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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의 기억밖에 없어서

강태갑 1 1141
1.누가 이 반 쪽 짜리 본인의 기억을 마저 채워서 후세에 전하고 현실의 극악함을 승화시켜 보지 않으시렵니까?
 2. 1956, 또는 1957년 조치원 중학교 교지에 윤극영님의 동요 "반달"에 관한 의미있는 중요 자료가 실여 있었기에 그 학교를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불행이도 없어서 이구요
 3.하얀 쪽배엔 돗대도 삿대도 없읍니다. 북극성을 등대 삼기는 하지만 샛별로 등대가 되는지는 몰라도 실은 등대도 없지만 노래는 쪽배가 어디론가 정해지지 않은 곳을 가면서 무사하기를 몹시도 기원하고 있읍니다.
  쪽배를 타고 가는 사람은 아버지이고 아버지는 도둑이었읍니다. 아들(자식)은 아버지가 도둑이라는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그 사실을 혹시는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로는 그 내용을  같이 모르는  척 하면서 궁핍한 생을 살다가 아버지가 떠나는 것을 윤극영님은 당신의 마음을 함축적으로 표출시키신것이라 생각됩니다. 윤극영님 자료에 뭐 없을까요?
  자료를 본인 보다는 더 전문적인 위치에 있는분이 확보 할수 있으면 가곡 자료실에 올려 전하기도하고,pullip. ktdom.com 에 '이 노래를 쓸쓸한 노래로 잘 못 보는 사람이 있다. 어느 구절 어느 대목이 쓸쓸한가 절대로 쓸쓸한 내용이 아니다--이재철,신현득,제해만,노원호'라고 하고 있는데 아무리 승화가 되었다 하더라도 절대로 쓸쓸한 내용이 아닌것은 아니고 쓸쓸함이 곡 전체에 배어 있으면서 쓸쓸함보다는 무사기원으로 승화시킨 노래라고 해야 하고 작금의 어려운 현실에 귀중한 처방의 하나로 접목시키는 자료로 쓰여질수 있을것입니다
1 Comments
운영자 2008.07.31 02:45  
윤극영 하면 ‘반달’이요, ‘반달’하면 윤극영을 생각할 만큼 ‘반달’은 윤극영의 대명사요 분신이며 윤극영이 작곡한 동요가 상당한 양에 달하지만 ‘반달’ 만큼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온 것도 없습니다.
내마음의노래가 수집한 몇 가지 자료를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 그동안〈반달〉의 노랫말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
 
  일제치하의 우리 민족에겐 슬픈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슬픈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반달도 그 중의 하나였다. 반달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좋아했던 노래로 당시의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모습을 반달에 빗대어 담아 낸 노래이다. ‘하얀 쪽배’는 우리나라,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는 그 당시 우리나라가 처했던 어려운 형편을 말하며,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독립의 그 날까지 나아가자는 뜻이다.

대충 그동안 이런 식으로 반달을  해석해 왔다. 한글세대에게 일제시대를 산 세대들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기에 그렇게 밖에 알 수 없었음은 매우 당연한 일이고, 이보다 더 큰 이유는 교과서 때문이다. 교과서 수업지침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도록 돼 있었다.


  *<반달>을 만들게 된 진짜 동기는 무엇인가?
 
1977년에 색동회 아동문학전집 13권으로 나온 《아동문학의 이해》(저자 이재철)에 실린 내용이다. 명작 감상이라 하여 방정환 다음으로 윤극영의 반달을 소개하고 있다.

 <반달>은 색동회 동인으로서 평생을 동요 작곡에 바치신 윤극영 선생님의 최초의 동요입니다. 1924년 6월, 불과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맏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가 막혀 서쪽 하늘을 우러러보며 앉은자리에서 지으셨다는 이 추도곡은 나라를 잃어버린 우리 겨레의 가슴을 울리며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퍼졌습니다. 또 이 노래는 국경을 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포승에 묶여서 두만강을 건너는데 어린이들이 구성지게 불러주어 선생님으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였다는 동요이기도 합니다.

  ‘1978년 11월 30일에 발행된 《한국현대아동문학사》 (저자 이재철)’에는 1920년대의 문단과 작가들이라는 항목 속에서 윤극영의 반달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반달은 그가 직접 곡을 붙여 발표한 것으로써 가장 애창된 작품이었는데, 당시의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까지도 애국 애족에의 불타는 희원을 노래하는 가곡으로서 널리 불리어졌다. 그것은 반달의 내용이 망국의 원통함을 울부짖고 달래는 멜로디였기 때문이다.
 
《한국가요사》(1992년 2월 1일 현암사 발행, 박찬호 지음, 안동림 옮김)에서는 윤극영 씨와 반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1924년 9월 초순 어느날 오전, 윤극영의 시집간 큰누이가 고생 끝에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맏누님의 갑작스런 부고를 받은 윤극영은 너무나 기가 막혀 서쪽 하늘을 우러러보며 본인의 음악실<일성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무심코 쳐다본 그의 눈에 하얀 반달이 눈에 띄게 선명했다. 한낮의 하늘에 걸린 달에서 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외로운 배 한 척이 어디론가 정처 없이 흘러가는 모습을 연상하며 그러한 광경을 노래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단순한 슬픔의 노래로 그치고 싶지 않았던 윤극영은 마지막 부분을 작곡하는데에 많은 고생을 했고 난산 끝에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라는 시구를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가사가 모두 슬픔을 나타내고 있었던 데 반해 마지막 부분에서 희망을 암시하면서 노래를 마무리 한 것이다.


《한국현대아동문학사》에서는 상당히 벗어나 창작 동기를 처음부터 애국 애족에 둔 것처럼 그릇되게 기술해 놓고 있다. 미리 간행된 《아동문학의 이해》에서는 그런 대로 바르게 기술해 놓고 이보다 한 해 뒤에 간행한 《한국현대아동문학사》에서는 왜 윤색하여 기술해 놓았을까? 확신이 서지 않은 자료 조사 때문이었든지 아니면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잘못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이재철 씨는 그가 주간으로 있는 《아동문학평론》지를 통해 〈반달〉이 애국적 동요로 윤색되어 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윤극영 씨의 동요 ‘반달’은 곧잘 애국적 동요로 윤색되고 또 부녀자로 구성된 그의 추종단체인 ‘반달회’까지 조직된 정도이니 그 애국적(?) 어린이 운동의 허상과 실상이 무엇이었는지 참으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으며……


  위의 자료를 통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동요 〈반달〉의 창작이 순전히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하였음이 분명해졌고 처음부터 ‘나라와 민족’을 생각해서 창작한 애국애족의 동요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1992년에 와서야 아동문단에서 아동문학인 윤극영, 정인섭, 김영일의 친일 행각과 동요 ‘반달’의 잘못된 해석을 지적하고 나섰다(아동문학평론 1992년 봄호). 

  다음은 조정래씨의 ‘만주벌 기행(2)’이라는 기사(1990년 6월 12일자 한국일보)에서 본 윤극영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작곡가이며 아동문학가인 윤극영 씨의 집이었다. 그가 살았던 집은 없어지고 700평이었다는 집터에는 스무 채가 넘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그가 어째서 700평이나 되는 넓은 집터를 가지고 살게 되었는지는 세 번째 집을 찾아가서야 알았다. 세 번째 집도 윤극영 씨가 살았던 곳인데 그 집터는 100여 평이라고 했다. 사연인즉 광명여자고등학교의 음악선생이었던 윤극영씨는 100여 평의 집터에서 살다가 1940년에 간도협화회 회장으로 친일 운동을 시작하면서 정원이 호화로운 700여 평의 집터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협화회란 조선인을 상대로 일본 식민정책을 선전하고 고무하던 단체였다. 그 두 집은 한 예술인이 어떤 대가를 받고 역사적 배반을 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1940년에 윤극영이 다시 간도로 갔고 그 길로 ‘간도성협화회 회장’을 했으니 ‘만주국협화회’가 생긴지 3년 뒤이다.  ‘그 뒤 윤극영은 해방직후 간도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되었으나 그의 제자인 동북항일연군의 문일, 그리고 손병희 선생의 종가집 조카 되는 이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두만강을 건너 남하하여 서울에 돌아왔다고 한다.’ (1992년 봄호, 아동문학평론지 〈일제식민잔재 아동문학의 청산을 위하여〉-이재철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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