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幼年의 추석을 그리워 하며

노을 6 774
어른들의 추석은 치루어야 할 숙제 같다.
추석을 앞둔 오늘같이 청명한 날, 그 골치 아픈 숙제는 한쪽으로 밀어놓고
어린 시절의 설렘을 추억 속에서 꺼내보고 싶다.

'팔월이라 한가위 달이 밝으면
손을 꼽아 기다린 한가윕니다
풋대추에 햇밤에 하얀 송편을 소복소복 빚는
한가윕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학교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면 그때 느끼던 추석에 대한 즐거운 기대와 설렘이 어렴풋이 살아난다.

엄마는 갑사로 한복을 지어 주시고 그 한복에 금박을 물리는 일은 아버지 담당이었다.
다락방엔 금박 드리는 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무늬 모양의 틀이 있어서 다락에 올라가서 놀 때마다 노란 금물로 새 옷에 금박물리는 것을 보고 싶어 어서 명절이 오기를 고대하곤 했다.
 
저고리의 붉은 끝동과 깃, 고름 그리고 치맛단에 금박을 물린 다음
추석날 새벽쯤 마당 빨랫줄에 널어 이슬을 맞게 해서 곱게 다려 입을 때의
그 기분은 정말이지 날아갈 듯 했었다.
며칠 전부터 음식 장만에 들어간 엄마는 도대체 잠도 안 주무시는 것 같다.
자면서도 졸립기만 한 어린 시절
자다 문득 깨보면 엄마는 여전히 찬방을 들락거리고 계시고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부치는 전의 양은 한도 끝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자면서도 졸리운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다.
추석날 아침 차례를 치르고 나면 몇날 며칠 장만한 음식들을
버들고리에 잘 담아서 아버지를 따라 모두 성묘 길에 나선다.
우리를 모두 보내고 설겆이를 마치면 그제야 엄마는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동네 뒤쪽으로 빠져나가 산길을 돌아 들판을 지나 밭고랑도 몇 번이나 거쳐
저수지 둑길로 오르며 가는 성묘 길은 어린 걸음에 멀고도 멀었다.
길은 언제나 바람이 세차서 저수지를 지날 때는 수면 위에 자잘하게 곤두선
물살을 보며 금방이라도 물에 빠질 것 같아 무서웠던 기억도 난다.
콩밭과 옥수수 밭을 지날 때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콩 다발도 따고 옥수수도
툭 한 개씩 꺾으며 간다. 가는 길은 바빠서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채근을 하셨다.
"빨리 가자, 늦는다"
멀리 묘지가 보이면 묘지기가 부지런히 마중을 나오곤 했다.
묘지 입구에 이름 없는 어린 애장이 먼저 보인다. 아이들의 무덤은
늘 그렇게 길가에 두는 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꼭 그 무덤 앞에 엄숙한 심정으로 과일을 하나씩 놓고 갔다.
어른들 따라 누렇게 시든 잔디 아래 잠들어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저 절을 할 뿐, 딱히 그분들 생각은 나지 않지만 성묘를 마치고
음복을 하는 일 만큼은 신나고 즐거웠다.
서늘한 바람 속에 쌉쌀한 가을 풀 냄새를 맡으며 준비해 간 음식을 먹으면
집에서 먹을 때와 달리 더 맛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왜 엄마는 음식장만만 잔뜩 해주고 같이 안 오는지 궁금했었다.
 하긴 제사를 지낼 때도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여자들은 일만 죽어라 하고 했었다. 옛날엔 다 그랬다.
돌아오는 길에도 바람은 쉬임 없이 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더뎠다.
장난도 치고 콩서리도 하고 들꽃도 꺾으며 한눈을 팔아도 아버지는 나무라지 않으셨다.
추석이면 생각나는 성묘 길의 추억은 늘 바람으로 비롯된다.
천지에 곡식 익어 가는 냄새 가득한 들길을 옷자락을 펄럭이며 아버지 뒤를 따라
졸망졸망 걷던 기억은 빛 바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른이 된 뒤, 추석은 그저 걱정이 앞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얼마나 아름다운 명절인가?
추억이라도 떠올려 할 수 있다면 추석을 추석답게 보내고 싶어진다.
아, 그 바람 가득한 들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눈감으면 그 하늘, 그 들길, 그 냄새, 그 바람이 내게로 온다.
현실이 어떻든 유년의 추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이 있어
나의 추석은 남모르게 풍성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데 모두의 추석이 무엇으로든 풍성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6 Comments
산처녀 2005.09.14 13:39  
  행복한 유년 시절을 실감나게 그려 놓으셨네요 .
저희는 고향이 멀어서 (경기도)추석 성묘는 못가보고 추석이나 설이면 엄마가 해주시는 빔 때문에 전날 저녁은 잠이 안오고 ...
아침이면 내어 주시는 고은 옷을 입을때의 그 감격 스러운 기분 ,
지금 아이들은 풍요속에 살아서 설빔 추석빔의 맛을 알지못하는 ,풍요속의 빈곤한 아이들이라 생각 됩니다 .
그리운 추억속의 한토막 감사합니다 .
김상언 2005.09.14 14:23  
  아버지를 따라 성묘길을 다니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제는 제 아들녀석을 데리고 다니지만 지금은 멀리하늘나라 가신 아버지는 지금도 제마음속에서 여름날 평상에서 아버지와 같이 누워자면서 새벽에는 아버지 가슴속으로 들어가며 잠을자던 추억이 떠오르며  보고싶은 아버지를 그리며.....
요들 2005.09.14 19:52  
  노을님과 유랑인님이 참 부럽습니다.
한잎 한잎 추억을 꺼내심에...
요즘 서쪽 하늘에 노을님이 다 차지하고 계시는것  혹?  아시나요?
노을 2005.09.15 13:41  
  산처녀님 추석준비 바쁘시지요? 도시와 달리 더 명절다울 것 같아요.
맛있는 음식 많이 준비하시면 어떻게 저도 좀 목을 빼볼까요? ㅎㅎㅎ
즐거운 추석 지내시기 바랍니다.

김상언님
맞아요 아버지 뒤를 따라가던 성묘길, 유년의 추억 중 정말 잊지 못하지요. 그리움으로만 존재하게 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추석이면 더욱 생각납니다.

요들님, 바쁜 일은 끝나셨어요? 추억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색깔이 입혀져 아름다운 법이지요.  저처럼 나이가 들면 그 정도가 더 심해져 탈이랍니다. 요들님도 노을빛 물들 때쯤 되면 알게 되리라... 추석 잘 보내세요 
靜 軒 2005.09.16 06:23  
  안녕하세요?  노을님. 적으신 글 몇 번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감탄이 새로왔습니다.  우선은 금물입히는 얘기가 금시초문이라 신기했어요.^^ 더욱이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다니 필시 화목한 가정이었음에 분명하여 또 감탄했어요. ^^  그리고 하나는 글을 정말 잘 쓰신다는 것, 아니 어릴적부터 감성이 풍부하셨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경험을 적으시는데도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게 그리셨어요. ^^  전요  감정이 그다지 풍부하거나 섬세하질 못해요.  그냥  용감하기만 하지요. ^^ 그래서보면 상황설명 또 사실 그대로의 보고일 뿐 별반 아름답게 그리질 못해요.  앞으로 노을님의 글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싶군요.  즐거운 추억 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노을 2005.09.16 13:01  
  정헌님,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거래처와 약간의 문제가 생겨 마음이 좀 상했는데 과찬이지만 이렇게 칭찬을 들으니 숨이 골라지네요.
정헌님이야말고 정갈하고 절제있는 문장력으로 진솔한 감동 전해주시는 탁월한 솜씨 지니셨던데요 뭘.
화목한 가정?? 그렇지요 어려선 그랬어요. 행복이란 일순간에 잃기도 쉬운 허상같다는 체험 이후 저는 잘 갖추어진 모양새로 인한 행복 보다도 나름대로 만든 저만의 행복을 찾으며 살고 있답니다.
종종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즐거운 추석 보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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