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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안익태 (安益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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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65)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 (安益泰, 1904~1965)안익태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12월 5일 초겨울 평양에서 태어났다. 안익태의 음악적 요람은 기독교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찬송가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여 교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914년 봄, 안익태는 종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학년 2학기 때 학예회에 뽑혀 나간 그는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하여 청중을 매료시킴으로써 음악의 신동이란 절찬을 받았다.

안익태는 1918년 4월 숭실에 입학하였다. 숭실은 한국 최초의 미션스쿨로서 민족주의 사상과 애국 정신이 가장 강렬한 학교였다. 숭실은 명실공히 애국자의 양성소였고 민족 정신의 훈련도장이었다. 숭실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은 벌써 애국 청년이었고, 숭실의 문을 나온 사람은 모두가 항일 민족운동가였다. 애국가는 숭실을 통하여 전 민족에게 퍼졌다. 일본에게 강점을 당한 뒤에 애국가의 제창이 엄금되었을 때에도 숭실에서는 계속 애국가를 불렀다. 학생들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옷깃을 바로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각오를 새롭게 다짐하였다. 이것이 숭실만이 가진 독특한 교풍이었다.

숭실에서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음악을 흡수하였다. 학교는 바이올린과 트럼펫까지 잘하는 그에게 숭실대학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게 하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2학년 때는 음악부장이 되었고 전도 부흥회에서의 찬송가 연주는 신도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거룩하고 경건한 분위기에서 음악을 익힌 그는 일생에 한 번도 유행가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내게 음악의 재능을 주신 이가 하나님인데, 나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음악을 사용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의 간증이었다.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나 나라 안팎이 온통 격동한 시기였다. 숭실은 졸업생에서 재학생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독립운동의 선봉이 되었고, 거사 이후에는 평양 모란봉 기자능 숲속에서 3・1운동 수감자들을 감옥에서 구출해내기 위한 밀회가 숭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회집되었다. 일본 경찰은 모임 현장을 급습하였다. 안익태가 포위망을 뚫고 겨우 피신한 곳이 마우리 선교사의 집이었다. 마우리 부부는 음악을 잘하는 안익태를 특별히 귀하게 여겨 여름방학 때 서울에 보내 캐나다 선교사인 그레그(George Greg)로부터 첼로를 배우게 했었다.
마우리 선교사는 상처 입은 안익태를 기독병원으로 옮겼으며,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도록 권유하였다. 1920년에 안익태는 일본에서 구니다찌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다이스텔 교수로부터 첼로를 전공하였으며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하여 서울 및 평양에서 첼로 독주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특히 평양에서 연주할 때는 고당 조만식 선생을 비롯하여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0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오자 일본 경찰은 심하게 그를 경계하여 독주회를 불허하였다. 지난 번의 연주회 행사가 불온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기피하였던 것이다. 고국에서 전혀 발을 못 붙이게 된 그는 또 한번 숭실의 은사인 마우리 선교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30년 8월 고국을 떠나는 그의 환송회에서 숭실 선생들은 만년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면서 애국가의 작곡을 부탁하였다.

안익태는 1932년 7월 필라델피아 음대 3학년에 편입학하여 교향악을 전공하고, 1935년부터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프리트 라이너 박사로부터 작곡과 지휘법을 배웠다. 그해 7월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에서 졸업장을 받았으며, 그 동안 작곡한〈코리아 환타지〉를 콩쿠르에 응모하여 뉴욕의 카네기 홀로부터 입선 통지서를 받았다. 1936년 4월 음악가로서 대성하겠다는 웅지를 품고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들어갔고, 그해 6월의 어느 날 밤 드디어 숙원의 애국가를 작곡하게 되었다. 꿈결에 귓전을 스치며 지나가는 멜로디에 벌떡 일어난 그는 악상을 더듬어 명상에 잠긴 끝에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그것을 오선지에 옮기는 데 성공하였다.
안익태는 애국가 악보를 곧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국민회의로 우송하였다. 국민회의 인사들은 교회에 모여 개창식을 열었고, 이 노래를 복사하여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발송하였다.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들은 이 애국가를 받아들고 힘차게 불렀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시 정보국에서는 한국어 방송을 하면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연주하여 한국인의 마음을 크게 고취시켰다.

그후 안익태는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의 합창 부분에 애국가의 전부를 삽입하여〈코리아 환타지〉라는 대작을 완성하였다. 그는 세계 어디에서나 코리아 환타지의 종악장인 애국가 합창을 지휘할 때는 반드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한국말 발음으로 부르게 하였고 이것 하나만 보아도 그의 애국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광복 후 미군정기를 벗어나 정부를 수립한 우리 나라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대한민국 국가로 정식 채택하였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정부가 채택한 애국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 온 안익태의 믿음 어린 애국적 증언의 한토막이다. 그는 두번 다시 이 곡을 수정하거나 검토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936년 9월 안익태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서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로부터 베토벤 음악과 지휘법을 배우고, 1937년 2월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졸탄 코다이로부터 작곡을, 에르네스트 도나니로부터는 지휘법을 배웠다. 이후 1937년 3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국립악단의 객원 지휘를 시작으로 부다페스트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특히 1939년부터는 본격적인 유럽 여행에 나서 1940년 12월에 세계 제1급을 과시하는 베를린 필하모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그의 명성은 전 유럽에 확산되어 ‘서양 음악을 정복한 동양의 청년 지휘자 안익태’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후 로마악단과 파리교향악단도 지휘하였다.

1946년 7월 5일 41세의 노총각이었던 안익태는 수년 전부터 그를 사모해 온 스페인 여인 로리타 탈라베라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1947년 1월 14일 마졸리카 교향악단을 창단하였으며 그 공로로 명예 시민증을 받고 스페인 정부로부터는 영주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세계 음악계는 대 음악가인 안익태를 한 군데에 묶어두지 않았다. 1947년 10월 영국 로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그는 런던에서의 성공적인 지휘를 마치고 1949년 11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동부, 동남부, 중부, 서부지방 등 대 도시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아 크게 명성을 떨쳤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이를 녹음하여 한국 시간에 방송하였다. 1949년 12월,〈코리아 환타지〉는 이렇게 하여 조국의 동포에게 처음으로 전파된 것이다.

1959년 9월에는 남미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지휘 초청을 받고 그곳으로 갔다. 그는 멕시코에도 갔으며, 대만, 필리핀, 터어키 등 세계를 거의 한바퀴 돌면서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지휘봉을 높이 들었다. 1960년 1월에는 일본의 도쿄에 나타나 음악으로 일본을 정복하였다. 여기서도〈코리아 환타지〉를 연주하면서 우리의 애국가를 한국어 발음으로 일본인 합창단이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경축 음악회 지휘를 맡아 그리운 고향 산천을 다시 찾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조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가가 되어 금의환양한 것이다. 안익태는 3월 26일 경무대에서 개최된 연주회를 시작으로 4월 말 스페인으로 갈 때까지 여러 차례의 연주회를 지휘하였다. 연주회마다 그의 입신한 듯한 지휘에 청중들은 한결같이 도취되었다. 정부 관리들과 국회의원, 사회 저명 인사들을 위한〈코리아 환타지〉의 특별 연주가 국회의사당에서 개최되었다. 애국가의 합창 부분에 이르자 객석은 감격의 도가니로 한껏 휩싸였다. 이 자리에서 안익태는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의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5년 7월 4일 영국 제일의 연주회장인 로얄 알버트 홀에서의 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를 끝으로 지병인 각기병과 간장염이 겹쳐 그해 9월 16일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소천하였다. 하늘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시신은 조국에 묻히고 싶다는 본인의 평소 유언에 따라 1977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숭실100년사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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