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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숙희 누님

사은 0 1471
숙희 누님

  내가 자동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자연 휴양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절물이었다. 절물엔 아직도 삼나무 숲길에 하얀 잔설이 덮여 있었다. 우리는 이 절물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다. 내가 한 번 이곳을 다녀가면 15일은 살아 있는 육각수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누님이 제주 관광을 마치고 충청도로 돌아간 후 나는 처음으로 약수를 길으러 그레이스를 몰고 여기에 왔다.

  입춘이 지난 뒤 이젠 햇볕도 따사롭고 포근하다. 이렇게 맑고 상쾌한 햇살이 대지 위에 신의 은총처럼 내리고, 바람은 한없이 상큼한 산소를 우리에게 공급해 준다.

 어느 교수가, 하루에 사람이 마시는 산소 량은 20리터 짜리 LPG통으로 200통을 마신다고 했다. 그것도 돈 한 푼 안내고 말이다. 그 값을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나다. 시간이 충분하면 독자 여러분은 계산해 보기 바란다.

 집을 나서면서 나는 이 그레이스를 몰고 제주도 눈길을 3박4일간 여행했던 일을 떠 올렸다.

  결혼 36년 만에 처음으로 행복한 여행을 위해 처가에 온 매형과 누님!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등에 업어서 키우느라 공부도 못하고 서럽게 자란 우리 누님. 어머니가 재혼 할 때 어머니를 따라 온 우리 누님은 바쁜 농촌에서 일손이 달리면 학교도 못 가고 아버지의 일손을 머슴처럼 거들어야 했다.

 그래서 한글도 재대로 깨우치지 못한 우리 누님. 나는 그것이 내 탓이나 되는 듯, 늘 누님을 보면 빚진 죄인의 심정이 되었다. 나를 업어서 키우느라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누님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충청도로 시집 갈 때까지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40세에 재혼하여 본 아들이 한없이 사랑스러웠으므로 지나치게 과잉 보호하며 누님이 나를 조금이라도 울리기라도 하면 누님을 혼내곤 하셨다. 나보다 8살 더 많은 누님은 그렇게 어린 시절 나를 보는 아기 업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던가? 누님은 22살에 시집갈 때가지 억세게 일만 했었다.

  내 고향 다도해는 돈이 수 없이 바다에 묻혀 있었다. 누님은 바닷가 갯바위에서 서식하는 굴을 채취하거나, 뻘 밭에서 낙지를 잡아서 우리 집 살림을 일으키는데 한 몫을 했다. 아버지께는 분가 할 때 달랑 수저하나와 밥그릇과 튼튼한 몸 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누님이 시집 갈 무렵 우리 집은 동네 우물은 말라도 우리 집 돈은 안 마른다고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아버지는 자립을 하셨다.

  누님은 한번 질매섬에 톳을 뜯으러 갔다가 질매섬 섬 사나이들에게 붙잡혀서 하룻밤을 질매섬에서 보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구역에서 자라나는 자연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타지 사람은 그들 구역에 톳을 넘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조류가 넘쳐나도 남의 구역을 침범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누님은 겨울에는 언 손을 호! 호! 불며 손이 부르트도록 해태를 했었고 여름에는 농사일에 등뼈가 휠 지경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어도, 누님은 코티분이라도 살 냥이면 아버지 몰래 곡간에 드나들면서 곡식을 퍼냈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는 아까운 것이 없었어도 누님에게는 그렇게 인색했던 것이다.

  그런 세월을 뒤로하고 누님은 22살에 충청도로 시집을 갔다. 어느 중매장이에게 속아서 충청도 산골로 시집을 간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으로 시집가면 누님이 편할 것이라 생각하고 물 설고 낯선 충청도 땅으로 시집을 보냈지만 ‘혹 떼려다가 오히려 혹을 붙이는’ 격이 되어버렸다.

  누님이 시집간 충청도는 담배농사를 짓는 곳으로 반농반어의 마을인 우리 대리보다 갑절이나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누님을 일 구더기로 시집을 보냈던 것이다.

 지금은 이층집도 짓고 그런 대로 잘 살지만 누님이 시집가서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누님과 3박4일 동안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그레이스 안에서 오랜만에 길고 긴 얘기를 할 수가 있었다. 36년을 지나면서 언제 우리 남매가 이렇게 다정하게 얘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한 때 매형이 무정자증이면서도 누님을 구박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누님을 이혼시키려고 친정에 숨겨놓기도 했었다. 그 때 매형은 내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누님과 살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었다. 그러던 시절도 다 잊고 지금은 매형과 누님이 양자를 들여서, 그 조카들이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어머니 살아 생전에 맘속으로 늘 어머니를 미워 한 우리 누님. 누님은 그렇게 일만 시키고 학교도 제대로 보내주지 않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늘 한을 품고 살았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생부의 호적으로 옮기겠다고 까지 했었다. 누님의 생부는 “이상기”다. 그래서 누님이 “김숙희”가 아니라 “이숙희”라는 것이다. 매형이 김해 김씨라서 법적으로는 동성 동본이 결혼을 할 수 없는데 속아서 결혼해서 살고 있으니, 애들이 자라서 “엄마와 아빠는 왜 성이 같아요?”하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님은 생부의 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누님이 이씨 성을 찾겠다고 한 것은 세 살 때 실종된 생부에 대한 무슨 애정이나 그리움 같은 것이 남아서 그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의 관습과 자녀들에게 대한 체면 때문이었던 것이다.

  육이오 때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실종된 생부는 유일한 자기의 생명의 씨를 험한 세상에 그대로 버려 둔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가 감기로 누워 계실 때 서울에 어머니를 맨 먼저 찾아 뵌 누님은 그 때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시지 못하고 그냥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한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제대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면 감기가 폐렴으로 돌아서고, 그 합병증으로 인해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여행 중에 내게 했었다.

 2001년 가을, 누님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었다. 서울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많이 아프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바쁜 농촌 일손을 뒤로하고 누님은 단 숨에 서울로 올라 왔었다. 어머니는 며칠 째 감기로 심하게 앓으면서 거의 초죽음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시집간 딸 밖에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어머니는 문병 온 딸에게 “숙희야! 나는 너를 못 볼 줄 알았다!”고 힘없이 내 뱉으며 “미역줄기 볶은 것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옛 날 생각이 나신 것이다. 대리에서 농사며 바다 일을 하시던 그때 입맛이 살아 난 것이다. 미역 줄거리를 볶아서 상에 올린 누님을 보시면서 어머니는 한 술 뜨셨지만 그것도 마음 뿐 목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게워 내셨다가 다시 그 미역 줄기 볶은 것을 잡수려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더 살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되었다 싶었는지 “숙희야! 인제 됐다. 가거라 농촌 일도 바쁠 텐데...”하며 자리에 푹! 쓰러지듯이 누우셨다. 누님은 그 길로 충청도로 내려갔고 어머니는 그 감기를 완전히 치료하지 못하고 또 그 해 겨울에 영세민 취로 사업장에서 겨울 바람에 시달리며 일을 하시다가 2003년 1월 10일에 다시 페렴으로 쓰러져, 3일간 산소 통을 꽂고 응급실에 계시다가 세상을 버리신 것이다. 어머니는 향년 76세를 일기로 그 무거웠던 인생의 짐을 벗고 당신이 믿고 섬겼던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 해 겨울, 나는 제주에서 목회를 하고 어머니는 손자들과 살면서 영세민 취로 사업장에서 겨울 바람을 견디며 일을 하셨던 것이다. 어려서 고생만 시키고 학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한 딸이 그리워서 그렇게 폐렴으로 돌아가시기 3개월 전에 전 남편의 딸인 누님을 불렀던 것이다.

  2004년 2월 22일부터 3일간 제주도에 엄청나게 눈이 많이 왔었다. 그 눈 쌓인 도로를 우리는 체인을 감고 거북이처럼 기어다니며 제주 관광을 했었다. 여미지 식물원과 한림공원의 수 백년 된 분재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을 했었다. 용머리 해안에서 나는 누님과 매형 셋이서 정답게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내가 타고 있는 그레이스가 주행거리 20만km를 넘었지만 누님과 함께 온 사돈들 5명을 태우고 안전하게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 나의 승합차는 수훈 갑이었다. 언제나 나의 친한 벗 그레이스! 그 오래된 연식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레이스는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그레이스를 몰고 절물로 가는 길이 한없이 포근했다. 절물에 도착해서 나는 한참동안 자동차 안에서 책을 읽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자동차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와 나의 등을 어루만졌다. 차창 밖은 가끔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릴 뿐 절물은 적막했다. 아직은 관광 철이 아니어서 사람도 별로 없는 절물 휴양림은 딴 세상만 같았다.

 자동차 안에서 나는 아직도 우리가 누님과 함께 관광중인 듯 순간 착각이 들었다. 차안에서 아직도 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누님에게 내가 전화를 한 것은 내가 광주집회를 마치고 돌아 온 날이었다. 누님의 목소리가 예전과는 달리 정다웠다. 항상 “우리 친정은 자랑할 것이 없어!”하면서 나에게 핀잔을 주었던 숙희 누님! 나는 그런 누님에게“어려서 그렇게 아들 밖에 모르고 오냐! 오냐! 하더니 목사 되어서 잘도 산다.”라는 핀잔을 자주 들었었다. 그러던 누님이 여행 다녀간 뒤 내 전화를 받고 36년 간 늘 마음의 남았던 그 서운한 감정을 다 풀어 버린 것이다.

  숙희 누님이 처녀 때는 교회도 더러 다녔는데 시집 간 후로 교회와 담을 쌓고 살던 누님이 내 전화를 받고서 “응! 그래 잘했다. 나도 기도할게! ”라고 말을 한 것은 기적이었다. 내가 얼마나 그 말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 아버지가 다른 우리 남매는 36년 간 그렇게 경원하게 살아 왔던 것이다.

 약수를 물통에 가득 채우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했다. 쪽빛 하늘에는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군무를 추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하늘이 푸르다.  나는 손수레에 물통을 싣고 와서 그레이스 문을 연다. 그레이스 뒷좌석에서“이제는 서럽지 않다!”고 “동생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누님이 웃고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다른 사랑하는 숙희 누님이...*





2004년 2월 12일 늘 푸른 제주에서 사은 김광선 시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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