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18세때 부친이 별세하였는데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고 새 둥우리 같기만 한 집이 싫어져 그는 만주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만주에서 거처하던중 독립운동을 하던 윤해영씨가 찾아와 <용정의 노래>라는 세 절의 시(현 1절에 해당)를 내놓고 용정땅에서의 독립운동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는데  그때 유명한 가곡 '선구자'를 작곡하게 된다. 원래 '용정의 노래'로 이름붙여진 이곡은 해방을 맞으면서 2,3절 가운데 일부를 고쳐 윤해영처럼 높푸른 기상을 가진 독립투사를 일컫는 <선구자>로 제목을 바꾸어 다시 발표하게 된다.

그는 만주의 방황생활 속에서 의사인 안규진 선생과 산업조합장 김동수씨 등과 교우를 가졌으며 이 때 김동수의 누이 김민혜(28세)씨를 아내로 맞으면서 생활에 안정을 되찾아 색채적 화선을 구상하여 강한 퍼스낼라리즘을 추구했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오랫동안 앓고있던 위장병이 급작스레 악화됨으로써 미처 피난을 못했다가 서울 수복시 폭탄 파편에 맞아 허벅지에 관통상을 당하기도 했다.  아내도 옆구리에 파편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1 · 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6월에 마산으로 요양을 오게 되는데 그후로 서울로 오라는 권유도 마다하고 그 동안 쌓인 정과 제자들 때문에 마산을 떠나지 않았다.

1977년 그의 나이 65세때에 혈전증으로 쓰러지게 되는데 보름간의 치료후에 퇴원하여, 그해 가을에 광주 금호타이어 사가를 작곡 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2년 후 다시 담석증이 발병하여 그후 줄곧 언어장애를 겪게 된다. 1982년 4.17일 그의 쾌유를 비는 [조두남 가곡 음악회]가 열리고 그의 수상집 <그리움>이  출간되기도 했으나 결국 2년후 72세를 일기로 그의 음악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부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으며 이듬해 2.18일 영국 소머세트대학교는 그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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