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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김인식 (金仁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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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1963)
김인식 선생은 1885년 신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과 새로운 복음이 들어 온 소위 개화기 초기에 태어났다. 이로부터 9년 후 즉, 그의 나이 9살 때인 1894년에는 개화의 거센 물결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갑오경장(甲午更張)과 동학란이었다.그가 새 학문과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러한 전진(戰塵)의 진통 속에서였다. 그가 자신이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1934)한 것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에 음악을 배운다면 누구나 다 종교 분야에서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음악은 대개 서양인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음악을 배운 동기도 마찬가지다. 그때 나의 삼촌께서 장사를 하시다가 동학란이 일어나서 삼촌도 그 혐의로 체포되어 형을 받게 되었을 때, 삼촌은 예수교인이라는 구실 아래 형을 면하게 되어 그 다음부터 예수교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게 된 것을 기꺼이 생각했고, 나도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끝에 풍금 치는 것이며 노래하는 것을 몹시 흥미 깊게 보고 듣다가, 12살(1897)에 숭실학당(평양)에 들어가서 창가를 열심히 배웠다.
  그 다음 좀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은 생각이 나서 다시 선교사 부인 헌트와 스눅(숭의여학교 교장)에게서 성악을 배웠는데 그것이 아마 16살 때인 듯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별로 악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집으로 다니며 악보를 베껴오기도 했는데 그 집에 있는 악보란 악보는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베껴 놓았던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보아 헨델이나 그외 많은 옛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김 선생도 악보를 사보(寫譜)하면서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편 오르간도 열심히 배우는 중에 좀더 많이 연습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어떤 선교사집에 헌 풍금이 있는 것을 알고 사려고 했더니 12원이라고 해서(그때는 엽전을 사용했다) 도저히 혼자서는 살 수 없어 기숙사에 동숙하는 동료 4명과 합자해서 샀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김영환(金永煥,  역시 양악 선구자로 일본에서 피아노를 전공함)의 부친이었다. 그 네 사람은 서로 돌려가면서 연습하다가 나머지 세 사람은 다 떨어져 나가고 혼자만 남아 연습했다 하니 세 사람의 원조로 오르간을 제 것으로 얻은 셈이 된다.
너무나 열심히 치는 바람에 기숙사 학생들이 시끄럽다고 교장에게 호소한 일이 있으며, 나중에 그 때문에 기숙사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3학년이 되던 해에는 그의 오르간을 연주하는 실력이 너무나 좋았던 까닭에, 교장이 그로 하여금 하급반 음악 시간을 담당해서 가르치도록 했다.
그는 한 가지에만 만족을 느끼지 아니하고 그래함 리 선교자에게서 코넷을 배웠다. 그래함 리가 바이올린을 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은 욕망에 부모에게 졸라 손에 넣은 후 스승도 없이 혼자서 줄을 맞추어가면서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 결과 사흘만에 그가 찬송가를 훌륭히 연주하는 것을 보고, 그래함 리를 위시해서 많은 선교사들이 놀랐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음악에 심취하여 숭실학교 3년을 마치고, 영어를 더 배워서 미국으로 유학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22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 실정이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일하도록 가만 두지 않았다. 학교는 많지만(그후 선교계 학교뿐만 아니라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다) 음악 교사가 없는 때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한국 최초의 음악 교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우선 황성기독청년회(현 YMCA의 前身)가 설립한 상동(尙洞) 청년 학원 중학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호학교(현 중앙고교 전신), 진명, 오성, 경신, 배재 등 여러 학교를 돌며 가르치기에 분망했다.
1910년 이화학당(梨花學堂) 대학부에 음악과가 생긴 것과 때를 같이하여, 최초의 음악 전문 교육기관인 조양구락부가 생기자 그가 필요하게 되었다. 거기서 가르침을 받고 졸업한 사람 중에는 그후 본격적인 음악가가 된 이상준과 홍난파가 끼어 있었다. 한편 이후에 그는 YMCA학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학원에 합창단을 조직하고 합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 남성만의 합창에서 혼성으로 발전했으니 이 혼성합창단이 소위 경성합창대이고, 현 중앙청 종합청사 근처에 있는 종교교회 안에서 합창대를 시작한 것이 한국 합창운동의 효시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찬송가는 선교사들의 서투른 번역 가사를 이용했는데 그는 번역에 뜻을 두어 많은 찬송가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장로교 찬송가 속에 그의 번역 가사가 많지만 번역자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던 그 시절 관례 때문에 후일 어느 것이 그의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성곡과 일반 노래 가사 번역도 많이 하였다. 유명한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곡의 우리말 가사가 바로 그가 번역한 것이다. 많은 번역곡 중 몇 곡만은 그의 번역으로 알려지게 되어 곡 왼편 위에 이름이 적혀 있지만 그 많은 성곡이 역자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그가 번역과 지휘에 대단한 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번역과 공연을 들 수 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다시 한 번 그의 선각자로서의 놀라운 활동상을 알 수 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인 광무(光武) 9년(1905)에 숭실학교에서 연합운동회가 열릴 때 부르기 위하여 <학도가>의 작사와 작곡을 손수하였고, 그후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매우 잘 표현한 노래인 <표모가(漂母歌)>를 작곡하였다. 또한 <영산회상>, <여민락>, 가곡 채보와 한국 전래의 고전음악 채보, <애국가>, <漸進歌>, <國旗歌> 등의 작곡도 했다.

한편  그의 작사로 된 애국가가 융희 4년(1910년) 6월 10일 발행인 보성중학교 친목회보 제1호에 실렸는데, 곡은 영국 민요 ‘올드랭 사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후렴이 현재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후렴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품어 온 음악에 대한 정열로 그후도 끊임없이 일생을 후배 양성, 작사 작곡 그리고 고전 음악 채보에까지 그의 온갖 심혈을 쏟았다. 당시 양악 불모지였던 이 나라 음악 전반에 걸쳐 그가 이룩한 업적은 아무리 칭송한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숭실 100년사>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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