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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님의 숨결(마니산)

이종균 3 3720
예님의 숨결
                                (마니산)
  강화도호부 서쪽 15 리에 있는 고려산(高麗山:436m)이 진산이지만 부 남쪽 35 리에 있는 마니산(摩尼山:468m)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국조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참성단(塹城壇)이 여기 있어 겨레의 5천년 역사가 서려있을 뿐 아니라 바다와 어울린 빼어난 경관 때문이다.
  나는 오늘이 다섯 번째 방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갈 때 마다 늘 예님들의  숨결을 느끼곤 한다.

  1977년 이곳이 국민 관광지로 지정된 이래 도로교통을 비롯한 음식 숙박영업 등이 발달하여 매일같이 밀려오는 대량관광객을 다 소화해내고 있지만, 옛날에야 한적한 시골 장터였던 곳, 그곳이 향수처럼 그립기도 하다.
  어쨌든 이 산에 제단이 쌓아진 이래 고구려 백제 조선을 거치며 제례를 지내기 위해 임금을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가장 많이 오르내린 산 아니랴.

  지금이야 산 아래  광활한 주차장이 있고, 산 위까지 돌계단을 쌓아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지만 그때는 어떻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정족산(鼎足山)에 있는 삼랑성(三郞城)앞에 내렸다.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된 이 성은 단군이 부유, 부우, 부소 등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데 그 성안에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년) 아도(阿道)화상이 처음 지어 진종사(眞宗寺)라 했다는데 고려 충절왕의 원비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송나라의 대장경을 찍어와 이 절에 보관했으며, 부처님 앞에 밝히는 옥등을 시주하여 전등사라 바꾸었다 전해지는데, 전등(傳燈)이란 부처님의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법음(法音)을 전한다는 뜻이라고 주지스님은 말하고 있다.

  조선 광해군 때(1621년) 세웠다는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은 의관을 정제한 양반의 모습만큼이나 근엄해 보이는데 여기 얽힌 일화가 흥미롭다.
  옛날, 대웅전을 중수할 때 도편수가 아랫마을 주모와 사랑하여 장래를 약속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도편수가 맡겨놓은 재물을 몽탕 챙겨 달아나버렸다.
  분을 참지 못한 도편수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새겨 네 군데 추녀 밑에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게 하였다는데, 내 보기엔 그 얼굴이 험상궂은 산 도둑이며 몸매도 원숭이를 닮아 보인다.

  고려 말의 문신인 목은 이색(李穡)이 전등사에서 쓴 것으로 알려진 시에 보면 “정화궁주의 원당(願幢)을 뉘라서 고쳐 세울 것인가, 벽기(壁記)에 쌓인 먼지가 내 맘을 아프게 하네.”라 하여 충신의 마음 한 자락을 짐작케 한다.
  정화궁주는 몽고 제국대왕공주가 왕비로 들어온 뒤 별궁에 거처하여 왕과 가까이하지 못했으며, 무녀로 하여금 제국대장공주를 저주케 했다는 모함을 받아 연금되는 등 수난의 생을 살았으니 그가 불교에 정성을 다한 것을 이해할만하다.

  이색은 “나막신(蠟屐)을 신고 산에 오르니 전등사의 늙은 중이 내 행차를 인도하네.” 하였다.
  1328년에 태어나 1396년 68세에 생을 마친 그의 「참성단」이란 칠언절구가 산 위 나무현판에 쓰여 있는데 “이 몸이 몇 번이나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此至能得畿回遊)”라 했으니 이 시는 60대 전후에 쓴 것이 아닐까? 그  뒤에 또 오른 일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편 홍석모(洪錫謨)는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남긴 분이다.
  그는 대제학 홍양호의 손자이자, 이조판서 홍희준의 아들이며,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낸 한용택의 사위였으니 그만하면 귀공자 아니랴.
  그는 18세 되던 해 강화 유람 길에 나서는데 전등사에 이르니 중 수십 명이 대나무 가마(竹輿)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니 10여길 쌓아올린 우뚝한 돌무더기가 있어 물으니 “옛날 단군이 이곳에서 감응하여 태어나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으로 참성단이다(昔檀君感應於此而生 築壇而祭天名曰參星壇)”고하더라고 마니산기행에 쓰고 있는데, 여기 착오가 있는 듯하다.

  삼국유사 왕검조선을 보면, 웅이 태백산 신단수 부근에 내려와 신시라 하고 환웅천왕이 되었는데 웅녀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고 단군왕검이라 했다 하였으니 단군이 태어난 곳은 분명 태백산이다.
  다만 13세기 초, 몽고가 자주 침입하므로 고려는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항쟁하면서 마니산 정수리의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강화도 역사산책(김경준)」의 견해이다.

  나는 이 산 진달래능선 남쪽 기슭에 조선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정수사를 중수하고 수도하였다는 계곡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갈수기라서 수량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맑은 물이 흐르는 깊숙한 계곡,  「涵虛洞天」이란 대사의 전서체 암각에도 유현함이 서려있다.
  입하가 꼭 1주일 남았는데 헐벗은 산을 덮어가는 싱그러운 신록, 바닷바람의 감촉이 아직은 서늘한데도 등줄기에 배는 땀과 얼굴에 와 닿는 햇볕의 따가움은 분명 여름이다.

  275봉을 지나 360봉에 이르니 남쪽으로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바위능선, 어떤 것은 수평으로 판상절리(板狀節理)를 이루고 또 어떤 것은 수직으로 갈라진 넓적넓적한 중량감 있는 돌들, 돌들이 이렇게 많기 때문에 이곳에 고인돌도 많은 건 아닐까.
  자료에 의하면 유럽전역에 수천 기, 중국과 일본에 수백 기, 우리나라에 3만여 기 가운데 강화군에서 확인된 것이 140여 기이며, 특히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북방식 대형 고인돌은 2000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었다한다. 
  이 능선에도 고인돌 같은 것이 몇 개 눈에 띈다.
  선사시대라 하여 인간인데 어찌 효심이 없었으랴. 일찍 트인 자 있어 이 산위에 명당자리 하나 잡아 부모님을 장사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마니산 꼭대기에 있다는 참성단은 높이 10척,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근데, 위 사면이 각각 6척6촌이요, 아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고 했는데, 마니산의 최고봉은 469미터이며 여기서 약 1킬로쯤 떨어진 465봉에 참성단이 있었는데 관광등산객들의 발길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하여 철책을 둘러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하찮은 내 육신을 저 망망대해 파도에 비교한다면 한 톨의 겨자씨에 불과하나, 하늘과 땅의 관점에서 본다면 넓은 바다도 한 움큼의 물이며 큰 산도 주먹만 한 돌멩이에 불과하다던 10대의 홍성모와, 이 몸이 몇 번이나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라든 60대 전후 이색의 글귀가 이미 70대 전반의 내 가슴에 들락거린다.

  나는 917개라는 돌계단을 밟아 아내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3 Comments
바리톤 2007.05.03 13:34  
  저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
정우동 2007.05.04 15:16  
  마니산은 강화 본고장에서는 마리산으로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면서
대간이나 정간의 어디에도 잇대어 있지 않고 절해고도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머리산입니다.
호국불교로 귀의한 고려왕조 시대부터는 불교의 영향으로
무엇이나 이루어 주는 여의주를 뜻하는 마니산으로 되었지 싶습니다.
송월당 2007.05.04 23:25  
  지난 4월 23일에 고려산에 진달래 촬영하러 갔는데 오르 내리는데
4 시간이 걸린다 하여 입구 백련사에서 진달래 흩어져 있는 것
찍고 혼자 돌아왔어요.
왜? 그날이 가곡 부르기 날이였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 다음 날 바로
그곳을 가고 싶었는데.. 결국 그 다음 다음 날도 못가고 다음 해를
기약하고 말았어요.
내마노에 결석 안하려고 왔는데 남들 잘 찍어온 사진 보고 서운한 마음이였어요.
아직 마니산도 못 가보았는데 선생님의 글 보며 언젠가 가보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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