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보내고...
무대 위 조명이 밝아서 객석이 안 보이는 게 그 중에도 안심이 되었지만 청중 앞에 서서 노래를 하는 일은 정말이지 못할 일이다 싶었다.
떨리는 가슴 눌러가며 그저 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찌어찌 노래를 마치고 휴, 내심 한숨을 쉬며 허리 굽혀 인사하는데 뜻밖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와서 얼떨떨하다 못해 민망하기 그지없다.
잘 하지는 못했어도 나이 든 여인 셋이 목소리 모으느라 애쓴 데 대한 격려이리라.
그렇게 해서 나는 드디어 ‘그날’을 떠나보냈다.
따지고 보면 ‘그날’은 작년 봄엔가? 나를 찾아왔다.
어느 날 받아든 등기우편물의 대봉투에는 마산 어느 병원의 주소가 발신지로 되어 있었다.
공연히 깜짝 놀랐다. 건강검진 한 적도 없으면서 황당하게도 건강에 무슨 결격사유가 있는가 싶은 걱정이 순간 스쳐갔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앞뒤 안 맞는 생각을 얼른 수습하고 자세히 보니 귀에
익은 이름 석 자가 보였다. 김경선 원장님. 이번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웬일인가 싶어 급히 봉투를 열었더니 검은 잉크색도 선명한 정갈한 악보가 작은 클립에 끼워져 들어 있었다. ‘그날’의 악보였다.
내가 중창을 좋아한다고 어디엔가 올렸었는가보다. 그것을 기억하고 보내주신 김경선 원장님의 마음씨가 봄바람처럼 내 마음을 달뜨게 했지만 같이 부를 사람이 없구나 싶어 아쉬워졌다. 혼자 어줍지 않은 讀譜力으로 흥얼거려보다 넣어두었다.
송월당님은 참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분이다. 내마노에 모시고 오자마자 특유의 열정으로 참여의식이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시며 즐거워하셔서 속으로 기뻤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무대까지 진출하자고 나를 꼬드기실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그 꼬드김의 원천은 김형준님이라고 한다. 송월당님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청을 하면서 혼자 어려우시면 노을이를 대동하라고까지 주문을 하신 모양이었다. (버팀목이 되기에는 너무 미약한 노을이 대략난감!!)
그렇게 해서 우리 트리오가 급조 결성이 되었는데 무슨 곡을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화음을 넣자는 주장을 강력히 했기 때문에 선곡의 책임이 내게로 돌아왔고 문득 묵혀 둔 ‘그날’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악보를 끄집어내어 허밍으로 불러보니 급하면 통한다고 처음에 어렵게 느껴졌던 곡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였다. 게다가 전주나 반주가 우리 같은 초보자도 따라하기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악보를 복사해서 그런저런 설명을 곁들여 송월당님에게 부치고 컴에 들어가서 ‘그날’을 클릭하여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각자 연습하고 맞춰보자고 했더니 송월당님의 철저함은 그것으로 그칠 수 없었던지 시민대학 가곡교실 선생님께 부탁을 하여 특별사사를 받기로 약속을 다 해놓으셨다.
소프라노 김영선 선생님은 참 아름답고 감성적인 분이었다. 비록 한 시간에 걸친 짧은 배움이었지만
발성과 화음의 ABC는 조금이나마 체득이 되었다.(그분의 호소력 짙고 감성적이며 윤기 있는 음색에
나는 그만 반해 버렸다. 언제 한 번 우리 내마노 가곡교실에 모시고 싶다는 생각...)
꽃과 나무가 예술의 향기와 어우러진 그분의 운치 있고 오래된 집에서 사진도 한 장씩 박고 돌아오면서 조금 할만 하다 생각했지만 송월당님, 유열자님은 아니었다. 못말리는 저 열정...
할 수 없이 우리 교회 집사님의 따님을 하나 불러내어 반주를 부탁하고 또 한 시간 땀 뻘뻘 흘리며 열창... 나중에 그 젊디젊은 따님이 무척 재미있어 했다는 후문.
그것도 모자라 당일에 일찍 만나 연습하기로 했는데 그날의 그 시간은 영 연습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나는 포기하고 싶었지만 두 형님들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건물 외곽으로 난 베란다로 나가 조그맣게 맞춰보고 돌아오는데 이런, 출입문이 그 새 잠겨버렸다. 꼼짝없이 본관 밖으로 내몰린 형상이었으나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우리는 구출되었다. 그렇게 연습해놓고 무대에 올라가지도 못할 뻔 했다.
이렇게 장황히 그간의 일을 써놓고 보니 그렇게 준비를 하고도 겨우 그 정도냐고 누군가 웃으실 것 같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우리는 큰일을 해낸 기분이다. 노래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들이 우리 내마노에 많은 줄로 짐작하는 마당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감히 무대에 섰으니 말이다.
무슨 일을 하던지 과정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결과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과까지 좋으면야 더 바랄 게 없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아쉽고 부족하기에 오히려 더 살아볼만 한 것 아닌가.
악보를 보내주신 김경선 원장님, 우리 노래 듣고 악보를 원하는 분이 몇 분이나 계셨다는 걸 알려드림으로 ‘그날’을 받았던 그날의 감사를 대신합니다.
떨리는 가슴 눌러가며 그저 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찌어찌 노래를 마치고 휴, 내심 한숨을 쉬며 허리 굽혀 인사하는데 뜻밖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와서 얼떨떨하다 못해 민망하기 그지없다.
잘 하지는 못했어도 나이 든 여인 셋이 목소리 모으느라 애쓴 데 대한 격려이리라.
그렇게 해서 나는 드디어 ‘그날’을 떠나보냈다.
따지고 보면 ‘그날’은 작년 봄엔가? 나를 찾아왔다.
어느 날 받아든 등기우편물의 대봉투에는 마산 어느 병원의 주소가 발신지로 되어 있었다.
공연히 깜짝 놀랐다. 건강검진 한 적도 없으면서 황당하게도 건강에 무슨 결격사유가 있는가 싶은 걱정이 순간 스쳐갔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앞뒤 안 맞는 생각을 얼른 수습하고 자세히 보니 귀에
익은 이름 석 자가 보였다. 김경선 원장님. 이번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웬일인가 싶어 급히 봉투를 열었더니 검은 잉크색도 선명한 정갈한 악보가 작은 클립에 끼워져 들어 있었다. ‘그날’의 악보였다.
내가 중창을 좋아한다고 어디엔가 올렸었는가보다. 그것을 기억하고 보내주신 김경선 원장님의 마음씨가 봄바람처럼 내 마음을 달뜨게 했지만 같이 부를 사람이 없구나 싶어 아쉬워졌다. 혼자 어줍지 않은 讀譜力으로 흥얼거려보다 넣어두었다.
송월당님은 참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분이다. 내마노에 모시고 오자마자 특유의 열정으로 참여의식이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시며 즐거워하셔서 속으로 기뻤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무대까지 진출하자고 나를 꼬드기실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그 꼬드김의 원천은 김형준님이라고 한다. 송월당님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청을 하면서 혼자 어려우시면 노을이를 대동하라고까지 주문을 하신 모양이었다. (버팀목이 되기에는 너무 미약한 노을이 대략난감!!)
그렇게 해서 우리 트리오가 급조 결성이 되었는데 무슨 곡을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화음을 넣자는 주장을 강력히 했기 때문에 선곡의 책임이 내게로 돌아왔고 문득 묵혀 둔 ‘그날’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악보를 끄집어내어 허밍으로 불러보니 급하면 통한다고 처음에 어렵게 느껴졌던 곡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였다. 게다가 전주나 반주가 우리 같은 초보자도 따라하기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악보를 복사해서 그런저런 설명을 곁들여 송월당님에게 부치고 컴에 들어가서 ‘그날’을 클릭하여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각자 연습하고 맞춰보자고 했더니 송월당님의 철저함은 그것으로 그칠 수 없었던지 시민대학 가곡교실 선생님께 부탁을 하여 특별사사를 받기로 약속을 다 해놓으셨다.
소프라노 김영선 선생님은 참 아름답고 감성적인 분이었다. 비록 한 시간에 걸친 짧은 배움이었지만
발성과 화음의 ABC는 조금이나마 체득이 되었다.(그분의 호소력 짙고 감성적이며 윤기 있는 음색에
나는 그만 반해 버렸다. 언제 한 번 우리 내마노 가곡교실에 모시고 싶다는 생각...)
꽃과 나무가 예술의 향기와 어우러진 그분의 운치 있고 오래된 집에서 사진도 한 장씩 박고 돌아오면서 조금 할만 하다 생각했지만 송월당님, 유열자님은 아니었다. 못말리는 저 열정...
할 수 없이 우리 교회 집사님의 따님을 하나 불러내어 반주를 부탁하고 또 한 시간 땀 뻘뻘 흘리며 열창... 나중에 그 젊디젊은 따님이 무척 재미있어 했다는 후문.
그것도 모자라 당일에 일찍 만나 연습하기로 했는데 그날의 그 시간은 영 연습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나는 포기하고 싶었지만 두 형님들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건물 외곽으로 난 베란다로 나가 조그맣게 맞춰보고 돌아오는데 이런, 출입문이 그 새 잠겨버렸다. 꼼짝없이 본관 밖으로 내몰린 형상이었으나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우리는 구출되었다. 그렇게 연습해놓고 무대에 올라가지도 못할 뻔 했다.
이렇게 장황히 그간의 일을 써놓고 보니 그렇게 준비를 하고도 겨우 그 정도냐고 누군가 웃으실 것 같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우리는 큰일을 해낸 기분이다. 노래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들이 우리 내마노에 많은 줄로 짐작하는 마당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감히 무대에 섰으니 말이다.
무슨 일을 하던지 과정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결과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과까지 좋으면야 더 바랄 게 없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아쉽고 부족하기에 오히려 더 살아볼만 한 것 아닌가.
악보를 보내주신 김경선 원장님, 우리 노래 듣고 악보를 원하는 분이 몇 분이나 계셨다는 걸 알려드림으로 ‘그날’을 받았던 그날의 감사를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