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근조림과 우리 선생님
여러분은 연근조림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제가 이사를 와 몇 해 전부터 살고 있는 경기도 시흥시는 주 특산물이 포도이긴 하지만 지난 해 부터 대규모의 연꽃단지를 조성하여 여름내내 잎과 꽃을 보게 하고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기까지는 연근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연꽃단지가 바로 저의 집 가까이의 넓은 들녘 한켠에 있어 저도 자주 나가 산책을 하며 꽃구경도 하고 지난 해에는 연근을 사서 강판에 갈아 감자전처럼 부침개도 해 먹고 죽도 쑤어 먹고 또 연근조림도 해 먹었습니다. 유통기간을 거치지 않고 밭에서 바로 사와서 조리를 하니 연근에 수분이 많고 맛도 한결 더 있더군요.
연근조림....
지금도 물론 잘 먹지만 적어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지금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잠시 그 때로 초대합니다.^^
어른이 되어 얘기해 보니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 당시는 보릿고개라 하여 세상이 온통 가난했었다 하더군요.
저는 뭐 어려서 넓은 세상일을 몰랐지만요.
하지만 게 중에도 유독 어려운 저의 집안이었는지라 저는 점심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실은....학창시절 전체에 걸쳐 한 해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에는 점심을 거의 먹어보질 못했습니
다.^^ 그래서 저와 같은 아이들이 없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에 학교 급식이 이루어진 일을 저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답니다.^^
6학년 저의 담임선생님께서는 학년 초의 며칠이 지나자 저의 상황을 파악하셨나 봅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선생님 곁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시락 가방을 꺼내시는데 거기에는 밥이 담긴 도시락이 두 개 있었습니다. 반찬은 한 통에 있고.
선생님께서는 도시락 하나를 제게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 !!!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날도....
선생님께서는 늘 제 것까지 도시락을 두 개 준비해 오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6학년 한 해 동안 내내 선생님의 탁자에서 선생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때때로 선생님께서 타 학교로 연구수업을 가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때도 다른 사
람 편에 도시락을 보내 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딱 한번 도시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저희 반 친구들은 도시락 뚜껑에 밥과 반찬을 모아 제게 주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저를 대
하시는 방식대로 제게 친절을 나타내는 반 친구들의 태도에 사뭇 감동하며 기쁜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더랬습니다. ^^
어느 날인지 선생님께서는 반찬으로 연근조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달고 아삭한 게 참 맛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가 다른 반찬보다 더 잘 먹는 것을 선생님이 아셨나 봅니다. 그 이후로는 연근조림을 아주 ! 자주! 싸오셨으니까요.
................ !!!
그러나 그 때, 말없고 수줍기만 했던 저는 선생님의 그 하늘과 같은 은혜를 마음에만 차곡차곡 쌓아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저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있었을 때는 저는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때란 수업시간 중 선생님께서 잠시 휴식하시고 싶어 하실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때마다 제게 노래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언제나 마음에 가득한 고마움을 노래에 담아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바로 <고마우신 선생님> 이라는 노래로.
여러분 믿어주시겠지요?^^
여러 번의 노래할 기회에, 제가 이 노래 외에는 결코 다른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요.^^
지금도 어느 날의 일은 더욱 기억이 생생하답니다.
초여름, 저희는 모두 의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 학교 담장 안에 선 커다란 나무아래에 앚아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 날도 선생님께서는 제게 노래를 하도록 시키셨습니다. 물론 저는 <고마우신 선생님>을 불렀지요.^^ 그렇지만 그 날은 제 노래를 들으시는 선생님의 얼굴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눈을 지긋이 감으시고 노래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느 때 노래를 시켜도 <고마우신 선생님> 그 한 곡 밖에는 부르지 않는 저를, 그 노래에 저의 마음을 담아 부르고 있음을 다 아시는 듯, 흐믓해 하시는 표정이셨습니다.
그 외에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선생님의 기억들...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받아야 하는 방과 후 과외도 받지 못하고 입시책도 전과도 수련장 한 권조
차 없는 제가 수련장도 있고 전과도 있고 입시책도 있고 과외도 받는 친구들 못지않게 공부할 것
을 바라셨던 선생님.
그래서 시험을 치른 후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자주 볼 수 있었던, 제 작은 의자에 앉으셔서 제 시험지
를 유심히 검사하시던 풍채 좋은신 선생님의 뒷모습.
마을에 돈 장티푸스에 가볍게 감염되어 그 중요한 시기에 1개월 이상을 학교에 가지 못하였을 때
도 두터운 시험지 뭉치를 들고 집에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 주셨던 선생님.
사회시간, 법정장면을 드라마로 연출할 때 검사에 다른 친구 변호사엔 선생님 그리고 판사자리
에는 저를 앉혀 주시고,
국어시간, 교과서에 나온 찰스 디킨스의 소설 대본에 따라 연극을 할 때도 스크르지 영감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시므로 수줍고 활기없는 얼굴에 생기와 웃음을 찾게 해 주시고 싶어하셨던...
선생님 우리 선생님!
선생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 크신 은혜가 가슴에 휘돌고 사무쳐 옵니다.
이렇듯 제게 어머니 이상의 사랑을 주셨던 선생님께서는 3년 전에 돌아가셨고 부음을 받은 그 날 저는 은혜에 조금치의 보답도 하지 못한 회한에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습니다.
................ !!!
허름하고 남루한 사람 또한 삶이다 보니 삶의 곳곳에서 몇 분들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여 저는 은혜라는 말과 그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살아오며 제가 느낀 것은 은혜란 결코 받은만큼 갚을 수 없다 그것도 은혜를 베푸신 분에
게 고스란히 되갚는다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환경의
제약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깨달음과 인식의 차이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즉 은혜를 액수로 따진다면야 그것은 당연히 갚을 수 있는 성질이겠지만 그러나 은혜에
는 물질 이전에 베푼 분의 정신이 함께 한 것이고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신 분이 앞서 보이셨던 넓
은 인간애나 동정심, 후대를 나타내신 정신과 또 은혜를 베푸셨던 그 세월은, 결코 소급해서 도달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의 은혜나 스승의 은혜같은 도무지 크고 깊고 넓은 은혜 앞에서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며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살아생전 그저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그것을 드릴 밖에는 없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갚을 수 없기에 갚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그분들의 은혜는 더더욱 값지고 빛나는 것인지도 모
르겠습니다.
이제, 며칠 전 부터 동네의 연근밭에서는 막 첫물 연근을 캐서 팔기 시작했더군요.
저도 조만간에 사다가 반찬을 해 먹을테지요.
그러면 다시 그 옛날 우리 선생님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또 그 때 불렀던 노래도 다시 불러 볼 거구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환경은 아니시라 하더라도 마음에 고맙게 자리잡은 선생님을 생각하시면서 저랑 같이 불러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아...?
네...!^^
연근조림을 드시면 더 좋구요.^^
<고마우신 선생님>
이소정 요 한용희 곡
지난해도 올해도 온갖 힘 다해서
아는 것이 힘이라 배워야 산다고
깨쳐주고 타일러 애써 가르치는
고마우신 선생님 우리 선생님
세상은 넓다해도 할 일은 단 하나
가르치고 배우는 오직 그 일에만
살아 평생 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고마우신 선생님 우리 선생님
저는 좋아합니다.^^
제가 이사를 와 몇 해 전부터 살고 있는 경기도 시흥시는 주 특산물이 포도이긴 하지만 지난 해 부터 대규모의 연꽃단지를 조성하여 여름내내 잎과 꽃을 보게 하고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기까지는 연근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연꽃단지가 바로 저의 집 가까이의 넓은 들녘 한켠에 있어 저도 자주 나가 산책을 하며 꽃구경도 하고 지난 해에는 연근을 사서 강판에 갈아 감자전처럼 부침개도 해 먹고 죽도 쑤어 먹고 또 연근조림도 해 먹었습니다. 유통기간을 거치지 않고 밭에서 바로 사와서 조리를 하니 연근에 수분이 많고 맛도 한결 더 있더군요.
연근조림....
지금도 물론 잘 먹지만 적어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지금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잠시 그 때로 초대합니다.^^
어른이 되어 얘기해 보니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 당시는 보릿고개라 하여 세상이 온통 가난했었다 하더군요.
저는 뭐 어려서 넓은 세상일을 몰랐지만요.
하지만 게 중에도 유독 어려운 저의 집안이었는지라 저는 점심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실은....학창시절 전체에 걸쳐 한 해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에는 점심을 거의 먹어보질 못했습니
다.^^ 그래서 저와 같은 아이들이 없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에 학교 급식이 이루어진 일을 저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답니다.^^
6학년 저의 담임선생님께서는 학년 초의 며칠이 지나자 저의 상황을 파악하셨나 봅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선생님 곁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시락 가방을 꺼내시는데 거기에는 밥이 담긴 도시락이 두 개 있었습니다. 반찬은 한 통에 있고.
선생님께서는 도시락 하나를 제게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 !!!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날도....
선생님께서는 늘 제 것까지 도시락을 두 개 준비해 오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6학년 한 해 동안 내내 선생님의 탁자에서 선생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때때로 선생님께서 타 학교로 연구수업을 가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때도 다른 사
람 편에 도시락을 보내 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딱 한번 도시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저희 반 친구들은 도시락 뚜껑에 밥과 반찬을 모아 제게 주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저를 대
하시는 방식대로 제게 친절을 나타내는 반 친구들의 태도에 사뭇 감동하며 기쁜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더랬습니다. ^^
어느 날인지 선생님께서는 반찬으로 연근조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달고 아삭한 게 참 맛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가 다른 반찬보다 더 잘 먹는 것을 선생님이 아셨나 봅니다. 그 이후로는 연근조림을 아주 ! 자주! 싸오셨으니까요.
................ !!!
그러나 그 때, 말없고 수줍기만 했던 저는 선생님의 그 하늘과 같은 은혜를 마음에만 차곡차곡 쌓아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저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있었을 때는 저는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때란 수업시간 중 선생님께서 잠시 휴식하시고 싶어 하실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때마다 제게 노래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언제나 마음에 가득한 고마움을 노래에 담아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바로 <고마우신 선생님> 이라는 노래로.
여러분 믿어주시겠지요?^^
여러 번의 노래할 기회에, 제가 이 노래 외에는 결코 다른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요.^^
지금도 어느 날의 일은 더욱 기억이 생생하답니다.
초여름, 저희는 모두 의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 학교 담장 안에 선 커다란 나무아래에 앚아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 날도 선생님께서는 제게 노래를 하도록 시키셨습니다. 물론 저는 <고마우신 선생님>을 불렀지요.^^ 그렇지만 그 날은 제 노래를 들으시는 선생님의 얼굴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눈을 지긋이 감으시고 노래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느 때 노래를 시켜도 <고마우신 선생님> 그 한 곡 밖에는 부르지 않는 저를, 그 노래에 저의 마음을 담아 부르고 있음을 다 아시는 듯, 흐믓해 하시는 표정이셨습니다.
그 외에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선생님의 기억들...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받아야 하는 방과 후 과외도 받지 못하고 입시책도 전과도 수련장 한 권조
차 없는 제가 수련장도 있고 전과도 있고 입시책도 있고 과외도 받는 친구들 못지않게 공부할 것
을 바라셨던 선생님.
그래서 시험을 치른 후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자주 볼 수 있었던, 제 작은 의자에 앉으셔서 제 시험지
를 유심히 검사하시던 풍채 좋은신 선생님의 뒷모습.
마을에 돈 장티푸스에 가볍게 감염되어 그 중요한 시기에 1개월 이상을 학교에 가지 못하였을 때
도 두터운 시험지 뭉치를 들고 집에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 주셨던 선생님.
사회시간, 법정장면을 드라마로 연출할 때 검사에 다른 친구 변호사엔 선생님 그리고 판사자리
에는 저를 앉혀 주시고,
국어시간, 교과서에 나온 찰스 디킨스의 소설 대본에 따라 연극을 할 때도 스크르지 영감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시므로 수줍고 활기없는 얼굴에 생기와 웃음을 찾게 해 주시고 싶어하셨던...
선생님 우리 선생님!
선생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 크신 은혜가 가슴에 휘돌고 사무쳐 옵니다.
이렇듯 제게 어머니 이상의 사랑을 주셨던 선생님께서는 3년 전에 돌아가셨고 부음을 받은 그 날 저는 은혜에 조금치의 보답도 하지 못한 회한에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습니다.
................ !!!
허름하고 남루한 사람 또한 삶이다 보니 삶의 곳곳에서 몇 분들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여 저는 은혜라는 말과 그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살아오며 제가 느낀 것은 은혜란 결코 받은만큼 갚을 수 없다 그것도 은혜를 베푸신 분에
게 고스란히 되갚는다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환경의
제약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깨달음과 인식의 차이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즉 은혜를 액수로 따진다면야 그것은 당연히 갚을 수 있는 성질이겠지만 그러나 은혜에
는 물질 이전에 베푼 분의 정신이 함께 한 것이고 그러므로 은혜를 베푸신 분이 앞서 보이셨던 넓
은 인간애나 동정심, 후대를 나타내신 정신과 또 은혜를 베푸셨던 그 세월은, 결코 소급해서 도달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의 은혜나 스승의 은혜같은 도무지 크고 깊고 넓은 은혜 앞에서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며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살아생전 그저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그것을 드릴 밖에는 없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갚을 수 없기에 갚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그분들의 은혜는 더더욱 값지고 빛나는 것인지도 모
르겠습니다.
이제, 며칠 전 부터 동네의 연근밭에서는 막 첫물 연근을 캐서 팔기 시작했더군요.
저도 조만간에 사다가 반찬을 해 먹을테지요.
그러면 다시 그 옛날 우리 선생님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또 그 때 불렀던 노래도 다시 불러 볼 거구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환경은 아니시라 하더라도 마음에 고맙게 자리잡은 선생님을 생각하시면서 저랑 같이 불러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아...?
네...!^^
연근조림을 드시면 더 좋구요.^^
<고마우신 선생님>
이소정 요 한용희 곡
지난해도 올해도 온갖 힘 다해서
아는 것이 힘이라 배워야 산다고
깨쳐주고 타일러 애써 가르치는
고마우신 선생님 우리 선생님
세상은 넓다해도 할 일은 단 하나
가르치고 배우는 오직 그 일에만
살아 평생 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고마우신 선생님 우리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