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연주.감상후기, 등업요청, 질문, 제안, 유머, 창작 노랫말, 공연초대와 일상적 이야기 등 주제와 형식, 성격에 관계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 영리 목적의 광고성 정보는 금지하며 무단 게재할 경우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회원문단은 자유게시판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송문헌 시인의 가곡시 <내 가슴의 그대여>, 작품평 눈길...

안재동 10 1454
한국가곡작사가협회 회장이신
송문헌 시인님의 <내 가슴의 그대여>(창작가곡 시)가 눈길을 끄네요.
그와 관련한 작품평이 흥미롭게도 어느 평론가로부터 발표되어
각급 언론 대상의 보도자료와 인터넷 포털을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파란닷컴(클릭)

* 야후(클릭)


* 곡 감상 :
http://jaksaga.net/sub05/include/audio/listen.html?music_no=154
10 Comments
정우동 2006.08.09 23:48  
  시사랑, 순수가곡문학상에 송문헌 시인 창작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 선정
[뉴스와이어] 2006-08-09 13:53
 
 

(서울=뉴스와이어)‘사랑하는 님에 대한 연민의 뼈다귀로 절규하는 음표들의 반란’

도서출판 시사랑(대표:박인과)에서는 2006년 8월 8일 ‘시사랑 순수가곡문학상’에 송문헌 시인이 창작한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를 선정했다.

시사랑에서는 수시로 시와 음악의 활성화를 위해 언제든지 해당 작품이 있으면 ‘시사랑 순수가곡문학상’ 혹은 ‘시사랑 순수가곡작곡가상’을 선정하여 시사랑의 문예지 ‘사각의 자유’에 발표한다.

도서출판 시사랑(www.sisarang.co.kr)에서는 또한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작품력으로만 신인들을 문단에 데뷔시키기 위해서 항상 “시사랑 신인문학상” 작품을 공모하고 있으며, 당선작이 있을 경우 수시로 매스컴에 발표하고 있다.

이 “신인문학상 공모”는 “모든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로 돌아가는 사회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작품이 있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 문단에 데뷔를 못하고 있는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시켜 이 사회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시사랑에서는 “창조세계문학상”과 “횃불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번 ‘시사랑 순수가곡문학상’에 선정된 작품, 송문헌 시인(가곡작사가협회 회장)이 작시하고 박이제 교수(중앙대)가 작곡한 “내 가슴의 그대여”의 곡과 가사 및 ‘시사랑 순수가곡문학상 선정평’ 등은 다음과 같다.

▣ 곡
다음의 유알엘에서 들을 수 있다.
<a href=http://jaksaga.net/sub05/include/audio/listen.html?music_no=154 target=_blank>http://jaksaga.net/sub05/include/audio/listen.html?music_no=154 </a>

▣ 가사
♠ 내 가슴의 그대여 ♠
― 송문헌 시 / 박이제 곡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메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가랑잎: 활엽수의 마른 잎.
*불현듯: 불을 켜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 송문헌 시인 약력
충북 괴산 출생.
1992년「천평시」동인지에 시 '진달래 만발' 등 12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 「눈이 내리면 외포리에 가고 싶다」.「아라리는 아직도 이거리에 있다」.
「그물에 걸린 바다」외 공저 동인시집 다수.
부원문학상 수상(1995년). 제16회 한국자유시인협회상 수상(2002년 1월).
(계간)시와시학 기획위원장. 우이시낭송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인권위원. 민족문학작가회 회원.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운영위원장. 한국문인산악회 부회장.
한국가곡작사가협회 회장.

▣ 시사랑 순수가곡문학상 선정평: 박인과 문학평론가
― 사랑하는 님에 대한 연민의 뼈다귀로 절규하는 음표들의 반란

필자의 시골마을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리움의 추억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가 떨어지기를 거듭하여 이제 어렸을 때의 필자의 기억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게 되었다. 특히 같이 한마을에 살던 어르신들이 대부분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도시화 되어 가는 우리 마을에서 순수한 옛 고향의 정경을 만끽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한 편의 가곡에서 고풍스런 옛 가락의 그 순수한 청각과 미각과 시각과 감각 등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시골에 갈 때마다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모 아무개, 아무개는 죽어버렸지랑, 다 죽고 없어졌지랑,
그런데 요상한 것은 요 앞집, 뒷집의 누구누구는 살아있당께,
갸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교회에 다니는데,
교회에 다니는 갸들은 아직도 살아있당께,
묘한 일이여, 새벽기도 간다고 미명에 나갔다가
아침에 돌아오기도 하는데 말이여,
일요일에는 그 교횐가 뭔가 연애당인가 하는 데서
막 노래를 해부쳐버리지랑,
그리고 기도라고 한답시고 얼마나 오래 그렇게 앉아 있는지
나는 한 번 따라갔다가 지겨워서 그냥 와버렸지랑”,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말이져,
그 사람들은 아직까지 병도 안걸리고 거뜬히 살아남아 있당께,
정말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하는 게 있는 가벼, 그
래서 갸들을 돌보는 가벼”

이런 이야기들을 숱하게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어떤 종교적인 교리나 신의 섭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음악이란 무엇인가. 명상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에서 시와 음악이 차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필자의 관심이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혹은 어떤 일을 하다가 갑자기 어디에선가 흘러나오는 노래나 음악에 휩쓸려서 심취해본 경험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육체에 음악의 코드(code)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육체라 함은 정신과 영혼과 몸 등 우리의 존재를 대변하는 본질적인 차원의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의 육체에 음악의 코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항상 우리의 자아가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우리에게 맞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의 송문헌의 시어에서 보여 지듯이 그렇게 ‘불현듯이’ 우리의 육체에 맞는 소리들이 부딪쳐 오게 되는데 그때 우리의 육체가, 잠들어 있던 우리의 영혼이, ‘불현듯이’ 깨어나는 것이다. 자의식의 범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순수한 소리의 물결들이 우리 존재의 주위로 몰려오는 것이다. 그 소리들의 부딪침으로 인하여 옛적 시골 외할아버지 댁의 하얀 박이 여물던 초가지붕 아래 툇마루에서 낮잠 자던 어린 아이의 귀에 익은 듯한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영혼의 깊은 평화의 골짜기를 두드리며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한민족의 정서이다. 우리의 가곡은 이 한민족의 음악적 감각에 충실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음악의 보고이다. 이러한 가곡의 특성은 풍요로운 영혼의 미적 감성으로 싱그럽게 흐르는 음표들의 샘물이 되는 것이다. 이 영혼의 미적 감성은 육체의 감각과 동일하다. 육체 없이 영혼의 정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의 감각은 우주와 개체의 음악 통신에 있어서 음표들의 길고 짧음, 높고 낮음, 강하고 약함, 부드럽고 거친 등등의 모든 소리의 데이터들을 수신하고 분석하여 우리 몸의 각 부분에 전달할 수 있게 하는 통신프로그램으로 입력되어 있다. 소리의 데이터들을 받아들인 우리의 몸은 그 정보들을 활용하여 다시 생리적인 음악의 오선지를 형성하게 되고, 육체 안에서 생명의 화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의 화음이 빚어질 때 우리는 기쁘고 평화롭고 행복한 감정의 레이더를 힘 있게 곧추세우고 온 몸이 안테나가 되어 강인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우주의 에너지를 우리의 존재 가득히 수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수신되는 음의 파동이 긍정적인 생명의 코드를 함유하고 있어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어느날 소리들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과연 소리들의 부딪힘만으로 우리의 영혼의 비무장지대의 차가운 사슬이 풀리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육체 통신이 소리들의 부딪힘만으로 가능할까.

여기에는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그리움의 코드>가 우리의 본질적 내면에 최첨단의 마이크로 칩(microchip)으로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초감각지대의 신경세포들을 형성하며 감각의 고밀도집적회로가 우리의 영혼의 내면에 장착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육체의 코드에 소리들이 부딪쳐 올 때 그 정보들을 내면화하여 우리의 영혼과 두뇌와 감성에 내재하고 있는 음악의 선율들을 자극하여 소리의 경락(經絡)을 치고 들어가 나태하고 죄성에 젖은 절망의 껍질 속에 잠자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게 되는 것이다. 신은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가 고장 났을 때 회복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최첨단 과학도 따르지 못하는 사랑의 칩(chip)을, 그 그리움의 고밀도집적회로를 우리의 존재 깊숙이 내면화시켜 놓은 것이다.

이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에서 그러한 많은 소리들의 경락(經絡)에 돋고 있는 혈자리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더 강렬하게 두드러진 혈자리들을 다음과 같이 ‘/’로 표기해 본다. ‘/’로 표기한 왼쪽 시어(단 한 개의 글씨)의 부분에 이 가곡의 혈자리가 존재하고 있다. 가곡을 들으면서 이 혈자리를 감지해 보자. 이 혈자리는 가파른 가곡의 산에 오르는 희망의 턱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소리의 강을 견뎌내는 싱싱한 기다림의 성대를 수시로 자극하고 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메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
~~~~~~~~~~~~~~~~~~~~~그리움/을 어이해

이 가곡은 음의 혈자리 부분(위에서 보이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음표들이 서서히 튀어오르다가 혈자리에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 그 정상(혈자리)에서부터 서서히 낮게 낮게 가락의 높고 낮은 경락(經絡)을 두드리며 하산한다. 그러한 가곡의 흐름에서 우리는 역동적인 멜로디를 감상하며 눈물과 기쁨과 격정적인 고통과 분노와 환희 등의 감정들을 우리의 내면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에 상응하는 감성의 칩(chip)이, 음표들이 흐르는 선율로써 우리의 육체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주가 만든 신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이 시와 곡이 푀엔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데, 가곡의 뼈대도 한민족의 지리적 특성이 되는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속성을 닮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민족의 정서가 작가의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시 “내 가슴의 그대여”에 나타나 있는 혈자리들을 중심으로 깔끔한 가락들의 행렬이 서쪽에서 서서히 접근하여 오르다가 동쪽의 정상에 이르면 다시 급히 내려오거나, 동쪽에서 급하게 오른 정상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 가곡의 선율의 흐름은 높새바람처럼 가곡의 산맥을 서서히 오르거나 급히 오른 정상에서, 다시 급히 내려오거나 서서히 내려오면서 한반도의 기후적 특성처럼 인간의 희노애락을 담은 고저장단의 음악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음악의 연주가 이 시의 혈자리를 중심으로 여울지거나 흩어지면서 한반도의 숨골과 혈맥을 짚으며 풍수지리의 지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가곡의 혈자리 중에서도 “그리움”이라는 부분(제1연과 제2연 두 군데에 나타남)에서는 한방에서 말하는 일침을 가하는 곳, 즉 가곡의 흐름의 정상에 있는 음률의 정수리를 단 한 방의 음의 침(鍼)으로 뚫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가곡의 유연한 흐름 속에서 높은 음표가 튀어나와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소리의 침(鍼)을 강력한 탄성력으로 투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즉시 서서히 풀어내고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 연주도 “그리움/을 어이해” 부분을 한 번 더 반복함으로써 싱그럽게 낮아지는 음감의 다리미질로 가지런히 정서의 자락을 펴서 안정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반복되는 “그리움/을 어이해”의 부분에 이르러서는 급상승하는 소리의 혈을 죽여서 감미롭고 낮게 표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가곡은 이렇게 음표들이 흐르는 산맥의 혈맥들을, 그 우주의 음향이 소리의 에너지로 흐르는 경락(經絡)의 적당한 경혈(經穴)의 위치에 박혀 있는 그 소리의 칩(chip)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만물의 생리적인 기의 흐름을 다스리는 음악적 효과로서 적당히 올려주고 내려주듯이, 또한 강하게 때려주고 어루만져 주듯이, 우리의 심신의 건강한 신경조직에 충만한 에너지의 흐름에 꼭 필요한 화음의 튼튼한 음(音)의 뼈대들을, 즉 소리의 뼉다귀들을 우리의 텅 빈 내면의 초가집 앞으로 흐르는 싱싱한 산골물소리로 세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고향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음악과 명상(=기도)은 우리에게 있어서 건강한 생활이라는 큰 선물을 안겨다 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생활은 바로 장수의 길이다. 음악, 그것이 교회 음악이 되었든 가곡이 되었든 상관이 없다. 우리가 건강하고 풍요로운 정서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 음악이 얼마나 인간의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정서에,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감각에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선택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음악적 코드가 생리적 감각에 맞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인간의 건강의 혈을 두드릴 수 있는 음표들로서 이루어져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문헌의 시와 박이제의 곡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는 반복적인 음이 가락의 앞뒤에 붙어서 이 멜로디가 마치 음표의 꼬리들을 물고 우주 밖으로 날아다니듯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감성적으로 형상화시키며 진행되고 있다. 시각적으로 형상화 시키는 예를 들면 이 가곡의 시에서 문장의 앞부분이 제1연에서 “내~, 내~, 내~, 아~, 가~, 이~”와 같이 제2연에서도 “내~, 내~, 내~, 아~, 별~, 이~”로 진행되어 같은 음의 반복 효과를 급상승시키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또한 문장의 뒷부분에서도 제1연에서 “다~, 다~, 오~, 여~, 까~, 해~”와 같이 제2연에서도 “다~, 다~, 오~, 여~, 까~, 해~”로 반복되며 우리의 찢어진 정신과 영혼의 틈새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듯 싱싱한 생명력으로 그윽한 선율을 타고 우리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다시 흘러나감을 반복하며 마치 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역할처럼 우리의 소리의 바다에서 파란 희망의 포말을 흔들며 혼란된 영혼의 정서를 가지런히 쓸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

송문헌의 위 시어의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는 부분에서 ‘내 가슴’은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고 ‘그대’는 우리의 육체 안에 장착되어 있는 그리움의 코드의 소재 역할을 한다. ‘내 가슴의 그대를 보내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아직 사랑의 향기가 남아 있는 것이고 그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항상 여울지는 가락의 절규로 이어지고 있는 음향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송문헌은 “내 가슴의 그대를 단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송문헌의 시에 대한 묵상이 이렇게 이어지면서 박이제의 곡은 여기에서 살아있는 음표의 꼬리들을 길거나 짧게 투입시키면서 그 묵상의 어깨에 날개를 달게 한다. ‘내 가슴’에 잠겨 있는 생명의 혼을 깨워 거리낌 없이 날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와 음악의 특수한 기능적인 면에 대한 특출한 음가의 향기들을 맡아볼 수 있고 들어볼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기어이는 사모하는 정이 깊어 마음에 뜨거운 불이 지펴지고 있다. “내 마음 속에 촛불 켜고 그대 찾아 헤매이오”에서 시어의 형식은 능동적 입장에서 ‘그대’(여기서 그대라는 사랑의 대상이 어떤 여인이든 신(神)이든 진리의 실체이든 관계가 없다)를 찾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 ‘내 마음 속에 촛불을 켜고’라는 시어를 보면 사실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찾아와 달라는 것이다. 촛불을 밝히는 것은 ‘그대’가 나의 불빛을 보고 찾아와 달라는 것이다. 나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웅크리고 있는 고독의 실체에 영원한 음감으로 젖어드는 생명의 계시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이 시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가랑잎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에서 노골화되어 나타난다. ‘가랑잎을 앞세운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은 촛불로 타고 있는데 ‘가랑잎을 앞세우고 오시는 그대’라고 하는 것은, 촛불에 의해 가랑잎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게 되고 그로 인해 그대도 거세게 타버릴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에게 오기만 하면 나의 사랑으로 불타버릴 것을 암시하고 있는 엄청난, 그야말로 태풍노도와 같은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더군다나 ‘가랑잎’은 그대의 기다림의 뿌리로 샘물이 솟기를 그리움의 잎맥으로 목마르게 기다리다가 바삭바삭 말라버린 불쏘시개의 운명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시인의 의도를 감지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현듯이’의 사전적인 의미 또한 “불을 켜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라는 표현에 쓰이는 것이니 이 ‘불을 켜서 일어나듯이’ 사랑의 불을 켜고 ‘불현듯’이 ‘가랑잎’을 앞세우고 ‘그대’가 오시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시어들은 튕겨나며 진행되지만 가곡의 음감은 거꾸로 그것들을 조절하며, 서서히 가라앉히며(때로는 급상승 시키며) 서로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산불이 일어날 때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서는 맞불을 놓아야 한다. 그야말로 이(齒)는 이(齒)로 맞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산에서 불이 일어났을 때 마을에 불이 번져오지 못하게 할려면 마을 주위의 삼림(森林)을, 즉 타야 할 것들을 미리 다 태워서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주위가 불꽃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식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산불이 마을에 번져오지 못한다.

그런데 이 시의 작자는 ‘가랑잎을 앞세워 오시는 그대’를 향하여 ‘촛불을 켜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촛불마저 켤 수 없을 만큼 사랑이 식어져 있으면 사랑의 불이 당겨오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내 마음의 촛불’에 가까이 오는 ‘그대’의 불이 사랑의 불꽃의 촉매 역할을 하는 ‘가랑잎’을 앞세우고 오게 되면, 오시기만 하면, 둘 사이에서 불꽃 튀며 사랑의 경락(經絡)은 연결되어 우리의 영원한 시간을 싸고도는 음표들의 반란은 우리의 존재의 불꽃에 영원하고 달콤한 생명수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짧은 시어가 사랑의 강렬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드러나는 기쁨과 환희의 박자 속에서 가곡의 신경조직을 형성하는 그리움의 톱니바퀴로 맞물리는 사랑의 코드가 맞기만 하면, 실행되기만 하면,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불꽃이 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송문헌의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가 촛농이 녹는 뜨거움으로 우리의 마음의 혈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합니다 ”

그래서 내 마음 속에 타고 있는 촛불의 촛농이 뜨거움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은 송문헌의 시에서 살펴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않았고 ‘내 가슴의 그대는 떠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그대’는 눈물처럼 내 가슴에 와 촛농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모하는 그대’는 불현듯이 언제부턴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또한 다음의 시어에서도 밝혀진다.

“아 아 그대여 사모하는 그대여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

이곳의 시어 “별빛을 앞세우고 불현듯 오시렵니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동일한 위치에서 시어가 1연의 ‘가랑잎’ 대신 2연에는 ‘별빛’으로 치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별빛’의 소재도 ‘가랑잎’이란 소재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별빛은 머나먼 우주 밖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그 별빛은 이미 그 별에서는 떠나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이미 그 별빛은 별빛이 아니라는 억지 같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 별빛이 이미 별빛이 아닌 것은 ‘가랑잎’이 타버리면 가랑잎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별빛이 지구에 도달하자마자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이치와 같다.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에서 송문헌 시인의 다른 시 <검은 바다>에서 보여지는 시어들 “사라짐과 생겨남의 경계를 지우고 / 생과 死의 모든 차별을 다시 지우고 / 타오르던 불꽃 사그라지면 그는 / 어둠 속에 혼자가 된다 / 혼자 속에 어둠이 된다”를 떠올리게 한다. 송문헌 시인은 ‘생과 死의 모든 차별을 다시 지우’듯이 그리움과 사랑의 차이를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촛불이 타는 것으로, 혹은 가랑잎이 타는 것으로, 혹은 별빛이 소멸하는 현상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사랑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그의 시 <검은 바다>에서 “어둠 속에 혼자가 된다 / 혼자 속에 어둠이 된다”에서 보여 지듯이 ‘이 한밤’은 <검은 바다>이고 이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되는 충만함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둘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은 혼자라는 자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혼자라는 것이 ‘어둠 속의 혼자’인 것이다. 그리고 ‘혼자 속의 어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혼자이면서 어둠과 동격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어둠’의 속성은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둠 속에는 모든 것이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도 그리움의 그 실체도 어둠 속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손만 뻗으면 바로 그 위치에 실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전체 속의 한 원소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전체 속에서 분리되어 우주의 미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혼자 속의 어둠’이기 때문에 그는 혼자이면서 우주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스런 사랑의 실체로 말미암아 그는 자연이 되고 그 자연은 “이 한밤에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이”할꺼냐며 그리움에 못박힌 오선지를 뜯으며 싱싱한 음표들에게 채찍질 하고 있는 것이다.

송문헌의 시와 박이제의 곡이 붙여진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는 깊고 오묘해서 딱히 어떻다고 단정하긴 섣부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감회를 돌이켜본다면 이 가곡은 그리움이란 실체를 끌어당기며 사랑의 불꽃으로 활활 타기 위해서 촛불, 가랑잎, 별빛을 가져와 오선지 위에 올려놓고 사모의 애정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 현대적 정서의 금 가고 고정화된 존재상실의 판넬에 한민족의 화려한 한복처럼 고즈넉하고 충만한 여유로움을 가미한 전통적 음악의 미학으로서, 사랑하는 님에 대한 연민의 뼈다귀로 절규하는 음표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보도자료 통신사 뉴스와이어(www.newswire.co.kr) 배포
보도자료 출처:도서출판 시사랑 
정우동 2006.08.10 07:23  
  한국가곡작사가협회회장 송문헌 시백의 <내 가슴의 그대여>가
박이제 교수님의 곡을 얻어 시사랑 순수가곡문학상을 수상한데
대하여 두분 예술가께 축하와 함께 경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괴테는 예술가에게는 군더더기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고 오직
작품을 써낸 그 이름만 쓸것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견해가 포스트나
광고에서 씨 님 같은 존칭어를 생략하는 예술계의 전통으로 굳어
지게 되었답니다.

송문헌
박이제 두분의 이름이 온누리에 길이 빛나기를 빌고 빕니다.
.
규방아씨(민수욱) 2006.08.10 08:07  
  시인 창작 가곡 '내 가슴의 그대여' 선정 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소연 2006.08.10 08:26  
  이런 좋은 일도 있군요. 가곡작사가협회 회원으로 같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메말라가는 정서에 맑은 물줄기 같은 가곡이 많은 사랑을 받는 그날까지
서들비 2006.08.10 11:07  
  송문헌님의 시는 언제나 우리 속에 잠자고있던
사랑과 추억을 일깨웁니다.
메말라가는 마음에 단비처럼
물을 줍니다.
축하드립니다. 
해야로비 2006.08.10 13:24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들으면....우리 모두의 어깨가 으쓱~~올라가짐은
우리 모두 한가족이기에 그렇겠지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문학향기 2006.08.10 13:48  
  시와 음악의 조화로운 만남! 그 만남도 만남이지만, 박인과 평론가의 작품평이야말로 참으로 일품입니다. 시와 곡의 진정한 어울림을 인식 할 수 있게 해 줄 뿐더러, 가히 논리를 뛰어 넘는 논리 수준의 특출한 해설! 참으로 독특하고 개성 있는 논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론의 진수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장미숙 2006.08.10 13:49  
  기쁜 소식을 전해주신 안재동선생님 감사합니다.
회장님!
순수 가곡문학상..
무더위를 식혀주는 기쁜 소식에 한아름 축하를 드립니다~
안재동 2006.08.10 20:21  
  정우동 선생님, 이소연 시인님, 장미숙 시인님, 민수욱님, 서들비님, 해야로비님, 안녕하십니까. 들러 주시고 좋은 말씀들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정우동 선생님께서 자상하시게도 안내를 잘 해 주셨네요.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솔바람 2006.08.11 00:11  
  겸연쩍지만 정우동 사무국장님, 규방아씨님, 이소연님, 서들비님, 해야로비님, 문학향기님, 장미숙님, 모두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식을 올려주신 안재동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아직 저도 어떤 성격의 상인지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통보만 받았을 뿐이랍니다. 오늘 통영에 볼 일이 있어 식전에 내려갔다 지금 막 들어와 인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내마음의 노래 가족 여러분의 우정어린 따뜻한 축하의 말씀들 가슴에 오래오래 간직하겠습니다. 막바지 여름 잘 들 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송문헌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