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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장혜원(張惠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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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 학력
1958  숙명여고 졸
1962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졸 (학사)
1964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음악학사)
1968  독일 Frankfrut 국립음대 졸업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Kongentexamen 학위 취득) 



■ 경력(교육)
1968 - 현재  이화여대 음대 교수
1984 - 1998  이화여대 피아노과 과장
1995 - 1999  이화여대 음악대학 학장
1997 - 1999  이화여대 음악연구소 설립, 연구소 소장


■ 수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
한국음악평론가 협회상 
한국팬클럽 음악상
한국음악상 (한국음악협회)
루마니아 콘스탄짜시 문화상
한국예술평론가 협의회 최우수 예술인상
음악저널 제1회 한국음악대상
영창 음악상, 월간 음악상


■ 기타활동
포르투칼 비안다 다 모타, 스페인 바이요나, 불가리아 판쵸 블라디 게로프,
일본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쿨 심사위원
1994 - 1997  한국 피아노 학회 학장
한국음악학회 부회장 역임
한국피아노학회 부회장 역임
한국음악협회 이사 역임
현재 한국문예 진흥원 이사
예술의 전당 이사
한국 피아노 학회 회장 이원문화원 건립, 대표
전문인 참여 포럼 고문 
 
***  관련기사  ***
 
[2000. 5. 22    숙녀회보 제10호/ 자랑스런 숙명인 ' ]

(11) 뮤즈의 現身, 새 문화운동의 地坪을 여는 장혜원 이대음대교수
      -47회(1958년 졸업)


  어서 딸을 낳아 피아니스트로 키워야겠다는 어머니 김태임여사(88세, 경기여고 졸)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오빠 셋, 남동생 하나의 5남매 중 외딸이자 넷째로 태어난 장혜원 동문은, 태중 크리스천이라는 말처럼 태중 음악가이자 문화인이었다. 원래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어머니와 경성제대 의대 재학시 의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첼로를 연주하셨던 아버지 장 경 박사(98년 작고)의 슬하에서 5살때부터 건반에 손을 댄 장동문은 첼로를 잘 켜는 오빠들과 남동생 사이에서 피아니스트로서의 비단길을 밟아갈 수 있었다.

  "여름 피난 때 피아노를 못 가져가게 되자 어머니께서 창호지에 건반을 자로 대고 그려 밥상에 붙여 스케일을 치게 했어요. 그리고 곧 피아노를 트럭에 싣고 내렸왔죠. 매일 5시간 이상 연습했어요." 세종문화회관 뒤의 도렴동에서 태어난 장동문은 수송국교의 학예회를 휩쓸다가 피난지 부산에서 숙명여중에 합격하고 수복 후 서울에서 입학했다.

  "숙명의 문화적 환경이 참으로 좋았어요. 당시 야마하 그랜드피아노가 학교에 있었는데 조회 때 애국가와 교가 반주를 했죠. 무용선생님은 나에게 쇼팽의 왈츠를 치게 하며 수업을 하셨구요. 문교부 주최 콩루르에 입상하고 라디오의 피아노 프로에 고정 출연했고 배재학당 강당, 부민관 강당에서 꼬마 연주가로 활약했어요. 그때만해도 피아노가 호기심의 대상이었는데, 숙명여고 1년때엔 서울시향과 명동 국립극장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협연했어요. 서울 시내 고교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문교장 선생님과 매일의 철학적 명상으로 인생관과 지혜를 심어주신 김정호선생님(국어)을 장 동문은 무척 존경했다. 평생의 좌우명으로 지녀오는 '정중동(靜中動)'의 철학도 김정호 선생님께 배웠다.

  "한국음악 대상 받을 때 어느 심사위원이 저를 정중동의 예술가라고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소녀시절의 교훈이 저를 만든거죠." 서울대 의대의 이상복박사와 33살에 결혼 38살에 외동딸 호원(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졸업)을 둔 장동문은 가냘프고 조용한 외모로는 상상도 못할만큼 열정적으로 연주와 교육을 해냈고 종합문화운동 보금자리를 만들어 냈다. 이화여대 음대에 특기생으로 입학한 장동문은 전교에서 2명뿐인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독일 정부의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에 유학했다. 당시 독일어 사전을 통째 외느라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끼게 되었다고 한다. 귀국한 68년 가을 학기부터 이대 피아노과 전임강사를 시작, 32년째 봉직하고 있다. 아버지 장 박사께선 이대 의대 학장을 역임하셨고 어머니 김태임여사는 문화체육부에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으셨다. 동아일보 주최로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귀국독주회를 가졌으며 연주를 위한 해외공연은 부지기수였다.

  "이대 주최 콩쿠르 입상으로 특기생 입학했고 이대 재학시 교육부 콩쿠르 전국 1등을 했죠. 레나타 • 테발디, 프랑코 • 코렐리, 앙드레 • 나발라, 루지에로 • 리치 등 당대 거장들과 협연했고, 일본과 포르투칼, 스페인, 불가리아 등의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도 역임했어요. 음악에 엄마를 빼앗긴 딸이 미술 전공을 하게 됐는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죠." 1980년대 세계 2위인 낙소스레코드회사와 계약을 맺는 행운이 찾아왔다. 쉴새없이 CD를 레코딩하면서도 음대학장을 지내고 음악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이 되었다.  "매년 1개씩 CD를 만들었는데 언젠가 스페인에서 보니까 시골 곳곳에도 내 CD가 있었어요. 프랑스의 가브리엘 • 피에르네, 자크 • 이베르의 피아노 전집 CD는 프랑스의 권위있는 음악가가 오래 기억돼야 할 작품이라고 평을 했지요. 33개의 스칼라티 소나타, 훔멜의 피아노 협주곡, 하이든과 바하 등 잊을 수 없는 작업이었어요" 88년에 이상복박사의 한산 이씨 고향인 충남 천안에 이원문화원을 세웠다. 유럽식 섬머스쿨을 만들려던 것인데 지금은 모든 문화인들의 명소가 되었다.

  "운치있는 사과 창고에서 세미나를 시작했어요.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김남조 시인, 조병화 시인, 고은 시인 등의 특강을 준비했고 김태길 박사, 김동길 박사, 이한빈 박사의 강의도 했죠. 음악이외의 철학과 문학을 음악과 더불어 연구하고 누리는 것이죠." 천안은 교통이 좀 멀어서 최근 마포 한신빌딩 1층(불교방송 옆)에 이원문화원 본원을 짓고 있다. 여름에 낙성식을 할 것 같다.

  "외국어를 제대로 배워서 외국문화를 익혀야 합니다. 외국에선 피아노레슨 전후에 참 토론을 많이 하죠. 중학교때부터 시를 수십편씩 외웠고 백시영 선생님 극본의 연극 주연도 했었어요. 피아노는 再現의 예술인데 작곡가의 악상을 재현하려면 인성이 완숙돼야 합니다. 감수성의 촉각을 활짝 펴놓고 늘 시를 외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어요." 장동문의 재학시절 특기반 편성은 미술반이기도! 기술연마는 젊어서의 할 일이지만 음악가로서의 완성을 향해 늘 소녀같은 마음으로 감사하고 느끼고 베풀 준비가 돼있다. '음악할머니'가 되라던 김옥길 총장,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던 김활란 총장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서도...


[2001. 9  Asiana 기내지 ]

    기내에서 만난 사람 장.혜.원


거룩한 예술이여!/그 얼마나 많은 어두운 시간 속에서/
그대는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던가/
그리고 그대는 그 얼마나 방황하는 나의 마음을/신비로운 세계로 이끌어 왔던가/
달콤하고 성스러운 그대의 화음이 들려와/나의 마음은 하늘로 열리네/거룩한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하오.

  장혜원 교수의 마음이 그러하다.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 붙임’ 에 나오는 쇼버의 아름다운 시를 그이가 즐겨 읊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까닭은. 해방 되기 전인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옆에 두었으니 어느새 60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이의 삶은 늘 음악이었고, 음악으로 인해 여전히 단정하고 순하고 평온하게 풍요롭다. 세월과 일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그이의 마음 다치지 않고 지금 이 자리, 반듯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음악 이야기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세계 각국에서 명반으로 사랑받는 많은 레코딩과 국내외 무대에서의 연주활동, 수많은 국제 콩쿠르릐 심사위원 그것들을 통한 아티스트로서의 성취가 중요했다. 그런 그에게 스승의 말은 큰 숙제얐다. 돌아가시기 2년 전 김옥기 전 이대 총장은 그이를 불러 놓고 말했다. “너는 이화의 음악할머니가 아니라 한국의 음악할머니가 되어야 한다.” 10여년 전 천안의 이원문화원을 만들어 음악인의 고향을 일구었던 일도. 1995년 이화여대 음대 학장으로 취임하며 음악교육의 실질성과 새로운 교육의 방법에 열과 혼을 쏟았던 일도. 한국피아노학괴 회장, 한국음악학회 회장으로 기꺼이 동분서주했던 일도 그리고 작년 10월 마포의 한 빌딩에 피아노를 위한 실내악 공간 이원문화센터를 만든 일도, 스승의 그 말에 대한 답가이며, 평생을 함께한 ‘거룩한 예술’에 대한 헌사인 것이다.

사과 창고에 스타인웨이를 가져다 놓고 음악회를 열었던 천안의 이원문화원. 은근히 배어나오는 사과의 달콤한 향이 건반 위를 달리던 연주자의 코끝에서 마음에 가 닿고 선율을 따라 듣는 귀를 적셔 왔다. 일년 내내 꽃이지지 않는 집, 배나무며 감나무가 울을 이루는 그곳엔 지금도 여름만 되면 전국각지에서 전문 연주인들이 몰려와 음악과 음악교육에 관해 밤 새워 이야기를 나눈다.
“원로 음악인들, 우리의 스승인 그분들을 모시고 말씀도 듣고 박경리 선생이나 김태길 선생, 고은 선생등 문확과 철학을 하시는 분들을 모셔 이야기도 들어요. 음악이 어디 홀로 존재하나요? 자기 분야에만 몰두하게 되면 편협해져요. 기능인이 아니니까. 음악 교육에 관한 이야기도 나눠요. 지금은 바흐와 모차르트만 가지고 음악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원문화원은 그렇게 음악인들에게 재충전, 재교육의 공간이에요.”

  자연 속에 놓인 작은 음악홀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70년 프랑스 연주 여행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가 연주할 고은 에밀 졸라가 설던 집의 마굿간을 개조한, ‘참 아름다운’ 홀이었다. 그 작은 홀에서 장혜원은 “나도 모르게 음악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경험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가 작은 홀에서, 외국 유명한 교수들의 섬머 스쿨이 시골의 농가등에서 열리는 것도. 실로 형식이 아니라 내용으로서의 진정성을, 음악이 음악다울 수 있는 공간에 놓여야 하는 까닭임을 알았다.

그이는 10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40며의 국내 대표적인 피아니스트가 모일 ‘그랜드피아노 콘서느’를 준비하고 서울의 북적한 도심 속에 한가로이 놓인 이원문화센터를 예술과 학문의 모든 것들이 교류하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문화살롱으로 만들게에 분주하면서도 11월 레코딩할 훔멜의 피아노 소나타에 다시 한 번 흠뻑 빠져있다. 교육자로, 문화인으로서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그이는 피아니스트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현역임을 사랑한다.“과정이 예술이 거예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고.”

늘 그렇듯, 그이는 하루 해가 지난 밤이면 거실 한쪽 구석의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맡기고 마음을 다독이며 시 한 편 나직이 읊조릴 것이다. 읊조리면서 생각할 것이다. “거룩한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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