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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尹伊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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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伊桑 (1917.9.17. 통영 ∼ 1995.11.4. 베를린)

세계 무대에서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 받던 보기 드문 음악적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반평생을 조국을 잃은 유민으로 살다가 끝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기이한 운명의 길을 밟아야 했던 한국 태생 독일 작곡가.
그는 정신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원천에 서서 한국 전통적인 음의 이미지를 현대 서양 작곡 기법의 도움을 얻어 음악화 했으며, 150여곡의 작품을 썼다. 그의 오페라는 도교와 음양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끌어내었다.

윤이상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에서 칠원(漆原) 윤씨 6대 종손으로 태어나 통영 바닷가에서 자랐다(생모는 소실). 양반 집안으로 부친은 중국 역사와 문학에 밝았다.
어릴때 그는 미륵도에서 우주의 소리를 들었다고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에서 말했다.
18세에 이미 작곡을 했으며 일본 동경에서 이케노우치 도모치로(池內友次郞) [∼유치로(∼有次郞)](?)으로부터 대위법과 작곡을 배우고 돌아와 항일 운동을 하다 투옥돼 고문 받은 적도 있다.
그는 광복 후 고아원 원장(부산 감만동 외국어 대 건너편 언덕, 남강학원)과 음악 선생을 거치다, 1955년 {현악 4중주 1번}, {피아노 3중주}등의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후 유럽으로 유학을 결심하고 떠난다.

그 후 1956년 6월부터 Paris에서 1년 공부하고 1957년 8월 Berlin으로 가서 Boris Blacher교수에게 사사를  받았는데 당시의 현대음악은 12음렬 기법에 식상하여 음악 표현에 대한 다원성 추구와 우연성의 원칙이 붐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그 일련의 경향들이 그에게 동양 음악을 접속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동시에 그 자신도 유럽 음악에 동화되면서 자신만의 악법과 사상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면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고, 1966년 [도나우에징엔 음악제]에서 대편성 오케스트라 곡인 {예약}으로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그는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옛 벗 최상한을 만나고, 강서고분 벽화[사신도]를 보고, 이후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하며 김일성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져 개인별장을 얻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67년 6월 17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년 복역하다 독일등 세계 각지의 항의를 받고 1969년 2월 초순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후 독일로 가서 1971년 Berlin대학에서 가르치며 1972년 독일 시민권 얻었다.(복역중 {나비 미망인}발표)

1989년에는 38선에서 [민족 음악 축전]을 열기로 했으나 정치적 사정으로 중지되어 33년만에 조국의 품에 안기는 기회를 잃었고, 1990년 에는 평양에서 [범민족 통일 음악회](10월)와 [송년 통일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1994년 9월 38년만에 한국에 일시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향후 북한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는 바람에 귀국을 단념하였으며, 남북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미국에서 1995년 1월에 개최할 예정이던 음악제 역시 '윤이상이 남한 측에 매수되었다'는 투서가 북한 당국에 날아들어 무산되자, 1994년 12월 동경에서 남북 양측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해 모든 정치적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으나  김일성주석이 사망한 뒤 북한과의 관계는 급속히 식어 갔다. 김정일서기와의 면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4년 북한 방문 때의 노동 신문에는 '해외 범민련 의장 윤이상은 앞으로 미미한 힘이나마 김정일 비서를 받들어 충성을 다하겠다'고 보도했고, 12월 동경의 호텔에서 정치적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하는 계기가 됨)

그는 조국인 한국에 자청하는 형식으로 귀국할 수도 없고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북한에도 만년에는 소외당하여 고립되고 [상처 입은 용]으로 음악에만 전념하여 유작이 된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를 남겼다.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이 작품은 뮌헨 올림픽 준비 위원장 빌리 다우에로부터 올림픽 문화 행사 개막 작품으로 위촉받아 1년에 걸쳐 작곡하여 올림픽 전야에 공연(1972.8.1.)하여 격찬을  받은 작품이다. 지휘자, 연출가, 무대장치, 오케스트라, 배우, 특히 심청 역을 맡은 젊은 여성 리리언 스키스는 서양인으로서 표현하기 힘든 한국 정서를 잘 살려냈다고 해서 더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무대장치도 아주 좋았다. 세계 축전 개막 공연에 어울리게 화려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았고 봉황새나 연꽃, 용궁 등도 섬세하면서도 매혹적이었으며 암석과 구름의 풍경 배치는 가히 환상이기까지 했다.


╣ 참고문헌 ╣

윤정모, {나비의 꿈} 한길사, 1996
도쿠야마 요시오, [상처입은 용 윤이상] {Win} 중앙일보사, 1996년 1월호
Britannica 백과사전 (1985)


╣ 관련기사 ╣

윤이상 타계 ▶ 폐렴으로 입원중 베를린에서

조국통일 음악열정 끝내 한으로 남아 .....

재독 작곡가 윤이상씨가 11월4일 0시40분 폐렴으로 입원중이던 베를린의 바르크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78세.
끝내 고국 방문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눈을 감은 윤이상씨는 한국 작곡가로는 유일하게 세계적인 위치에 오른 현대음악의 거장중 한사람이다.
윤씨는 말년에 폐렴 등 지병이 악화되면서 생을 마치기 전 고향 땅을 한번 밟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처럼 간절하게 표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끝내 한을 가슴 가득 안은 채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남 통영이 고향인 고인은 음악하는 것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눈을 피해 17세때 가출, 일본으로 음악공부를 떠나면서 예술가로서의 파란만장한 길에 들어섰다. 귀국 한 뒤 고향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56년 기량에 스스로 한계를 느껴 39세의 나이에 빠리국립음악원으로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무대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고인은 59년 독일 다름슈타트음악제에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한국의 궁중음악 색채를 표현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세계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67년 그의 인생을 평생옥죈 멍에로 작용한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 서울에 강제 송환돼 2년여 옥고를 치르고 떠난 후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71년 독일에 귀화,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곡가의 외길을 걸어온 그는 90년에는 북한을 방문, 남북문화교류의 첫 장을 연 범민족통일 음악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북한은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세우고 기념음악제를 여는 등 그를 정치적으로 예우해왔기 때문에 그의 발길은 자주 북한으로 향했고 그로 인해 친북인사라는 낙인이 찍혔다.
80년대말부터 국내 예술인들이 고인의 고국방문을 추진했으나 불발에 그쳤고, 지난해 9월 윤이상음악제 개최를 계기로 그의 귀국을 적극 추진했으나 막판에 정치적인 이유로 무산돼 아쉬움을 남겼다.

윤이상음악의 특징은 한국의 전통음악적 요소와 서양 현대기법을 깊이있게 조화시킨데 있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고뇌를 서양음악이라는 그릇에 잘 용해시켜 담아냈다. 세계음악계에서는 '동양적 현대음악의 개척자'로 평가하고있다.
작품은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비롯해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오페라 <심청>, 동베를린사건으로 구속돼있던중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꿈>등 1백50여편에 이른다.

╣ 2002 통영국제음악제 관련기사 ╣

올해로 2회째 맞는 통영국제음악제. 그 한가운데 동서양을 아우르는 작곡가 윤이상이 있다.
한국이 낳은, 하지만 세계에서 더 인정받았던그의 음악을 만난다.

20022002년 3월, 필자는 MBC의 통영국제음악제 MC를 맡아 일주일간 통영에 다녀왔다.
아름다운 남쪽 바다 풍경을 배경 삼아 열린, 현대음악의 파도와 같았던 음악축제. 현대음악을 중심으로 고전 음악과 재즈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 제1회 통영국제음악제의 중심에는 통영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고(故) 윤이상 선생의 음악이 있었다.

작곡가 윤이상은 한국에서보다 세계의 음악계에 더 많이 알려진 20 세기의 기념비적 작곡가다. 만 39세라는 나이에 뒤늦게 유학을 떠나 파리와 독일에서 공부했고, 1960년대 한국의 음률을 바탕으로 한 관현악곡 ‘예악’을 통해 세계 현대음악계의 중요한 작곡가로 부상한 윤이상은 불행히도 동백림사건으로 인해 고국과 등지기에 이른다.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베를린에서 납치되어 서울로 돌아온 윤이상은 재판을 통해 종신형, 10년형을 차례로 언도받고 결국 1969년 2월에 석방되어 서베를린 으로돌아간다. 이후 독일 국적을 취득,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초청되어 볼프강 자발리쉬의 지휘로 오페라〈심청〉을 세계에 선보인 윤이상은 천재성과 음악적 성과를 인정받아 서베를린 예술원 회원이자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활동한다.

“음악은 진실하게 살려는 처절한 노력의 표현”이라고 말한 윤이상은 광주항쟁을 베를린의 TV에서 목격하고 교향시‘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다. 그리고“작곡가는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태연히 혼자서 순수한 음의 나열만을 고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양심의 소리를 음악으로 토해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작품에서 주류를 이루는 순수미학과 음악으로 승화된 동양적 도교사상에서 결코 탈선하지 않는 작품세계를 들려주었다. 윤이상의 음악세계는 고전주의 시대의 베토벤과 20세기 초반의 쇼스타코비치가 그러했듯 사회에 대한 지성적 고뇌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윤이상의 음악을 실제로 들어본 한국의 일반 청중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번 기회에 윤이상의 음반을 통해 그의 음악세계를 접하고 싶다면 명장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실황연주로‘팡파르와 메모리얼’‘플루트 솔로를 위한 연습곡’ 이 담겨 있는 앨범(아카디아), 하인츠 홀리거, 우어줄라 홀리거 등 윤이상과 친분을 나누었던 명연주자들의 연주가 담긴 윤이상 8매 전집(카메라타)도 구할 수 있다.

윤이상은 생전에 자신의 오랜 음악적 소망을 이렇게 피력했다. “남도 창을 현대화하는 작업입니다. 남도 창은 훌륭한 성악예술이지만 이 유장한 굴곡이 있는 창법이 현대적으로 처리되면 아주 풍부한 음악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국악 기악곡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도 열고 싶습니다”라고. 그래서 그의 오페라에는 한국적 창의 기법들이, 그리고 기악곡에는 서양 악기로 국악기의 음색을 표현해낼 수 있도록 만든 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윤이상은 동양의 음악과 사상을 작곡 이론에 도입, 서양 현대음악에 새로운 길을 연 선구자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 장일범(음악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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