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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물

오경일 18 1356
얼마전 아버님의 친구분들이 충주의료원에 입원중인 아버님을 오랜만에 병문안을 하셨는데 아버님이 친구분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가슴 아파하시며 살아계실때 잘하라고,또 가끔 찾아 보겠노라고 인사 하시고 가신적이있다.
그때는 치매가 있으시지만 친구분들을 보시고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고 건강한 친구를 보시고 나는 왜 건강 관리를 못했을까 안터까와서 흘리는 눈물인줄로 생각을 했었다.

5월28일 충주의료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종월씨 보호자 되시지요?"
  "예"
  "병원에서 퇴원 명령이 내렸는데요. 몇시에 퇴원하실건가요?"
  "예? 갑자기 왠 퇴원입니까?"
  "과장님이 퇴원 하신다고 했다고 퇴원 명령을 내렸는데요."
  "저는 퇴원 한다고 한적이 없는데....."하고는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고 물어보자 퇴원 한다고
  한적은 없고 병원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지요 하셨단다.


의료수가  때문에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의료 수가가 떨어져 퇴원했다가 다시 들어 오란다 . 지금 까지 여러번 퇴원 입원을 반복해서 가족들도 모두 지쳐있다.
급히 요양 병원을 알아 보고 그쪽으로 옮기려고 하자 병원비가  얼마나 나오냐고 물어보시기에 한달에 130만원 이래요 하자. 
병원 생활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좀더 싼곳을 찾아 보자고 하신다. 그동안 여러날 동안 병간호 하시고 병원 들락날락 하시느라 자식 보다는 어머님이 힘드신것은  당연하시고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적게 주시려고 많은 배려를 해주신다.

어머님은 키가 165cm가 되신다.
지금은 큰키가 아니지만 왜정시대때는 키가 커서 창피해서 구부리고 다니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게 버릇이 되어서 지금도 약간 머리를 숙이고 다니신다.
내가 봐도 예쁘신 어머니 (유열자님을 우리 이모 닮았다고 이모라고 했는데 유열자님 보다 조금 더 예쁘시다. 아닌것 같으면 오셔서 확인하셔도 좋다).


 아버님이 의처증이 있으셔서 젊어서 부터  모진 구박에 구타에 온갖 수모를 격어 오시면서도 이혼은 안된다는 그 생각으로 또 자식을 버릴수 없다는 생각으로 참고 참고 살아 오셨다.
술만 드시고 들어 오시는 날이면 온가족이 두려움에 공포에 떨고 살았다.
이웃집으로 피난 다니고 주먹에 맞아 코피 터지고 울고 불고 살았던것이 나의 어린시절의 기억의 전부이고 따뜻한 모습의 아버지 상은 정말 찾아 볼수가 없다.
왜 그렇게 사셨을까?
지금의 우리의 생각으로는 전혀 감조차 잡을수 없는 일 일것이다.

"엄마 이혼하고 우리끼리 살아, 아버지 없어도 좋아" 하며 엄마에게 울면서 하소연 하던 기억이 한두번이 아니다.

정말 그래야 우리가 행복해 질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머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번도 실천해 본적이 없다.

어머님 자신이 당하신 고난의 세월을 생각하시면 모른체 내버려 둘것도 같은데 자신이 지고갈
십자가 인양  마냥 지고 가신다 .
가끔씩 푸념 섞인 말투로 "내가 무슨 죄가 많다고"하시지만 더 이상은 말씀을 아끼신다.
어머니 자신도 몇년전 유방암 수술을 하시고 힘드셨지만 힘차게 이겨내시고 지금도 (75세)동대문 남대문으로 밤시간에 물건을 하러 다니신다.
건강하게 사시려고 그리고 못난 자식 뒷바라지 하시려고.....
 
어느날인가 교회에서 선배 장로님 한분이 아버지 학교에 등록금을 냈다고 아버지 학교에 나가 보라고 하신다 .
등떠밀려 다닌 5주간 일정의 아버지 학교이지만 그곳에서 나도 아버지를 닮아 가고 있었구나 하고 실감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야지 되뇌이고 되뇌이며 좌우명처럼 생각하고  살았지만 어느날엔가 멀리서 본 나의 모습은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컴퓨터를 부수고 구타하고 상처를 주면서도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집에 사로 잡혀있었다.
아버지 학교의 과정을 하나하나 해나가면서 자식과 사이의 응어리진 병든 모습을 치유해 가며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둘이 부둥켜 안고 울던 일들이 그나마 조금은 나자신에게 위안이 된다.
이것도 나의 또하나의 교만이겠지만.

어쩌다 우리 가정에 흉만 보게 되었나  본론으로 돌아와서 다시 여기저기 알아 보는데 가게에서 일하시는 누님이(직원) 어디 어디 가면 가격도 싸고 친절하게 잘 돌봐 준다고 한다.
그곳에 가서 원장님을 만나 면담을 하고 문경에 있는 제일 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을 하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문경으로 가시게 되었어요" 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 어디로 가시는줄 아세요?". 묻자
발음도 정확지도 않으신분이 "문경"하고 대답을하신다.
 어머님도 옆에서 보시고 계시다 "당신 어디로 가는줄 알아?"물으시자.
또 "문경" 하시며 눈물을 보이신다.
어 우리 아버지 우시네 하며 눈물을 닦아 드리고 병실에서 나왔다.
알콜성 치매로 가족들까지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면서도 내가 어떻게 될것 이라는것은 순간 순간 느끼시는것을 확인 할수있었다.

조금후 문경 제일병원에서 응급차가 와서 아버님을 모시고 문경으로 향하고 어머님 운영하시는 가게로 오자 어머님 친구분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사정을 설명해 드리고 아버님이 우시더라고 말씀드리자  네분의 친구분들이 모두 눈물을 훔치시면서 참 안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이제는 오랜 병 수발로 눈물 마저 말라 버렸구나 생각이 들면서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가정 보다는 남을 생각 많이하셔서 우리 아버지는 이래 하면 그럴분이 아닌데 하는 반응을 보이는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 이었다.

어느날인가 우리 어머님이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 문제로 사직을 하고 서울로 떠나려고 인사차 어머님 가게에 들르신적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님 평생 다니시던 회사를 퇴직하시고
퇴직금을 넣어둔 통장과 인감 도장을 목사님께 드리며 목사님 충주떠나지 마시고 이돈으로 건물 빌려 새롭게 시작하시라고 교회를 다니시지도 않으시던 분이 목사님께 용기를 주시며 우리에게는 목사님이 잘못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냐며 목사님께 그러면 안된다고 충고도 해주시던분인데 이제는 자신의 의지도 간데 없고 남이 하자는데로 몸을 맡기시고 이제는 죽음 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

우리의 인생길 이처럼 짧은데 왜 사는 동안은 영원 할것 같은지.
아버님 살아계실때 효도하라고 하는데 병원에 누워만 계시니 어떻게 해야 하나요?
원망만 많이 했던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아버지의 흔적을 여러군데 남겨 둘께요.
나의 좋은 음성도 아버님이 주셨고 흰머리 안나는것도 모두 아버님의 선물인데 고맙습니다.
또 아버님 덕분에 세상에서도 존경 받으며 살고 있는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버지.
사랑합니다.
18 Comments
유열자 2008.06.05 17:59  
아버님덕에 좋은 음성 검은 머리
아버님 덕분에 세상에서 존경받으며 사시는 오경일님을 생각하면 감사해요

본향을 향해가는 여정이 이렇도록 많은 과정을 지나야 간다지만
전 작년까지만해도 이세상 아름다운곳에서 천국으로 이사가는것에 긍정적이였는데
이젠 좀 달라졌어요 더 머무르고 싶어요
아버님도 더 있다 오라고 하나님이 연기해주시니 감사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잃을까 안타깝지요

함께 눈물 흘린다는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가실때마다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세요
힘내세요 엄마보다 조그 덜 예뿐 이모가 있잖아요
오경일 2008.06.05 18:46  
예, 유열자이모님 고맙습니다.
아버님 생각에 글을 오려 보았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병실에 갈때마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해야지요.
요즈음은 아버지 보다도 어머님이 더 걱정됩니다 .
혹시, 아버님 때문에 갑자기 아프시지나 않을까 해서요.

그런데 본향으로 가실 생각을 너무 일찍 하셨네요.
지금 막 소풍 왔는데 기쁘게 사시다 즐거웠다고 말하시고 가셔야지요.
송월당 2008.06.05 19:50  
오경일님 아버님에 대한 글을 읽으니 가슴이 찡해오네요.
아무리 아버님이 어릴 때 원망스러웠어도 내 몸,내 영혼을 주셨으니
연로하시어 힘든 일이 아무리 닥쳐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야 어쩌겠어요?
돌아가실 때 까지 최선을 하시고 사랑을 표하세요.
오경일님 아버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오경일 2008.06.05 20:24  
송월당님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아버님의 매질에 그릇된 길로 안가고  나름대로 망나니 안되고 살아 온것 같습니다.
철부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가정에서 장남이 바로 서길 바라는 사랑의 매로 생각하며 삽니다.
산처녀 2008.06.05 22:37  
오경일님 참 뭐라고 말 할수 없이 가슴이 아픕니다
왜 우리의 어른들은 그리 하셨는지요
저의 친정아버지를 보는 듯 합니다.'
밖에서는 그럴수 없이 좋은 분이 안에서는 다른 행동을 하시고
저도  어릴때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육이오 참전 장교로 제대하시고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원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이 흐르고 저는 시간이 지남에 점점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는 자신을 깨닳았습니다
그분에게도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내면의 슬픔이 있더군요
아버지 가시고 근 10년을 아버지 그리워서 울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먼저 흐릅니다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남들의쉬운 얘기 ...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글을 보면서 느낍니다
오경일님은 소문난 효자시던데요
열무꽃 2008.06.06 06:49  
아버지 또한 아직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우리도 신의 영원한 자식이고 싶듯이...
바 위 2008.06.06 06:58  
오선생 님 울림이
모든이 가슴저며지게 합니다.
땅 짚고 먼산보며 관상 情 되다보면
아버지 어머님 할아버님 할머님 그늘안 입니다.
어디 호사한 효자가 있으리오만 !
부생의 행락중 어둔 저녁 님을 만난 시간
낸 님의 그림자 보았습니다.

눈빛에 깊음 준수함은 축복입니다.
맑은 청은 여러분에 위안주는 고독
아버지 유산 아닐까요.
효심의 내력 넘겨다 보는 마음
님 양손 꾹잡아 봅니다.
선조 님 효심의 지극함 버릇 습관이 아님처럼
님 열창 큰쥐 호소 가락따라
짐진 어깨 주물러는 주시는 同心은 도처에있습니다.
힘 부추김 앞
당신 믿고 존중합니다.

고맙습니다...
정영숙 2008.06.06 10:54  
오경일님, 뭐라 위로의 글을 쓰야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알콜성 치매를 앓았군요. 제가 알콜환자들
있는데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솔직히 술공장이 망하기를 바랍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 금주가> 를 지어 보급을 하겠습니까? 어릴때 많은 상처를 가지고 살았는데 어찌 그렇게 바로바로 성장했습니까? 어머님이 정말 훌륭하십니다. 키가커서 허리를 굽히고 살으셨다고요, 지금같으면 미스코리아 자격이 충분히 되시는데-----
오경일 2008.06.06 11:30  
산처녀님 위로에 감사드립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는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 위로해야지요.

열무꽃님 맞습니다. 아버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자리잡고 계셨습니다.
다만 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시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술 좋아하시는 분들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바위님 그동안 평안 하셨는지요. 양손 꾹 잡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몸이 아프니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온 식구들이 근심이 됩니다. 출가한 딸들도 외지에 사는 친지들도 친구들도......

정영숙님 위로 감사합니다.
어머님은 아주 강직하신분입니다. 너그러우시구요. 항상 내편을 들어 주셨지요. 내가 야단맞을 일도 어머님이 맞으시고 하지만 그만한 사랑을 아직 돌려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영숙 2008.06.06 13:24  
설령 아버지가 좀 뭐해도 어머니만 제 자리를 지키고 바르게 사시면 자식은 곧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정말로 어머님이 강직하면서 너그러우신 분이신것 같습니다. 살아계실때 후회없이 효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88세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만 효도한다 한다 마음은 먹지만 늘 상 불효합니다. 아마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할것 같습니다.
정창식 2008.06.06 13:27  
눈물이 핑도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부자지간의 사랑이군요.
인간의 생명은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하겠지만 오경일님께서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니
부모님께 불효만했던 나로서는 한없이 부끄럽기 짝이없습니다.

아버님에 건강을 되찿으시고 아드님의 멋진노래도 들으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오경일 2008.06.06 14:25  
정영숙선생님 저는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게 아니라 얹혀 삽니다.
아직도 자식을 위한 봉사로 사십니다. 나이든 아들이지만 어머님께는 아직 철부지라......

정창식님 따뜻한 아버지를 느껴 보지는 못했지만 든든한 버팀목 이셨습니다.
감사드리며 7월4일 구리공연 멋진 공연되시길 바랍니다.
이동균 2008.06.06 19:12  
2001년12월24일,
입술이 말려들어가는 어머니를 방에 눕혀두고,
도우미 아줌아가 오는 시간과 맞 교환이 되지도 않았는데
성탄자정미사성가 를 위해 옷을 줏어입고 나가려는데 아줌아가 오셨다.
엄마의 상태를 보시더니, 선생님 지금 성당에 가실 상태가 못 될텐데요,
자기 경험으로는 임종이 가까웠다는 이야기,
치매로 10년가까이 고생하시고,
형제들 모두 갈등 속에서 그렇게 가시고 이제 모든게 해결된듯 한데,
새로운 시련운 우리을 겸손하게 한다.
장남은 말이 없다.
어떤 말을 해도 누워서 나에게 돌아온다.
애꿋은 소주병만 늘어난다.
오경일 2008.06.07 10:56  
실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함께 하지 못하면서도 한마디 씩은 할수 있으니까요.
많은 고통이 묻어 있어 보입니다.
앞으로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말씀 고맙습니다.
서로에게 상처가 안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는 없겠지요.
감사합니다.
노을 2008.06.07 15:54  
수필강좌 시간에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 한 번이라도 꼭 써야 한다고....
사연은 다 달라도 육친에 대한 마음은 그만큼 복잡하고 아프게 모든 이의 가슴에
서려 있는가 봅니다.
후회 없이 잘 해드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좋은 음성, 검은 머리... 좋은 것을 물려받았다고 감사하는 그 마음이면 족하지요.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오경일 2008.06.07 19:56  
노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도 글은 못쓰지만 아버님에 대해서 써보고 싶습니다.
유난히 분재와 낚시를 좋아 하시고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유독 손재주가 좋으셔서 옛날 제가 어린시절에는 자전거 부품을 스덴(스테인레스 스틸)으로 만드셔서 자전거가 반짝 반짝 했었지요. 건드리면 소리나는 저금통도 제가 초등학생때니까 40년전에 만드시고 우편함도 그때 만드셨지요.열쇠고리 허리띠에 거는것도 스덴 철사로 동그랗게 만들고 한쪽은 길게 살짝 누르면 홈에서 걸이가 이탈해서 열쇠를 갈아끼거나 추가해서 낄수 있게 만드셔서 지금 까지도 집에 가지고 있습니다 .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디어가 꽤 좋으셨던것 같습니다.
쓰다 보니 아버님 자랑 거리도 많이 있군요.
하지만 만들때마다 연장 제대로 못가져 온다고 야단께나 맞았지요.ㅋㅋ
권혁민 2008.06.10 11:51  
위 글의 주인공 되시는 오 경일님의 부친께서 6월10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시고 소천하셨습니다.
우리가곡을 병상에 계신 아버지께 불러서 효(孝)를 직접 실천하신 오경일님께,
삼가 심심한 위로를 보내는 바입니다.
해도해도 모자랄 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자식된 도리.
아프신 아버님을 위해 녹음내내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시고 걱정을 하시던 님.
이제 더 넓고 높은 하늘위에서 당신의 노래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시며,
두 귀 활짝 여시고잘  들어실게 분명 합니다.힘내셔요.
산처녀 2008.06.13 00:00  
이제사 알았습니다
오경일님이 기어히 가슴 아프게 아버님을 보내셨군요
애극지통해 하시는 오경일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게에 들리면 그분의 효자 되심을 많이도 들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
오랜동안 치매로 계시면서 고생하신 말을 무어라 말 할수 있겠습니까
가시고 나니 아픈 일만 생각나실것 같습니다.

오경일님의 어머니는 아주 여장부이십니다
그래도 임을 보내신 외로움이 한동안 그분을 괴롭히실 것입니다
어머님을 많이 더 사랑하셔야 겠네요.

삼가 그 어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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