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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한 번 여는 선문(희양산)

이종균 2 4045
한 해 한 번 여는 선문 (희양산)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산문을 연다는 사실이 내 호기심을 부추긴다.
  불기2551년 부처님 오신 날에 마침 희양산(曦陽山:999m)에 가는 산악회가 있어 같이 가려했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많은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취소한다는 전갈이 왔다. 그러면 또 1년을 어떻게 기다리나하는 조바심을 참지 못해 나는 큰애를 불러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중부내륙고속국도를 시원스럽게 달려 문경 새재를 넘으니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환하게 트여 잠시 흐렸던 마음도 맑아진다.

  백두의 큰 줄기가 태백과 소백을 거쳐 문경시의 북동에서 남서로 에워싸 충북과 경북의 살피를 이루며 수많은 곁줄기를 뻗어 명산고봉을 이뤘는데, 1,000미터를 넘는 게 진산인 주흘산을 비롯하여 8좌, 900미터 급의 산이 희양산을 비롯하여 15좌, 그 외 크고 작은 산들을 합하여 모두 66좌를 「문경의 명산」에 소개하였으니 문경은 산이 많은 곳이다.

  어느새 짙어버린 녹음 덮인 산들을 두리번거리며 가은에서 913지방도로 접어드니 비좁은 도로변에 승용차가 도열하듯 서있고, 수십 명의 경찰관이 교통정리를 하노라 진땀을 흘린다.

  상괴초등학교 삼거리에 이르니 부처님이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바른 쪽 어깨와 젖가슴은 맨살로 드러낸 채 가부좌를 한 균형 잡힌 모습, 그 금빛 찬란한 몸에서 광채를 발하듯, 햇빛이 얼비치는 눈부신 암봉 하나가 북쪽에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희양산이라는 직감이 가슴에 들어온다.

  누가 왜 희양산이라 했는지 몰라도 오늘 전국에 내리는 비를 문경에서만 물리친 건 햇볕 희(曦)자 볕 양(陽)자 그 이름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예서 봉암사까지는 3.9킬로, 일반차량은 통행이 금지되고 지정된 관광버스 2대와 승합차 몇 대가 연달아 사람을 실어 나르는데도 차를 기다리는 사람, 그냥 걸어가는 사람 모두 장사진을 이루었다.

  우리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걷기 시작했다.
  디스크로 허리와 다리가 미덥지 못해 평소 단 10분도 제대로 못 걷고 아무데나 주저앉곤 하던 아내는,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에 취하여 피곤한줄 모르겠다며 왕복 10킬로를 거뜬히 걸어냈다.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사 파의 종찰(宗刹)로  헌강왕 때(879년) 지증(智證)대사가 처음 짓고, 몇 차례 손질하여 고쳐 세웠다는데 조선 현종 때(1674년) 불탄 것을 신화(信和)스님이 다시 일으켜 천년수행도량으로서의 전통을 지켜오는 이름 난 가람이다.

  나는 우선 그 크기에 놀랐다. 대웅보전 앞을 가로 막아선 좌우에 네 칸씩을 거느린 세 칸 2층의 남훈루(南薰樓), 여느 가람들의 불이문(不二門)이 미리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만큼 낮게 짓는 관례에 비추어 본다면 정말 엄청나며, 아홉 칸의 태고선원(太古禪院)을 보면서는 저절로 기가 꺾인다.

  안내를 하는 승려들이 한결같이 젊고 미남이며, 수녀들의 얼굴에 평화와 사랑이 흐르듯, 그들의 얼굴엔 안정과 자비가 배인 듯하다.
  이곳은 연중 사바와 연을 끊고 안거에 들어 참선에만 정진하는 곳이라는데 그래도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 찾아온 속인들이 반가운가 보다.

  대웅전 앞마당에 옛날 밤 행사가 있을 때 불을 밝혔다는 노주석(爐柱石) 두 기가 서있는데도 흰색 연등이 하늘을 가렸다.
  휘황찬란한 원색 등이 아닌 이 흰 등은 유연한 골짜기, 예스런 가람, 두루미처럼 고고해 보이는 승려들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앙상블이다.

  2~3일을 묵으며 돌아봐도 모자랄 천년 불심이 서린 이곳을 단 하루 문 열린 틈 한두 시간에 살펴야하는 발걸음이 바쁘기만 하다.

  나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다는 금색전(金色殿) 뜰에 서있는 삼층석탑(보물 제169호)에 카메라를 겨누었다. 이 가람의 개문과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는 탑은 문화재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상륜부가 특이해 보인다.

  신라 경명왕 때(924년) 세운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137호와 138호인 지증대사 적조탑(寂照塔)과 적조탑비는 보호 각 속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 비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비명을 짓고 혜강선사가 글씨는 썼다는데,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가 소상하게 실려 있다한다. 지증(智證)대사(824~882년)는 원래 경주 사람으로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도헌(道憲)이며, 지증은 열반 후 헌강왕이 애도하여 내린 시호이다.
 
  고운이 “위엄이 있되 사납지 않은 분”이라던 대사는 잉태 후 400일이 넘어 4월 초파일에 비로소 태어났다.
  아홉 살 때 부친을 여의고 부석사에서 중이 되었다가 모친의 병환으로 귀가하였으나 치유서원을 낸 모친이 완쾌하자 다시 중이 되었다.

  이 가람 터는 심충(沈忠)이란 자의 것이었는데 대사에게 기증하여 여기 있던 용소를 메우고 절을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봉암사 앞을 지나 서북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물줄기를 산 꾼들은 그냥 봉암사계곡이라 부르는데 이를 따라 약 1킬로쯤 올라가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하얀 암반이 기암괴석들로 둘러싸인 백운대가 나온다.

  이곳에 지방문화재인 높이 4.4 폭 4.5미터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말기에 조각된 것으로 「희양구지(曦陽舊誌)」의 백운대 미륵비명에 의천(義天)선사의 원불(願佛)이었다고 쓰여 있다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고 흑태가 끼었어도 왼손에 연꽃을 들어 사뿐히 가슴에 안고 있는 소녀 같은 앳된 얼굴이 금방 살아서 성큼성큼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바로 그 옆 바위에 고운이 섰다는 백운대(白雲臺)란 암각이 역력하다.

  이 계곡 주위로 이중삼중으로 줄을 쳐 출입금지 표지를 달고 도복의 승려들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다.
  여기서 두 시간 남짓하면 정수리까지 달려갔다 올 수 있는 거리, 충북 괴산군에서는 열린 산길을, 왜 여기서는 막고 있는 것일까?
  나는 스님에게 등산을 막는 게 혹 종교적인 이유가 있는가 물었더니 스님은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서라 답했다. 올라오는 길목 곳곳에 산림청 경찰서 봉암사 마을이장 연명의 현수막이 걸렸던데, 산림법 제 67조에 의한 산림유전자원 보호와 자연생태계 보존, 특히 봉암사 스님들의 수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등산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생태계 보존이 목적이라면 그건 산림청의 몫이 아닐까.

  1982년 6월 봉암사 스님들이 전국사찰이 관광지가 되어 훼손되는 것을 막자는 운동을 펼친 지 벌써 스물다섯 해가 된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어쩐지 「문경의 명산」에 실린 지도상에 표시된 이 너머에 있는 봉암용곡(鳳巖龍谷), 그곳에 대한 또 하나의 호기심이 내 가슴에 차오른다.

  결코 오랫동안 발길이 끊긴 것 같지 않던 반질반질한 산길이, 돌아오는 길  내내 내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2 Comments
달마 2007.05.28 07:36  
  한양산 이듯 닮은  산 무릇 반갑고녀

팔도는 명산안고  하루열흘 백년천년

오롯이 찾아 깨우시는  님 눈길이 부처요


선생님
궂은 일기 다녀 옷셨습니다.
일생 찾은 기회 노친 기분입니다 !
鳳巖龍谷
세월에
슬쩍 모른체 눈감아 달래서
소인과 찾아 들어 보시지요
또 다시 읽어 새깁니다...

고맙습니다...
단암 2007.05.29 14:59  
  - 결코 오랫동안 발길이 끊긴 것 같지 않던 반질반질한 산길이, 돌아오는 길  내내 내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생태계 보존이나, 자연보호를 말하면 사실 스님들은 할 말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주 하러 오는 길은 아무리 깊고 높은 산중이라도 아스팔트 깔아야 하고, 그 길 외에는 보호의 명분아래 막는 불합리가 종교단체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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